[스포츠한국 이재호 기자] 유로 2004. 당시 아르언 로벤은 얼굴과 다르게 고작 만 20세였고 네덜란드 대표팀에 갓 승선한 선수였다.

하지만 똑똑히 기억한다. 로벤은 조별리그 3차전 라트비아전부터 대표팀의 주축을 넘어 가장 믿을만한 선수로 튀어 올랐고 스웨덴과의 8강에서는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로 나와 골을 성공시켰다. 4강 포르투갈전도 그랬고 모든 경기에서 막판까지 경기가 안 풀린다 싶으면 네덜란드의 모든 선수들이 오로지 왼쪽의 로벤에게만 공을 집중시켰다. 필립 코쿠, 판 니스텔루이, 오베르마스, 에드가 다비즈, 클라렌스 시도르프 등 대단한 선수들이 믿는 것은 스무살의 로벤이었다.

그만큼 로벤은 나이와 상관없이 가장 중요한 순간, 믿을만한 선수가 된 것이다.

같은 예가 한국에도 있다. 바로 박지성이다. 사실 박지성은 A매치 100경기동안 고작 13골밖에 넣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뇌리 속에 박지성의 골은 모두 기억에 남는다. 그는 정말 강한 상대, 중요한 순간에만 골을 넣어줬기 때문이다. 항상 한국이 위기에 몰릴 때는 ‘박지성이 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네덜란드가 스무살의 로벤을 믿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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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24·토트넘 훗스퍼)이 부진했다. 부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경기는 부진을 해서는 안되는 경기였다. 자신에게 오는 기회는 무조건 넣어줘야만 하는 아주 중요한 경기였다.

이날 경기전까지의 결과를 통해 토트넘은 이날 경기에서 패할 경우 최종전 결과와 상관없이 레버쿠젠에게 조 2위를 헌납해야만 했다. 즉 UCL 16강 진출이 무산된다는 것이다. UCL 16강의 가치는 단순히 2경기를 더 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이를 통한 중계권 수익, 상금배분은 토트넘 재정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또한 유럽 16강에 들었다는 것만으로 팀의 위상이 분명 달라진다.

어떻게 해서든 이겨야만 하는 경기였다. 그런 경기에서 전반 5분만에 손흥민에게 완벽에 가까운 기회가 왔다. 이정도 기회는 PK가 아닌 이상 더 나을 수 없는 좋은 골 기회였다. 델레 알리의 스루패스 세기나 손흥민의 완벽히 타이밍을 뺏은 공간침투까지 모든 것이 좋았다. 하지만 손흥민은 순간 우물쭈물하다 슛이 아닌 골키퍼를 젖히는 것을 택했고 이는 골키퍼에게 읽히고 달려오는 수비에게도 막혀 슛도 때리지 못하고 기회를 날려버렸다.

단순히 이 기회가 전부가 아니다. 손흥민은 전체적으로 이날 아쉬운 경기력을 보이고 말았다. 고작 3일전 교체로 단 20여분만 뛰고 1-2로 뒤지던 팀을 3-2로 역전시키는 완벽한 활약을 한 것과는 딴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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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복도 문제지만 이 기복이 정말 필요한 순간에는 발휘되지 않는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솔직히 손흥민이 그동안 자신이 넣은 골 중에 정말 무조건 골이 필요로 하는 절체절명의 경기에서 진짜 골을 넣어준 것은 2015 아시안컵 결승전 후반 종료 직전 동점골 정도를 제외하곤 없다. 훌륭했지만 아직 그것이 다다.

만약 손흥민이 모나코전과 같이 반드시 이겨줘야 하는 경기에서 골을 넣고 대활약을 해준다면 손흥민을 평가하는 클래스 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단순히 한경기를 잘해서가 아니다. 로벤처럼, 박지성처럼 팀이 필요로 하고, 모두가 원하는 순간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소수에게만 한정된 특권이며 그렇기에 ‘클래스가 다르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것이다.

물론 늘 잘하길 기대하는 것도 욕심이며 중요한 순간에 늘 잘할 수는 없다. 마이클 조던은 은퇴 후 “나는 선수시절 9000번 이상의 슛을 놓쳤다. 300번의 경기에서 졌다. 20여번은 꼭 승리로 이끌라는 특별 임무를 부여 받고도 졌다. 나는 인생에서 실패를 거듭해 왔다”면서도 “이것이 내가 성공한 정확한 이유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조던 역시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경기에서 실패하기도 했다. 손흥민도 그 과정 속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중요 국가대항전을 아쉽게 놓칠때면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그만큼 욕심도 많은 것이다.

확실한 것은 시즌 중 90%를 넘는 일반적인 경기보다 10%도 안 되는 바로 모나코전과 같이 ‘꼭 이겨줘야 하는 경기’들에서 어떤 활약을 펼치느냐에 따라 선수 커리어와 팬들의 인상, 그리고 클래스가 결정된다는 점이다. 클래스는 ‘타이밍’을 알 때 달라질 수 있다.

유로 2004 당시의 로벤. ⓒAFPBBNews = News1
-이재호의 할말하자 : 할 말은 하고 살고 싶은 기자의 본격 속풀이 칼럼. 냉정하게, 때로는 너무나 뜨거워서 여론과 반대돼도 할 말은 하겠다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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