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한국 이재호 기자] 그다지 눈에 띄지 않던 선수가 어느날 갑자기 잘한다. 팬들은 의아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못 던지던 선수가 제구가 되고 공도 좋아졌고 집중력도 좋아졌다는 점이다. 의아하긴 하지만 팬들은 일단 좋다.

하지만 평범했던 그들을 환골탈태 시킨 것은 바로 절친하고 소중한 이의 죽음이다. 수많은 동기부여 중에서도 가슴 아프지만 가장 극적이기도 한 친한 사람의 죽음은 사람을 완전히 바꿔놓는다. 지금 소개할 세 명의 메이저리그 투수 역시 다소 평범했지만 충격적인 죽음 앞에 ‘당신의 이름으로’를 가슴 속에 새기며 비범한 선수로 거듭났다.

2015 명예의 전당 헌액 당시 랜디 존슨. ⓒAFPBBNews = News1
▶랜디 존슨, 그저 ‘키 큰’투수에서 ‘명예의 전당’ 선수가 되다

208cm의 거인 랜디 존슨은 1988년 메이저리그 데뷔 후 약 5년간 문제투성이의 투수였다. 강속구가 뛰어나고 큰 키에서 나오는 특이한 투구폼으로 타자를 압도하긴 했지만 중요한 건 투구가 스트라이크존에 맘대로 꽂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3년 연속 리그 볼넷 허용 1위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쓴 랜디 존슨은 1992년 겨울 인생의 중대한 기로를 맞게 된다. 자신이 개인 훈련에 몰두하는 사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존슨은 개인 훈련에 몰두하느라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이를 크게 자책했다. 자책의 끝은 ‘차라리 야구를 그만두겠다’라는 생각으로 번졌다.

하지만 어머니는 조용히 존슨은 불러 아버지가 그에게 남긴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 존슨은 은퇴를 했음에도 여전히 이 유언이 무엇이었는지 밝히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이 유언을 전해 듣고 존슨은 다시 야구에 몰두했고 글러브에 아버지의 이름을 새기는 것으로 야구계의 전설이 될 것임을 다짐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1988~1992 : 49승 48패 평균자책점 3.95 BB/9 5.7, K/9 9.0 WHIP 1.42
1993~2009 : 254승 118패 평균자책점 3.13 BB/9 2.7, K/9 11.0 WHIP 1.10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부터 은퇴하는 2009시즌까지 9이닝당 볼넷(5.7→3.7)은 줄고 9이닝당 삼진(9.0→11.0)은 늘며 최고의 선수가 됐다. 특히 1999시즌부터 2003시즌까지 역사적인 사이영상 4연패를 달성하는 등 전설이 됐다.

랜디 존슨은 2015년 명예의 전당에서 무려 97.3%의 역대 8번째로 높은 투표율로 헌액됐다. 존슨은 명예의 전당 헌액 연설에서 “내 인생 가장 중요했던 1992년 크리스마스,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때를 기억한다”며 “어린 시절 아버지가 퇴근 후 집에서 내가 던지는 것을 봐주시던 모습은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존슨은 1993시즌부터 삼진을 잡은 후 손가락을 하늘로 해 아버지를 기렸고 이는 단 한순간도 1992년 크리스마스 아버지가 자신에게 전하려고 했던 말을 잊지 않으려는 의식이었는지도 모른다.

ⓒAFPBBNews = News1
▶카를로스 마르티네즈의 ‘친구의 이름으로’

오승환 소속팀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2014시즌을 마친 후 2015시즌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었다. 팀내 유망주 1위의 외야수 오스카 타베라스와 2위의 투수 카를로스 마르티네즈가 함께 메이저리그에 뛰었고 2015시즌은 동시 풀타임이 기대됐기 때문. 이미 11살 때부터 친구였던 두 선수는 2009년부터 마이너리그 생활을 함께해왔기에 투타의 ‘절친 콤비’로 기대됐다.

하지만 2014년 10월 27일 타베라스가 고향에서 여자친구와 교통사고로 사망을 하면서 이 모든 꿈은 깨졌다. 마르티네즈는 통곡했고 친구의 죽음 이후 2015시즌부터 기존의 등번호 44번을 타베라스의 18번으로 바꿔 달았다.

11살때부터 절친이었던 타베라스(왼쪽)와 마르티네즈가 장난치는 모습. ⓒAFPBBNews = News1
2013~2014 : 4승 5패 평균자책점 4.28 117.2이닝 108삼진
2015~2016 : 26승 14패 평균자책점 3.04 338이닝 321삼진

2016시즌이 아직 진행 중(9월 1일까지 성적)이지만 첫 두 시즌과 타베라스가 사망한 이후 마르티네즈의 성적은 확연히 달라졌다. 현재는 실질적인 세인트루이스의 에이스로 활약하고 있다.

타베라스는 2014년 6월 1일이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던 날이다. 마르티네즈는 그가 사망한 후 2015년 6월 1일 치러진 타베라스 데뷔 1주년 기념 경기에서 7이닝 1실점 호투로 승리투수가 됐다.

올해 역시 5월 31일 경기에 나와 8이닝 무실점 최고의 피칭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의 유니폼에는 오스카 타베라스의 이름 약자인 ‘OT’가 새겨져있었다.

마르티네즈의 왼쪽팔에 있는 타베라스를 기리는 OT패치. ⓒAFPBBNews = News1
▶맥스 셔저, 쓰러지기보다 극복을 택하다

셔저는 잘하지만 겉만 요란한 빈수레 같은 투수였다. 그도 그럴 것이 2008시즌 데뷔 후 2009년부터 매년 9승, 12승, 15승, 16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했지만 자세히 그 속을 들여다보면 200이닝을 넘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평균자책점도 4점대가 두 번이었다.

하지만 셔저는 2013시즌 사이영상을 수상했다. 모두가 놀란 깜짝 수상이었고 그의 환골탈태 배경 뒤에는 동생의 죽음이 있었다.

동생 알렉스 셔저는 맥스 셔저의 유일한 형제였다. 세 살 아래로 운동을 좋아하는 형과 반대로 공부와 숫자에 관심을 보였고 동생은 운동을 잘하는 형을 동경하며 그의 첫 번째 팬임을 자처했다. 미주리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할 정도로 명석했던 동생은 실전에만 강한 형에게 야구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고, 매일같이 이메일과 문자로 야구에 대한 생각을 나눴다.

하지만 2012시즌 여름, 동생 알렉스는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끊었던 항우울제를 복용하지 않은 것이 악화돼 우울증으로 자살을 하고 말았다.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고 첫 번째 팬임을 자처해왔던 동생의 죽음에 셔저는 쓰러지기보다 더 야구를 잘하길 원했던 동생의 염원에 보답하기로 한다.

2008~2011 : 36승 35패 평균자책점 3.92 WHIP 1.30
2012~2016 : 84승 34패 평균자책점 3.08 WHIP 1.04

동생의 죽음 후 마운드 첫 등판했던 2012년 여름의 셔저. ⓒAFPBBNews = News1
동생의 죽음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2012시즌 첫 13경기에서 5승4패 평균자책점 5.76에 그쳤던 셔저는 동생의 죽음 이후 쓰러지기보다 더 폭주하며 남은 19경기에서 11승3패 평균자책점 2.53으로 마쳤다. 그리고 2013시즌 사이영상을 따냈고 올 시즌 역시 최다이닝(190이닝)-최다삼진(238삼진)으로 질주 중이다.

여전히 셔저는 공식석상에서 동생과 관련해 일체 언급하지 않을 정도로 상처가 남아있는 듯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셔저는 동생의 죽음으로 쓰러지기보다 버텨내고 더 뛰어난 형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하늘에 있는 동생에게 보여주겠다는 신념으로 마운드 위에 서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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