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한국 이재호 기자] 요한 크루이프는 과거의 사람이다. 공식적이지 않은 카탈루냐 대표팀을 지휘한 것을 제외하면 1996년을 끝으로 사실상 축구계에서 물러났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24일(한국시각) 폐암 투병 끝에 크루이프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전 세계가 추도의 물결을 보내고 있다. 왜일까? 크루이프는 분명 과거였지만 현대 축구를 관통하는 가장 큰 물줄기를 텄을 뿐 아니라 축구계가 가져왔던 기존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놓은 혁명가였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네덜란드, 아약스, 바르셀로나 감독, 은퇴 후의 요한 크루이프. ⓒAFPBBNews = News1
▶26세 이전까지 리그 우승 6회, 챔스 우승 연속 3회

크루이프 정도의 선수를 언급할 때 장단점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 정도 클래스의 선수는 사실상 모든 부분에서 능했기 때문. 패스면 패스, 슛이면 슛, 센스면 센스, 드리블이면 드리블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10살이었던 1957년부터 아약스 유스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크루이프는 17세(1964년)의 나이에 프로데뷔를 했다. 일단 크루이프가 대단한 것은 1959~60시즌에서 리그 우승을 경험했던 아약스를 프로데뷔 2년 만에 곧바로 정상(1965~66년)에 올려놓은 것이다.

이후 1965~68년까지 3시즌 연속 리그 우승을 시킨 것을 비롯해 바르셀로나로 떠나기 전인 1973년까지 8년간 6번의 리그 우승을 아약스에게 안기며 팀의 최전성기를 만들었다. 이 기간 동안 네덜란드컵(FA컵) 역시 8년간 4번의 우승을 덤으로 안았다.

가장 위대한 업적은 역시 아약스를 이끌며 1970~1973년까지 3시즌 연속 유로피안컵(현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이로 인해 아약스는 유럽에서 단 6개 팀(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리버풀, 바이에른 뮌헨, AC밀란, 아약스)만 달고 있는 영예의 뱃지를 부착할 수 있었다. 영예의 뱃지는 챔피언스리그 연속 3회 우승 혹은 챔피언스리그 통산 5회 우승의 조건을 만족해야만 주어진다. 빅리그 팀이 아닌 클럽으로는 아약스가 유일하다.

이 모든 업적을 26세가 되기도 전에 모두 해냈다. 또한 11명이 뛰는 팀 스포츠였음에도 모두가 ‘크루이프의 팀’이라고 인정할 정도로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1972 유로피안컵 우승 후 암스테르담 광장에서 우승 세리머니를 하고 있는 크루이프(중앙). ⓒAFPBBNews = News1
▶메시 이전에 크루이프가 있었다

개인상에서도 크루이프는 독보적 존재였다. 특히 ‘유럽 올해의 선수상’ 발롱도르(현 FIFA-발롱도르의 전신)에 대해서는 엄청난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1970~1973년까지 3시즌 연속 유로피안컵을 해내는 동안 1971년과 1973년 발롱도르를 수상한다. 1972년 프란츠 베켄바우어에게 밀리지 않았다면 3년 연속 수상도 가능했던 것.

그리고 1974년 역사적인 서독월드컵이 열렸고 이때 크루이프는 네덜란드 대표팀을 이끌고 최강의 포스를 뽐내고 결승에서 개최국이자 당시 역시 최강이었던 베켄바우어의 서독과 맞붙었다. 그러나 게르트 뮬러의 결승골에 당하며 1-2 역전패했고 준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베켄바우어는 소속팀 바이에른 뮌헨의 리그 우승, 유로피안컵 우승, 서독의 월드컵 우승까지 일궈냈기에 당연히 발롱도르 수상이 유력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1974발롱도르는 11표차이로 크루이프에게 향했다.

지금으로 치면 트레블에 월드컵 우승까지 한 선수가 발롱도르를 못 받는 것과 다름없다. 1974 발롱도르는 당대 최고가 누구였는지를 증명하는 역사적인 결과였을 뿐만 아니라 크루이프가 얼마나 대단했고 당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는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1974 서독 월드컵 당시의 크루이프 모습. ⓒAFPBBNews = News1
1971, 1972, 1974 3회에 빛나는 발롱도르 수상은 메시가 2012년 4년연속 발롱도르 수상을 하기 전까지는 `넘사벽' 수준의 기록이었다. 가히 메시 이전에 크루이프가 있었다고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선수로서, 감독으로서 완성시킨 토탈사커

크루이프가 선수시절 대단했다는 것은 위와 같은 이력으로 체감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선수시절, 그리고 감독으로서 보여줬던 ‘하나의 철학’으로 느낄 수 있다.

바로 ‘토탈사커’. 말로는 모두 들어봤을 토탈사커의 사실상의 창시자로 요한 크루이프를 빼놓지 않는다.

물론 실제로 토탈사커는 축구종가 잉글랜드에서부터 시작됐다고는 하지만 크루이프는 선수시절부터 사실상 그라운드의 감독으로서 활약하며 토탈사커를 구사했다. 리누스 미헬스라는 훌륭한 감독이 없었다면 물론 불가능했던 일이다.

아주 쉬운 개념으로 전원 공격, 전원 수비인 토탈사커는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 모두가 유기적으로 공격할 때 모두 공격을 하고, 수비를 해야하는 상황에 동시에 함께 수비하는 것은 스포츠 종목 중에서도 특히 많은 수가 하는 축구의 특성상 상당히 어렵다.

그렇기에 감독이 아무리 훈련을 시키더라도 그라운드 안에서 지휘자 역할을 할 선수가 필요하고 크루이프는 이를 완벽하게 해냈다.

선수시절 이미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을 지휘했던 크루이프의모습. ⓒAFPBBNews = News1
바르셀로나 감독을 지내면서도 지속적으로 ‘공격을 하다가 공을 빼앗기면 수비는 바로 공을 뺏긴 지점부터 시작’이라는 철학을 내세웠다. 뭔가 익숙하지 않은가? 그렇다. 현대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전방 압박과 ‘공격수는 첫 번째 수비수’라는 개념을 사실상 실현시킨 것이 크루이프다.

이전의 축구는 공격수는 공격을 하고 수비수는 수비를 하며 각자 자신의 역할을 잘해내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90분 동안 드넓은 피치 안에서 그 역할을 해내는 것만으로도 결코 쉽지 않기 때문.

하지만 크루이프는 각자의 역할이라는 개념을 깨고 모두가 한 몸처럼 움직이는 ‘조직력’이라는 축구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체력소모를 줄이기 위해서는 공을 빼앗기지 않고(짧은 패스 위주), 공을 빼앗겼을 때는 바로 소유권을 가져오는(전방 압박) 개념을 새롭게 주입시켰다. 정체되어있던 축구의 패러다임을 바꾼 혁명가가 바로 크루이프인 것이다.

▶과거의 크루이프? 현대축구는 크루이프에 기반한다

약 30~40년 전에 크루이프가 보여줬던 토탈사커의 기반은 현대축구에도 그대로 살아숨쉬고 있다. 1988년부터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부임했던 크루이프는 가장 먼저 바르셀로나 유스팀을 손봤고 카를레스 푸욜, 리오넬 메시, 이승우 등으로 대표되는 ‘바르셀로나 유스출신’의 기반은 여기서부터 나왔다.

2000년대 후반과 2010년대 초반 유행을 불러일으켰고 지금도 여전히 그 위상을 이어가고 있는 ‘티키타카’의 완성을 펩 과르디올라(현 바이에른 뮌헨 감독)로 여긴다. 과르디올라는 1984년부터 1990년까지 바르셀로나 유스팀에 있었고 과르디올라가 이제 축구를 알아갈 17세인 1988년 딱 크루이프가 바르셀로나 감독이 된다. 과르디올라의 프로 데뷔를 크루이프가 시켰고, 전성기 시절도 크루이프와 보냈다. 과르디올라의 유스-데뷔-전성기까지 모두 같이 한 것이 바로 크루이프.

펩 과르디올라(오른쪽)의 유스-데뷔-전성기를 함께한 크루이프. ⓒAFPBBNews = News1
자연스레 과르디올라는 크루이프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수밖에 없고 토탈 사커에서 조금 더 자신의 식으로, 그리고 스페인 선수들의 성향에 맞는 티키타카를 완성시켜 역사상 가장 완벽했던 바르셀로나를 완성시키고 명장으로 거듭난다.

즉 현재 우리가 지켜보는 바르셀로나의 끊이지 않는 화수분 같은 유스 시스템, 티키타카, 스위칭 플레이로 대변되는 역할에 구애받지 않는 포지션 파괴 등은 모두 크루이프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

크루이프는 분명 과거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1996년 바르셀로나 감독을 끝으로 사실상 20년간 현업에서도 떠나있었다. 그러나 그가 뛸 당시에도, 그리고 은퇴 후에도 그의 축구 철학은 남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는 과거였지만 현재이고, 또 미래의 자양분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티에리 앙리(오른쪽)는 크루이프를 존경하는 마음에 아스널에서 14번을 달고 뛰었다. 데니스 베르캄프 은퇴경기에 초청받은 크루이프의 모습. ⓒAFPBBNews =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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