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한국 이재호 기자] 종목은 다르지만 메이저리그 얘기로 시작해보자.

2009년 9월 19일, 한 투수가 시애틀 매리너스의 스즈키 이치로를 상대로 끝내기 홈런을 허용했다. 짜릿하긴 하지만 한 시즌을 진행하다보면 가끔 나오는 끝내기 홈런이 화제를 모았던 이유는 그 투수가 무려 2년 5개월여 만에(2007년 4월 이후) 허용한 끝내기 홈런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걱정했다. 오랜 시간 이어오던 자신의 강력한 투구가 드디어 허점을 드러냈으니 흔들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투수는 경기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유유히 경기장을 떠났다.

바로 메이저리그 세이브 통산 1위(652세이브)이자 조정 평균자책점(시대를 불문, 타자/투수 친화적인 구장 등 많은 요소를 같은 값으로 변환한 평균자책점) 통산 1위(1,000이닝 이상 던진 투수에 한해 - 205)에 올라있는 ‘악의 제국’ 뉴욕 양키스 최후의 보루였던 마리아노 리베라의 일화다.

마리아노 리베라(왼쪽)와 지소연. ⓒAFPBBNews = News1, 연합뉴스 제공
리베라는 정말 뛰어났다. 그의 커터는 타자의 방망이를 수없이 작살냈고, 월드시리즈 7차전 마지막 이닝에서도 삼진을 잡아낼 수 있는 담대함을 지녔다.

그럼에도 리베라 최고의 능력으로 많은 전문가들은 ‘망각’을 꼽는다. 실제로 리베라를 가장 오랜시간 지켜봐온 ‘양키스의 캡틴’이었던 데릭 지터는 자신이 지켜본 모든 선수 중 가장 강한 정신력을 가진 선수로 리베라를 선정하기도 했다.

리베라라고 해서 왜 가슴이 아프지 않았겠는가. 2년 5개월여 만에 끝내기 홈런을 허용했으니 자존심에 금이 갈뻔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리베라는 경기 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웃음지으며 경기장을 떠났다. 잊어야했기 때문이다. 그가 웃으며 나오는 건 경기에 대한 열정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최대한 빨리 경기를 잊기 위한 ‘망각’이라는 능력을 발동시키기 위함이었다.

언제나 완벽해보이는 리베라도 홈런을 허용하고 진적도 많았다. ⓒAFPBBNews = News1
바로 지금, 2016년 3월 3일 현재 한국 여자축구대표팀의 지소연에게도 바로 이 같은 능력이 필요하다.

2일 일본전에서 지소연은 후반 25분 페널티킥을 실축하는 큰 실수했다. 실수의 대가는 컸다. 지소연이 페널티킥을 실축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은 무려 22년 만에 일본 원정에서 승리를 따낼 수도 있었다. 한국은 그 한방을 위해 90분 중 70분까지 슈팅 하나만 기록하는 굴욕을 겪으면서도 수비적으로 나갔었다.

지소연도 그 누구보다 자신의 실수가 얼마나 컸는지 알기에 경기 후 취재진 앞에서도 펑펑 울고 말았다. “내가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해 너무 미안하다. 어떤 말을 하기도 어렵다”며 “심리 싸움에서 내가 진 탓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동료들을 볼 면목이 없다”며 운 지소연이다.

그러나 이렇게 낙심해 있을 순 없다. 이번 2016 리우올림픽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은 이틀 혹은 3일 간격으로 바로 바로 경기가 열린다. 낙심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4일로 예정된 호주전은 일본전 이후 고작 이틀 만에 열린다. 그리고 호주를 반드시 잡아야만 올림픽 진출이라는 목표에 다가설 수만 있다. 한국 입장에서는 일본을 잡지 못한 아쉬움을 빨리 털어내야 한다. 지소연도 마찬가지다.

ⓒAFPBBNews = News1, 연합뉴스 제공
그렇기에 ‘망각’이 필요하다. 어제의 아픔을 내일의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것까지 바라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그냥 완전히 어제의 일을 잊는 것이 필요하다. 어제에 발목 잡히면 내일의 전진은 불가능하다.

아마 지소연은 숙소로 돌아가 잠 한숨 제대로 못자고 자책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됐다. 잊고 경기를 준비해야한다. 지소연은 명실상부 한국의 에이스다. 지소연이 어떤 경기를 펼치느냐에 따라 대표팀의 경기력과 결과가 모두 차이가 난다. ‘망각’이라는 쉬워 보이지만 그 무엇보다 어려운 능력이 발휘되어야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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