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시절 별명은 '악바리‘… 감독 반대에도 ’공격 앞으로‘
“공격축구에 대한 고집? 누구의 영향보다 저만의 스타일이죠”

[인터뷰①] 수원FC 승격 이끈 조덕제 “고집이 큰 일 만들었죠”
[인터뷰②] 공격축구와 조덕제의 연결고리, 선수시절의 ‘본능’
[인터뷰③] ‘천생 축구인’ 조덕제 “축구에 미친 사람으로 남고 싶다”
[인터뷰④] 이상과 현실 사이, 수원FC의 2016시즌 구상은?

[스포츠한국 수원=김명석 기자] 선수 시절 그는 악바리로 통했다. 팀에 필요한 포지션이면 어디든 맡아 늘 열심히 뛰었다. 스스로 “훌륭한 선수는 아니었다”면서도 “늘 120% 최선을 다하는 선수였다”고 고백한 이유다.

그리고 또 하나, 그의 선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조덕제 감독과 공격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 조덕제 감독이 수원FC뿐만 아니라 아주대 시절에도 공격적인 축구를 선호했던 이유와도 무관하지 않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축구화를 신었다. 축구부를 담당하던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축구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이후 초·중·고를 모두 전북 군산에서 다니면서 축구선수로서의 꿈을 키워갔다.

“학창시절에는 축구를 잘 하는 선수, 훌륭한 선수는 아니었어요. 다만, 항상 최선을 다하는 선수였죠. 100%가 아니라 120% 최선을 다하는, 그런 노력하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아요.”

김봉진 인턴기자 multi@hankooki.com
그는 아주대를 거쳐 1988년 대우로얄즈에 입단했다. 프로 시절에는 팀에 필요한 포지션을 모두 소화하는 멀티 플레이어였다. 공격수와 골키퍼를 제외하고 안 뛴 포지션이 없었다. 미드필더도, 측면 수비수도, 때로는 리베로 자리에도 섰다. 대신 어디에서 뛰든 늘 열심히 뛰어다녔다. 악바리라는 별명은 그래서 붙었다.

동시에 그는 공격적인 성향이 짙은 선수였다. 감독이 자제하길 바랐지만, 본능은 숨기지 못했다. 수비적인 역할을 맡아도 달라지지 않았다. 현재 조 감독의 전술적인 색채와도 그 궤를 같이 한다.

“선수 때는 기분대로 공을 찼어요. 사이드에서 뛸 때도 오버래핑을 막 나갔고, 뒤로 패스하는 척 하다가 상대를 제치면 희열도 느꼈고. 지금 활용하고 있는 공격축구도 누구의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저만의 스타일이죠.”

선수 생활도 나름 성공적이었다. 8시즌 동안 213경기에 나서 10골 11도움을 기록했다. 1989년에는 K리그 베스트 미드필더에도 선정됐고, 경기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대표팀의 문턱도 밟아봤다.

김봉진 인턴기자 multi@hankooki.com
다만 그의 선수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 1996년, 우리 나이로 32세에 은퇴를 결심했다. 오랜 부상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대학교 4학년 때는 허리 부상으로 축구를 그만둘까도 생각했어요. 앉아 있지도 못했으니까요. 어쩌다가 다시 축구를 다시 하게 됐는데, 이후에도 워낙 수술을 많이 했어요. 무릎도, 발목도, 어깨도. 공을 못찼으니 수술을 많이 했겠지(웃음). 발목 수술만 일본 가서 두 번 정도 했는데, 그 후로 회복이 안돼서 결국 은퇴를 했어요.”

선수 은퇴 직후 그는 곧장 지도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물론 모교인 아주대 코치에 부임했다. 평생을 축구밖에 몰랐던 그에게 지도자는 필연적인 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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