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한국 이재호 기자]꼭 30년 전인 1985년,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고, 한국 축구는 8회 연속의 시작이 되는 월드컵 진출을 32년 만에 이뤄냈고, 여의도에는 63빌딩이 준공됐다. 그리고 1985년 이후 30년 동안 대한민국에 대통령은 7번이나 바뀌었다.

이런 오랜 세월 동안 캔자스시티 로얄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은 없었다. 하지만 지난 2일(이하 한국시각) 무려 30년 만에 캔자스시티는 감격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다.

캔자스시티 우승 요인은 결국 '사람'이다. 캔자스시티의 구성원들은 유독 '괴물'들로 구성돼있다. 선발 투수 중 가장 빠른 공을 던지는 선수 중 하나인 요다노 벤추라, 절대 점수를 줄 것 같지 않은 불펜 투수 웨이드 데이비스-케빈 에레라, 수비와 도루를 완벽하게 해내는 외야진 등 정말 괴물 같은 선수들이 많다.

하지만 캔자스시티의 우승 속에는 조금은 다른 괴물들의 숨겨진 활약을 빼놓아선 안 된다.

왼쪽부터 매드슨, 크리스 영, 네드 요스트 감독, 데이튼 무어 단장. ⓒAFPBBNews = News1
3년의 재활을 이겨내고 돌아온 매드슨

라이언 매드슨(34). 박찬호의 필라델피아 필리스(2009년) 시절을 기억하는 팬들이라면 떠올린 이름이다. 2003년 메이저리그 데뷔 후 특히 2007년부터 2011년까지 평균자책점 2.89로 정상급 불펜으로 활약한 매드슨은 2012시즌을 앞두고 1년 600만 달러에 신시내티 레즈로 옮겼다. 하지만 시즌을 시작하기도 전에 팔꿈치 토미존 수술로 시즌 아웃이 되며 신시내티의 600만 달러 투자는 허공에 사라졌다.

1년간의 재활을 마치고 2013시즌 LA 에인절스에 재신임(1년 325만달러)을 받았지만 끝내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채 또 다시 시즌을 날렸다. 이에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더 이상 매드슨의 재기가 힘들 것으로 봤고 2014시즌에는 아예 계약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매드슨은 재기를 꿈꾸며 재활했고 올 시즌을 앞두고 캔자스시티와 고작 85만달러의 마이너계약을 맺으며 빅리그 복귀의 기회를 잡게 됐다. 재활 3년 사이 자신의 몸값은 600만달러에서 85만달러로 떨어졌지만 그는 행복했다.

매드슨은 스프링캠프를 통해 이미 지난 시즌을 통해 '최강 불펜진'으로 알려진 캔자스시티 불펜진 경쟁에서 당당히 승리하며 올 시즌 68경기 63.1이닝 평균자책점 2.18이라는 빅리그 통산 10년간 가장 낮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시즌을 보냈다.

3년간의 기나긴 재활은 그를 포기하게 할 수 있었다. 또한 34세의 나이는 은퇴해도 납득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끝내 다시 빅리그에 돌아온 매드슨은 '재활과 인내의 괴물'이다.

'똥볼'로 월드시리즈 우승의 발판을 마련한 크리스 영

올 시즌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평균 패스트볼 구속은 92.4마일(약 149km). 2008년 90.9마일이었던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7년 사이 1.5마일이나 증가했다.

그러나 크리스 영(36)은 소위 '똥볼'로 승부한다. 2012년 그의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84.6마일(약 136km)에 지나지 않았고 올 시즌은 굉장히 빨라진(?) 86.4마일(약 139km)의 공을 자랑한다. 올해 기록한 86.4마일은 50이닝 이상 던진 빅리그 322명의 포심 패스트볼 가운데 315위의 느린 구속에 해당한다.

208cm의 키에 가장 높은 곳에서 투구하는 크리스 영의 투구 모습. ⓒAFPBBNews = News1
영의 투구를 보면 위태위태하다. 느리고 구질도 다양하지 않다. 하지만 타자들이 연신 헛스윙을 해댄다. 맞기만 하면 넘어갈 것 같은데 안 넘어간다. 이 모습은 지난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연장 12회 올라온 투구내용으로 확인할 수 있다. 3이닝을 무안타로 완벽하게 막아내며 팀의 1차전 승리를 안겼던 영에게는 '208cm의 키'라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

압도적인 키에서 최대한 위에서 던지는 투구폼으로 그야말로 2층에서 내리 꽂는 듯한 투구는 공이 느리지만 타자들에게는 생소하고 어렵다. 결국 영은 월드시리즈 2경기에서 7이닝 2실점 결정적인 호투로 팀의 우승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똥볼이지만 자신만의 스타일을 관철한 괴물' 크리스 영에게 36세 나이에 찾아온 첫 우승이었다.

11번이나 실패하는 명장을 보며 배운 네드 요스트 감독

캔자스시티의 요스트(60) 감독은 오랜 시간 코치를 해오며 감독을 시작한 정통파 코스를 밟았다. 1991년부터 2002년까지 무려 12년간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코치로 있으면서 '명장' 바비 콕스 감독 밑에서 배웠다.

그러나 명예의 전당까지 헌액 된 콕스 감독은 우승에는 약했다. 감독으로서 딱 한 번의 월드시리즈 우승(1995년)밖에 못한 것. 90년대 초반 애틀란타의 전력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생각하면 분명 아쉬운 부분이다. 콕스와 함께 12년을 함께한 요스트 코치는 곁에서 11번의 실패를 지켜봤다.

그 속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요스트 감독은 2003년부터 감독을 시작했다. 우승의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2003년부터 2008년까지 맡은 밀워키 브루어스의 팀 전력은 강하지 못했고(포스트시즌 1회 진출), 2010년부터 맡은 캔자스시티는 지난해가 돼서야 '강팀'소리를 들었다. 지난해는 아쉬운 불펜 운영과 매디슨 범가너라는 괴물 앞에서 준우승에 그쳐야했지만 올 시즌 반복되는 실수는 없었다.

명장 밑에서 그의 수없는 실패를 바라본 요스트 역시 실패를 거울삼은 '타산지석의 괴물'이다.

데이튼 무어 단장(왼쪽)과 네드 요스트 감독. ⓒAFPBBNews = News1
30년전 우승을 지켜본 소년 무어, 단장으로 소년의 꿈을 이루다

한국은 '감독의 야구', 메이저리그는 '단장의 야구'라고 한다. 그만큼 메이저리그는 감독보다 단장의 영향력이 크다. 감독은 정말 영어 단어 그대로 `Manage', 관리하는 사람이고 단장은 선수 영입, 선수단 운영 등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캔자스시티의 데이튼 무어(48) 단장은 캔자스주에서 태어난 그야말로 태생부터 캔자스시티 팬이다. 1967년생이니 18세의 나이에 TV를 통해 고향팀 캔자스시티의 우승을 지켜본 것을 기억한다는 무어 단장은 스스로를 '캔자스시티의 열혈팬'이라 자청한다.

2006년 39세의 젊은 나이에 고향팀의 단장으로 취임했지만 상황은 좋지 못했다. 영광의 시절은 뒤로하고 1996년부터 취임하기 직전인 2005년까지 10년간 캔자스시티가 지구 5개팀 중 5위 5회, 4위 3회, 3위 2회로 '최악의 팀'으로 불리고 있었기 때문.

리빌딩은 쉽지 않았다. 그가 부임한 이후 2011년까지 6년간 5위 4회, 4위 2회로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해임 압박도 많았다. 그러나 차근차근 끌어 모은 유망주는 서서히 마이너리그를 초토화했고 결국 지난 시즌부터 그 잠재성은 터지며 캔자스시티는 강팀이 됐다.

그리고 1985년 캔자스시티의 우승을 TV로 지켜보던 열혈팬이었던 소년은 2015년 단장으로서 소년시절 캔자스시티를 다시 우승시키겠다는 꿈을 이뤄냈다. '성공한 덕후(매니아)' 무어 단장도 이만하면 괴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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