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한국 이재호 기자] “선수를 어떤 경우에도 A,B,C등급으로 나누지 않는다. 항상 동일하게 대우한다. 모든 선수들이 중요하다.”

울리 슈틸리케(61·독일) 감독은 오랜 만에 선발된 선수들인 지동원, 김창수, 정성룡 등이 맹활약한 이유에 대해 묻자 위와 같은 우문현답을 했다.

사실 말은 쉽다. ‘차별은 없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 ‘모두가 평등하다’와 같은 말은 늘 듣는 얘기지만 실천이 어렵다. 하지만 울리 슈틸리케의 대표팀 안에서는 그 ‘이상’이 ‘현실’이 되고 있다.

가장 최근 천만관객을 넘은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테랑’이 흥행한 이유는 단순했다.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힘들어 보이는 안하무인 재벌에 대한 통쾌한 응징이 영화로나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화 ‘베테랑’의 흥행과 울리 슈틸리케 감독의 치솟는 인기는 묘하게도 함께하는 구석이 있다.

김지수 인턴기자 multi@hankooki.com, 영화 '베테랑' 포스터
▶허울뿐인 평등, 무등급화

모두가 평등하게 대우받고 싶어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힘든 일이지만 모든 인간은 평등을 울부짖는다. 그 옛날 중국 진나라 시절 진승·오광의 난에서 나온 “왕후장상의 씨앗이 따로 있느냐(王侯將相寧有種乎)”라는 명언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평등은 태초의 감정이라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잘 실현되지 않는다. 단순히 축구대표팀을 봐도 알 수 있다. 멀리 가지 않아도 대표팀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파·해외파 차별 논란 속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최근에는 A·B급 논란도 있었다. 그 저의나 곡해된 의미를 차치하더라도 단순히 23명이 모여서 축구를 차는 소집단에서도 평등의 가치는 실현되기 어려웠다.

영화 ‘베테랑’도 그렇다. 덤프트럭 운전사(정웅인 분)는 노동자라는 이유로 임금 착취를 당하고 재벌3세(유아인 분)가 시키는 대로 싸움을 해야 했다. 또한 재벌3세가 단순히 '화가 난다'는 이유로 케이크를 얼굴에 묻히고 얼음을 몸 속에 넣고 담배를 몸에 지져도 주변 사람들은 끽소리도 하지 못한다.

결국 등급화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재벌3세와 덤프트럭 운전사를 같은 지위로 보지 않는다. 재벌3세가 더 위에 있는 계층의 인간이라고 여기고 세계 유명 클럽에서 뛰는 선수가 더 뛰어나고 중요한 사람이라고 잠재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선수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슈틸리케 감독. 대한축구협회 제공
▶현실은 보여주지 못하는 이상실현의 카타르시스

그런 의미에서 슈틸리케 감독과 영화 ‘베테랑’이 주는 의미는 맥락을 같이 한다.

슈틸리케 감독은 “선수를 어떤 경우에도 A,B,C등급으로 나누지 않는다. 항상 동일하게 대우한다. 모든 선수들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언제나 이 선수들도 대우하고 존중했기에 선수 본인들이 경기장에서 열심히 하는 모습으로 보여줬다”고 언급한다.

실제로 슈틸리케 감독은 21개월간 클럽팀에서 득점이 없었고 A매치도 4년 1개월간 득점이 없었던 지동원(아우크스부르크) 선발 후 논란에 휩싸였지만 지동원은 자메이카전 결승골은 물론 나머지 2골에도 깊이 관여하며 최고의 활약으로 경기 MOM(Man Of the Match)에 선정됐다.

단순히 지동원 만이 아니다. 대표팀 경험이 없던 이재성(전북), 권창훈(수원), 황의조(성남), 이정협(부산) 같은 선수들은 줄줄이 대표팀 핵심으로 거듭났다. 슈틸리케는 여론 반응에도 민감해 논란에 휩싸인 선수(이용재, 정성룡 등)를 직접 언급하며 옹호하기도 한다. 자연스레 슈틸리케 감독에 대한 충성심, 치열한 주전경쟁을 통해 더 나은 대표팀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영화 ‘베테랑’에서도 끝에는 안하무인 같았던 재벌3세가 형사에 의해 처참한 모습으로 대중 앞에서 무릎 꿇고 만다. 가장 서민 같은 형사는 재벌3세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 같은 ‘권선징악’과 평등을 실현하는 모습은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요즘 같이 서열화, 등급화,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현실에서는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반대급부가 더욱 컸기에 한국 인구의 1/4에 달하는 관객이 영화 ‘베테랑’에 열광한 것이다.

영화 '베테랑'의 스틸컷
슈틸리케 역시 심심찮게 ‘갓(God)틸리케’로 여겨진다. 단순히 성적이 좋은 것도 있지만(2015년 14승 3무 1패) 대중은 슈틸리케가 어떻게 대표팀을 대하고 선수들을 바라보는지 밖에서라도 느끼기 때문이다. 소모임에 불과한 국가대표 축구팀이라도 이상을 현실로 실현시키는 모습에 열광하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힘들지만 축구 대표팀이라도, 영화에서라도 이 같은 가치들이 실현되면서 사람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열광한다. 잠시나마 축구장, 영화관에서 자신들의 불만과 스트레스를 쏟아내고 이상이 현실화 된 것을 목도한 우리는 다시 답답한 현실로 돌아와야한다. 우리는 슈틸리케와 '베테랑'에 열광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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