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표 경남지사, 선수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안종복 사장(맨 오른쪽)
▲’안종복 후보 사퇴’의 진실

프로축구의 대표적 시민 구단 가운데 하나인 경남 FC의 안종복(57) 사장에겐 여러 가지 별명이 있다. ‘축구를 위해 태어난 남자’, ‘기적의 사나이’, ’재테크의 귀재’ 등등이 그 중 대표적인 것들. 왜 이런 별명들이 그의 이름에 따라 다닐까.

이에 대한 설명은 후술(後述)하기로 하고 먼저 지난 1월에 있었던 제53대 대한축구협회장 선거 때 얘기부터 해보자.

축구협회장 선거가 축구계는 말할 나위도 없이 국내 스포츠계 전체의 최대 관심사로 부각돼 있던 지난 1월13일. 한 가지 ‘쇼킹’한 뉴스가 사람들의 귓전을 자극했다.

‘안종복 후보 사퇴’.

대우 주무시절이던 1982년, 제63회 전국체전에 출전해 포항제철을 1-0으로 누르고 우승한 뒤 금메달을 목에 건 안종복.
선거전이 본격화된 1월초 이후 각종 여론조사 결과, 허승표(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김석한(사업가), 윤상현(새누리당 의원) 등 3후보에 앞서 정몽규 후보(당시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와 함께 ‘양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던 안종복이 느닷없이 사퇴했다는 소식을 들은 대부분 축구인들의 ‘분석’은 한결 같았다.

“아, 그 사람이 세 명을 못 붙잡았구먼.”

이 말의 뜻을 우선 설명하자면 축구협회장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서는 투표권을 가진 24명의 대의원 가운데 3명 이상의 추천을 받아야 하는데 안종복이 이 3명의 추천을 받지 못해 사퇴를 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정말 그럴까.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무슨 말은 못합니까. 사실을 말씀드리지요. 전 그때 이미 세 사람으로부터 추천서를 받아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후보등록 마감일인 1월14일에 등록을 할 예정이었지요.”

여기서 먼저 알고 싶은 것이 있다. ‘세 사람’이 누구인지.

안종복 사장(오른쪽)이 자택이 있는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한 커피숍 야외 의자에 앉아 필자에게 자신의 지나온 여정과 경남 FC의 향후 운영목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름까지 말씀 드리긴 그렇고 그 양반들의 직책을 밝히자면 서울, 고등, 전남입니다.”

안종복이 말하는 ‘서울’이란 서울시 축구협회장, ‘고등’은 고등학교 축구연맹회장, ‘전남’은 전라남도 축구협회장을 말한다. 어쨌거나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어렵게 3명의 추천서를 받아놓고 사퇴를 해버렸으니. 추천해준 사람들에 대한 예의도 그렇고.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회장 선거에 나섰던 어떤 후보 한 분이 전날 저를 찾아와서 사정을 하는 거에요. 좀 도와 달라고…. 도와 달라는 말이 뭐겠어요. 간단히 말해서 포기하고 물러나 달라는 말 아닙니까. 제가 가지고 있는 표가 자기에게 돌아갈 걸로 생각했던 모양이지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라고 야단을 쳐서 돌려보낼까 하다가 여러 말 하는 게 싫어서 ‘그래, 그럼 당신이 알아서 잘 해 보시오’하고 출마 의사를 접었던 겁니다.”

‘싸나이 안종복’의 면모를 알 수 있는 대목인데 필자가 이에 대해 한마디 사족을 달자면 그때 안종복을 찾아와 사퇴를 종용했던 인사 역시 회장 선거에서 정몽규 후보에게 패했다.

▲”현재와 같은 회장 선거 방식 아래서는 로비 가능성 지극히 농후”

회장 선거 얘기가 나온 김에 현행 선거 방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물었다.

“지금 대한축구협회장 선거는 대의원 24명이 투표를 하도록 해서 가장 많은 표를 얻는 사람을 회장으로 인정하는 방식 아닙니까. 이런 방식은 엄밀히 말해 어떤 후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대의원들을 찾아 다니면서 1대1로 로비를 할 수 있는 여건을 합법적으로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유권자’의 숫자가 극히 한정돼 있어 재력이 있는 후보가 얼마든지 유권자 개개인과의 ‘물밑 접촉’을 통해 표를 매수할 수 있는 제도라는 얘기로 들리는데 그렇다면 이에 대한 이상적인 대안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간단히 말씀 드려서 선거인단을 구성하는 겁니다. 500명이면 500명, 조금 많게 잡아 1,000명이면 1,000명의 선거인단을 구성해 그들로 하여금 축구협회장을 선출하도록 하자는 얘기지요. 그렇게 하면 대의원들을 상대로 한 로비도 원천적으로 방지할 수 있을 테고 또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로 선거인단이 구성되는 만큼 그 분들의 의견이 폭넓게 투표 결과에 반영될 수 있는 장치가 저절로 마련될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처음 듣는 얘기라 그런지 사뭇 신선하고 그럴 듯하게 들린다. 그렇다면 선거인단은 어떻게 구성하는 게 좋을까.

“어렵게 생각할 거 없지요. 축구에 대해서 가장 많이 알고 계시는 원로 그룹을 비롯해서 일반 축구인, 축구지도자, 스포츠 학계 인사, 그리고 축구를 취재해온 언론인들, 거기다 축구를 사랑하시는 축구팬들. 이런 분들을 선거인단으로 영입하면 우리나라 축구를 이끌어 가는데 가장 적합한 인물을 뽑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선거에서 당선된 정몽규 회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축구에 대한 열정도 많으시고 축구를 사랑하는 마음 또한 대단한 분이라는 점은 잘 알고 있고 또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분이 한국 축구계를 이끌어 갈 만한 경륜이나 능력을 갖추고 계신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씀 드려서 회의적입니다. 지난 3년 동안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로 재직하시면서 해오신 일들을 생각하면 그렇다는 얘긴데요. 하지만 회장에 취임하신 뒤로 축구계의 많은 분들과 두루 접촉하시면서 한국축구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계시니까 기대를 가지고 지켜봐야겠지요.”

축구협회의 운영방식에 대한 평가는.

“지금 한국축구의 세계랭킹이 30 몇 위인가 그렇지요. 한데 외람된 말인지는 모르지만 축구협회의 행정력은 한 150위가 될까 말까 하다고 봅니다. 모든 게 잘 되면 회장 덕이고 못되면 직원 탓으로 돌리니까 그렇다는 얘깁니다. 이래가지고는 발전은커녕 퇴보만 하게 될 겁니다. 새로운 회장님의 책임이 그래서 더욱 무거운 게 아닐까요.”

▲홍준표 경남지사 간청으로 경남 FC 사장에 취임

안종복이 시민 프로축구단 경남 FC의 사장을 맡은 것은 지난 1월말.

인천 유나이티드의 사장으로 2011년 시즌을 마치고 축구계 일선에서 물러나 남북체육교류협회 회장으로 순수한 대북 스포츠 교류에 전념하고 있던 차에 평소부터 친분이 있던 홍준표 경남 지사의 간청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사실 저는 인천 유나이티드의 사장에서 물러난 뒤로 이제 축구팀은 맡지 않고 남북체육교류협회 일에만 힘을 기울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요. 한데 지난 겨울에 홍준표 지사 님이 몇 번이나 저를 찾아오셔서 구단 운영을 맡아달라고 부탁을 하시더군요. 처음에는 거절했지요. 생각도 없고 능력도 없다고요. 한데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저와 각별한 친분을 맺고 있는 지사님이 여러 번 찾아오셔서 간곡하게 말씀 하시기에 ‘그렇다면 부족한 힘이지만 경남 축구단의 발전을 위해 한번 최선을 다해보자’ 이런 마음에서 중책을 맡게 된 겁니다. ”

안종복의 이 말을 짧게 해설하자면 김두관 전 지사의 사퇴에 따라 작년 12월19일 대통령선거와 함께 실시된 경남 지사 선거에서 당선된 홍 지사는 시민 프로축구단인 경남 FC의 구단주를 ‘당연직’으로 맡게 됐다. 한데 홍 지사는 구단 운영에 혁신적인 개혁 의지를 밝혔고 이런 과정에서 권영민 전 사장이 사퇴해 공석이 된 후임 자리에 평소부터 친분이 두텁고 프로축구단 운영에 해박한 노하우를 갖춘 안종복을 영입한 것.

경남 FC의 운영에 대한 청사진을 요구했다.

“경남 FC가 2006년 창단 이후 FA컵 준우승을 두 차례나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장 가능성은 무한한 팀입니다. 제가 시민구단인 인천 유나이티드의 사장을 역임하면서 몸소 터득한 다양한 경험과 노하우를 활용해 경기력은 물론 구단 운영면에서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명문 중의 명문 구단을 만드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할 생각입니다.”

▲대우와 현대 사이

안종복의 고향은 강원도 속초.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그곳에서 다녔다.

“어릴적에 제 아버님이 속초에서 운수업을 하셨는데요. 트럭으로 물건을 실어 나르는 일이었던 것 같은데 그 사업이 아주 잘 돼서 속초에서 부잣집이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습니다. 한데 어느핸가 속초 앞바다에 해일이 일어나서 트럭으로 실어와 쌓아둔 물건들이 모조리 바닷속으로 휩쓸려 들어간 적이 있거든요. 그때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거처를 옮겨 이주해 온 곳이 서울이었다.

“제가 속초중학교를 졸업한 게 1969년인데요. 경신고에 입학한 건 4년 뒤인 1973년이었습니다. 그때 서울에서 제일 좋은 고등학교가 경기고였지 않습니까. 그 학교엘 들어가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안 되는 거에요. 어려운 집안 형편 가운데서 무려 3년 동안이나 재수를 해도 안 되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들어간 학교가 경신고였던 겁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경신고는 한국 최고의 축구스타 차범근의 출신교.

“어릴 때부터 축구에 관심이 있어서 경신고에 입학하고 나서 바로 축구부에 들어갔습니다. 차범근 선배는 제가 입학하던 해에 졸업을 해서 제가 그 선배와 같이 뛸 기회는 없었지요. 어쨌거나 저도 볼을 아주 잘 찼습니다. 2년 뒤인 1975년에 청소년대표에 선발돼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청소년 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했으니까요.”

축구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대표선수가 됐으니 대단한 소질이다. 경신고를 졸업한 안종복이 특기생으로 진학한 학교는 명문 고려대.

하지만 운이 없었던 건지, 운명이 그랬던 건지. 안종복은 3학년 때인 1978년, 무슨 대회에선가 무릎과 허리를 심하게 다쳐 현역 선수생활을 접게 된다. 대신 안종복은 이 때의 부상으로 군입대를 면제받았다.

“축구를 못하게 됐으니 어떡합니까. 공부를 하는 수밖에요. 제가 법학과였거든요. 정말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보람이 있었는지 졸업반인 1979년 말의 입사 시험에서 대우와 현대에 모두 합격이 되더군요. 어디로 갈까 며칠을 망설이다가 대우에 입사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뚜렷한 이유는 없었고요. 그냥 대우로 가고 싶어서.”

훗날 안종복이 대우 축구단에서 지대한 활약과 공헌을 한 사실을 감안하면 그 때 ‘대우 행’이 안종복의 인생에서는 중대한 분수령이었던 셈이다.

또 안종복이 그 때 ‘현대 행’을 선택했더라면 조금 거창하게 표현해 대우축구단의 역사와 한국축구의 역사에도 조그마한 변화는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그때는 아직 현대나 대우에 축구팀에 없었을 때거든요. 모르지요 뭐. 저 하나 현대에 갔다고 뭐가 달라지기야 했겠어요. ”

▲4년 만에 유니폼 입고 따낸 전국체전 금메달

‘신입사원’ 안종복이 배치된 곳은 당시 제계 4위의 대기업으로 성장해 있던 대우의 핵심 부서인 해외 인력부. 한데 당시 대우는 김우중 회장이 아프리카의 리비아를 개발한다는 거대한 지침을 내려놓은 시점이어서 안종복을 포함한 모든 사원은 오로지 이 ‘리비아 프로젝트’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던 상황이었다.

“리비아 특수(特需)로 사세가 날로 번창하다 보니까 1982년에 대우자동차 축구팀이 생기게 됐습니다. 그 과정을 간략히 말씀 드리자면 대우자동차가 신진자동차를 인수하고 또 한편으로는 산업은행 축구팀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팀을 만들게 됐던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해 아주 흥미로운 ‘사건’ 한 가지가 생긴다.

신생팀 대우자동차가 그 해 전국체전(제63회ㆍ마산)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것이다.

새로 생긴 팀이라고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따지 말라는 법이야 물론 없지만 그 과정이 아주 재미있고 특이했던 탓에 여기 소개한다.

“제가 축구팀 주무를 맡고 있을 때였는데요. 우리 팀이 신생팀이다 보니까 선수가 부족했거든요. 그래도 겨우겨우 예선전하고 준결승전을 통과해 결승까지 올랐지 뭡니까. 상대는 이회택, 박성화, 최종덕 같은 기라성 같은 대표선수들이 포진하고 있는 포항제철이었습니다. 선수는 모자라서 11명을 채우기가 어려운 마당인데요. 하는 수 없이 제가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갔습니다. 나가서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후반 몇 분인가 헤딩으로 결승골을 넣어서 우리 팀이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엄연한 사실입니다.”

1978년 몇 월이었던가. 게임 도중에 무릎과 허리를 다쳐 선수생활을 접고 군대까지 면제받은 지 4년 만에 연습 한번 없이 다시 그라운드에 나서 대표선수들이 득실거리는 팀을 상대로 결승골을 넣어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으니 참 대단한 일이 아닌가.

“시상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내려오니까 바로 탈진 상태가 돼 버리더군요. 그렇지 않겠어요? 4년 동안 운동이라곤 전혀 안 하던 놈이 갑자기 그라운드에 나가서 90분을 뛰었으니. 바로 마산 고려병원으로 실려가서 하루 종일 링거 주사를 맞고서야 회복이 되더군요.”

그때 안종복과 함께 뛴 선수로는 1983년 프로축구 득점왕인 이춘석(전 국가대표팀 코치)과 현재 성남시 축구협회장으로 재직 중인 유태목 등이 있다.

▲대우 사무국장으로 프로축구 출범에 동참

1982년 전국체전 우승으로 멋지게 한 해를 장식한 대우자동차 축구팀은 이듬해인 83년에 출범한 한국 프로축구에 아마 팀으로 참가한다.

프로축구 출범에 동참한 팀은 대우 외에 프로 팀인 유공과 할렐루야, 아마 팀인 국민은행과 포항제철. 대우를 포함해 5개 팀으로 출범한 셈인데 이 ‘5개 구단 체재’는 1989년 일화가 가세해 6개 구단이 될 때까지 6년 간 이어졌다.

이때 안종복의 직책은 주무에서 한 단계 올라선 사무국장.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씀 드리지요. 대우축구단의 성적과 관련된 얘긴데요. 대우는 선수가 없어서 주무인 저까지 유니폼을 입고 뛰어야 했던 1982년과는 달리 프로축구 출범과 함께 대표 급 선수들을 많이 받아들여서 전력이 아주 강해졌거든요.”

당시 대우의 멤버를 보면 골키퍼 김풍주를 비롯해 수비에 이태호, 정용환, 미드필더에 조광래, 박창선, 공격에 변병주, 정해원….

국가대표팀의 축소판이라고 할 만한 호화멤버였다. 한데 바로 이 점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보니 대표팀에 주전 선수들을 다 내보내 85년과 86년에는 팀 성적이 부진하다가 주전들이 돌아온 1987년에는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88년 서울올림픽과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전들이 올림픽에 나가있던 88년과 월드컵 예선 및 본선에 나가 있던 89~90년에는 좋은 성적을 못 올리다가 이 선수들이 돌아온 91년에는 다시 우승을 차지했거든요. 대우가 대표팀을 위해 봉사했다고 생각하면 좋은 일이지만 어쨌거나 아쉬움은 남아 있습니다.”

안종복은 이 과정에서 1988년부터 92년까지 5년 동안 대한축구협회 업무를 사실상 총괄하는 기획조정실장으로 발탁되기도 했는데 그는 이 기간 동안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던 수많은 자료들을 규합해 ‘프로축구 연감’을 편찬하는 한편 업무의 전산화 시스템을 완료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 ’ IMF 사태’로 대우 매각하는 아픔 겪기도

5년에 걸친 축구협회에서의 ‘파견 근무’를 마치고 대우로 돌아온 안종복은 부단장으로 승진해 구단 실무의 전면에 나선 데 이어 1996년부터는 단장으로 구단 운영에 총책임을 맡게 된다. 하지만 97년 말에 발생한 이른바 ‘IMF 사태’로 그룹의 형세가 쇠락하기 시작해 99년 말에 이르러 대우 로얄스 축구단이 현대산업개발에 190억 원에 매각돼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생각해 보면 제가 대우에 몸담고 있던 기간은 정확히 20년 입니다. 어쩔 수 없는 여건 속에서 우리 회사가 다른 회사로 팔려가는 상황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무력감 속에 비통하기도 했지만 명문 구단 대우의 마지막 단장이었다는 사실에는 지금껏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

‘새천년’이라는 2000년대의 개막은 안종복에게는 ‘야인(野人) 시대’의 시작이었다.

“일본의 전자용품 회사인 ‘이플레이어 JAPAN’’의 한국 지사장을 맡아 그런대로 재미를 붙이고 있는데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의 이회창 후보께서 간곡히 도움을 요청하시기에 체육특보를 만 1년 동안 맡은 적이 있습니다. 그 어른이 당선이 되셨다면 상황이 많이 달라졌겠지요.”

하지만 역사에 가정은 없는 법. 상황이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도 부질없는 일이 아닐까.

야인시대를 살고 있던 안종복에게 또 한차례의 기회가 온다.

앞에서 설명했던 대로 시민구단인 인천 유나이티드의 사장을 맡아 다시 한번 축구계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인천이 시민축구단을 창단한다는 사실을 발표한 것이 10년 전인 2003년 6월이었는데요. 처음에는 외지 분들이 많은 인천에서 시민들의 참여가 절대적 요건인 시민 프로구단이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많이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창단 발표 이후에 인천 시민들께서 프로축구단 창단에 보여주신 관심과 열정은 정말 눈물 겨울 만큼 대단했습니다. 10월에 시민주 공모를 시작한 지 얼마 안돼 4만7,000명이 넘는 시민들이 193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거액의 주식을 사 주셨으니까요. 이 주식으로 인천 구단이 만들어 진 거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안종복이 ‘재테크의 귀재’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은 바로 이것이 계기였다. 물론 안종복이 시민주 공모에 직접 개입한 것은 아니지만 구단의 단장으로 창단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얻은 것이다.

‘축구를 위해 태어난 사나이’, ’기적의 사나이’라는 별명 역시 이 과정에서 얻어진 것은 물론.

“인천 구단이 시민구단으로는 대구와 대전에 이어 세 번째지만 실질적으로는 최초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시민들로부터 인천만큼 호응을 받은 구단은 없으니까요. 또 실제로 제가 사장을 맡았던 2007년부터 11년까지 4년은 연속해서 흑자운영을 했거든요. 저는 그래서 지금도 인천구단에서는 ‘명예사장’으로 통합니다.”

▲”경남 FC의 발전상 관심 갖고 지켜봐 주셨으면“

지난 시절이 아무리 화려하고 찬란하면 무엇 할 것인가.

안종복이 인천에서 이토록 많은 일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새롭게 사장을 맡은 경남 FC의 경영과 팀 성적이 좋지 못하면 지난날의 명성은 한낱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 세상의 현실이요 이치인 것을.

그렇다면 결론은 자명해 진다. 경남 FC를 인천 유나이티드 보다 훨씬 뛰어나고 강한 구단으로 만드는 방법 밖에 없다는 점 말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경남 FC가 시민 구단으로는 후발주자이기는 하지만 축구가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은 어느 구단에 못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구단주이신 홍준표 지사님이 구단 운영에 큰 관심을 갖고 계시고 저 역시 시민 구단인 인천을 근 10년 동안 이끌어 오면서 쌓아둔 효과적인 운영 방침이 있거든요. 이 모든 것들을 이상적으로 조화시키면 머지 않은 장래에 경남 FC가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구단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또 그렇게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꼭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덕담을 건네고 자리를 털면서 가족사항을 물었다.

“집사람(채해숙ㆍ55)과는 대우 주무시절이던 82년에 결혼했는데요. 애는 아들 둘에 딸 하납니다. 자식자랑은 팔불출이라고 하지만 큰 아들(준상ㆍ31)은 호주 유학을 갔다 오더니 영어를 아주 잘 해서 서울대 스포츠산업연구센터에서 전문연구원으로 있고요, 딸(해준ㆍ28)은 SK그룹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현상)은 늦둥이라 인제 18살이에요. ”

‘늦둥이’라고 말 할 때 얼굴 표정이 조금 겸연쩍어 보인다.

안종복 경남 FC사장 약력

▲생년월일: 1956년 3월12일 ▲출신교: 속초국-속초중-경신고-고려대 ▲축구시작: 경신고 1년(1973년) ▲주요성적: 1982년 제63회 전국체전 금메달 ▲주요경력: 프로축구단 대우 사무국장, 부단장, 단장, 대한축구협회 기획조정실장(1988~92년),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체육특보(2001~02년), 인천 유나이티드 단장-사장(2003~2011) 현재 경남 FC 사장 ▲좋아하는 음식: 잡식성(본인 표현) ▲취미: 바둑(아마 7단), 골프(10 오버 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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