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연 교수(오른쪽)가 강의실 뒷편 야산에서 풍겨나는 봄내음 속에 필자에게 자신의 야구인생 50년을 밝은 표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홈런왕’이자 ‘탈모왕’

야구 해설가 하일성이 예전에 중계방송을 하면서 즐겨 쓰던 말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힘이 장사지요.”

누구의 힘이 그토록 장사란 말인가. ‘홈런왕’ 김봉연(61ㆍ극동대 체육과 교수)의 힘이 장사라는 말이었다.

국내에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부터 88년까지 해태 타이거즈 부동의 4번 타자였던 김봉연이 타석에서 상대 투수의 볼에 헛스윙을 한 뒤 헬멧이 벗겨졌을 때면 하일성이 어김 없이 하던 말이 바로 이 짤막한 한 마디였다.

지난 1983년에 당한 교통사고로 얼굴에 생긴 상처를 커버하기 위해 수염을 길렀을 때의 김 교수 모습. 교수실 벽에 결린 사진을 촬영했다.
얼마나 힘이 좋고 얼마나 배트를 세게 휘둘렀으면 헬멧이 다 벗겨졌을까.

또 이런 상황이 얼마나 자주 벌어졌으면 하일성이 입버릇처럼 이 말을 했을까.

홈런을 치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는데 이를 알아차린 상대 투수가 아주 느린 슬로커브를 던지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는데다 고개가 돌아가면서 그 ‘진동’에 550g이나 되는 헬멧이 땅바닥에 떨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것.

일일이 세어보진 않았지만 지금 기억으로는 한 경기에 한 번 정도는 김봉연이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김봉연에게 ‘홈런왕’이라는 본래의 닉네임에 못지 않게 ‘탈모왕’이라는 또 하나의 닉네임이 늘 따라다녔던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엄밀한 수치로 따져 김봉연보다 홈런을 많이 친 선수가 여러명 있음에도 그가 팬들로부터 ‘홈런왕’이라는 닉네임을 얻을 수 있었던 요인이 바로 이 같은 다이내믹한 타격 폼과 하늘을 가르기라도 하듯 타구를 장외로 날려보내는 그의 시원스런 타격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소 찌푸린 듯한 봄 날씨(12일) 속에 중부고속도로를 달리기 한 시간.

충북 장호원 소재 극동대학교 ‘대학본부’ 앞에 차를 세워놓고 얼마 안 있으니 오전 수업을 마친 이 학교 체육학과 교수 김봉연이 밝은 무늬의 티셔츠에 회색 자킷 차림으로 현관에 나와 필자를 향해 손을 흔든다.

▲”학생들 가르치는 것도 야구만큼이나 재미있고 보람 있습니다.”

그가 재직하고 있는 학교를 찾아 갔으니 ‘홈런왕’에서 ‘훈장(訓將)’으로 변신을 하게 된 계기부터 물어야 할 것 같다.

“아시겠지만 제가 해태 타이거즈 코치에서 물러난 것이 지난 2000년도 말 아니었습니까. 다른 팀으로 가야 하나 아니면 뭔가 좀 색다른 일을 해야 하나 고심을 하고 있었지요. 한데 마침 그때 극동대학교 재단에 관계하고 계시던 친지 한 분이 야구의 현장 경험을 살려서 후학들을 길러볼 생각이 없느냐고 제의를 하시더군요. 얼마 동안 생각을 하다가 그것도 아주 의미 있는 일이겠다 싶어 이 학교로 오게 된 겁니다.”

후술(後述)하겠지만 김봉연은 1988년 시즌을 끝으로 해태 타이거즈에서의 현역생활을 마치고 이듬해인 1989년부터 2000년까지 김응용 감독 밑에서 타격코치를 맡아 왔는데 그 해 말 자신의 후배인 김성한(현 한화이글스 코치)이 김응용의 후임으로 지휘봉을 잡게 되자 ‘자의반 타의반’으로 해태를 떠나 ‘야인(野人)’이 됐다.

그런 상황에서 진로(進路)를 놓고 고심하던 중 위에서 말한 친지의 알선으로 극동대학교 겸임교수로 발령을 받아 교편을 잡게 됐다는 얘기다.

대학교수가 되려면 학위가 있어야 할 텐데.

“네, 제가 해태에 몸담고 있던 1990년에 원광대에서 ‘심한 운동이 경기력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거든요. 그러니까 교수가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은 갖추고 있었던 셈이지요.”

엄밀히 말해 겸임교수라면 실질적인 의미의 대학교수는 아니지 않은가.

“물론이지요. 제가 석사학위는 있지만 야구판에서만 있던 사람인데 바로 정식교수가 될 수야 있나요. 그 해 1년을 겸임교수로 강의만 하다가 2002년에 조교수가 돼서 2004년까지 있었고요. 2005년에 정교수 발령을 받아서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겸임교수 기간을 포함해 올해로 13년째가 되는 셈인데 그 사이에 학생처장과 홍보실장, 그리고 체육학과장 등의 3가지 직책을 동시에 맡고 있다가 업무량이 너무 많아 작년 말로 학생처장직에서는 사퇴를 하고 현재는 뒤의 두 가지 직책만 갖고 있다고 한다.

일주일의 강의시간은 어느 정도일까.

“체육학 실기와 이론을 포함해 일주일에 10시간인데요. 강의 준비하는 게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최소한 저보다는 나은 후학들을 길러내야 한다는 책임감이랄까, 의무감이랄까, 이런 게 있어서요. 하여튼 야구할 때에 못지 않은 보람과 재미가 있습니다.”

박사과정은 하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전남 나주에 있는 동신대학교에서 체육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데요. 학위논문은 다 써서 제출을 해놓은 상태입니다. 늦어도 올 연말까지는 통과가 될 걸로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홈런왕 김봉연’과 ’체육학 박사 김봉연’, 둘 다 그럴 듯하다.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의 4번 타자

올드 야구팬들은 익히 아시겠지만 1970년대 초반부터 프로야구가 생긴 1982년 이전까지 국내 스포츠의 최고 인기종목은 고교야구였다.

그 고교야구의 인기몰이에 크게 기여한 학교가 김봉연의 출신교인 군산상고였다는 사실 또한 야구팬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야구의 일반상식’.

그렇다면 군산상고가 이처럼 엄청난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최초의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해답은 지금부터 41년 전인 1972년 7월19일, 서울운동장(지금은 없어진 동대문운동장의 본래 이름)에서 ‘나이터(야간경기의 당시 표현)’로 벌어졌던 제26회 황금사자기 전국고등학교야구대회 결승전이다.

김봉연이 주장이자 4번 타자로 나선 군산상고는 이 경기에서 부산고와 7회말까지 1-1로 팽팽한 접전을 벌이다 8회초 ‘스마일 피처’ 송상복의 갑작스런 난조로 3실점, 패색이 짙었으나 9회 말에 대거 4점을 얻으며 기적의 역전승을 거둬 ‘역전의 명수’라는 닉네임을 얻게 됐던 것.

1-4의 스코어가 드라마와도 같이 5-4로 뒤집히는 과정을 김봉연의 빛바랜 수첩에 적힌 메모를 바탕으로 재구성하면 이렇다.

6번 김우근이 부산고 투수 편기철의 초구를 통타해 우전안타를 치고 나간 뒤 7번 조양현은 1루수 파울플라이로 물러나 1사 1루. 이어 8번 정호영과 9번 송상복이 잇따라 4구를 얻어 맞은 1사 만루의 찬스에서 훗날 ‘도루왕’으로 명성을 떨치게 될 1번 김일권이 사구(死球)를 종아리 부위에 맞아 타점을 올리며 톱타자 김우근을 홈으로 생환시켜 4-2가 된다.

주자는 여전히 1사 만루(1루 김일권, 2루 송상복, 3루 정호영). 이어 등장한 2번 중견수 양기탁은 볼카운트 2-1에서 편기철의 바깥쪽 높은 볼을 ‘결’대로 밀어 쳐 우중간에 떨어지는 2타점 적시타로 정호영과 송상복을 생환시킨다. 4-4 동점.

한데 이때 1루 주자 김일권은 자신의 빠른 발을 믿었는지 무리하게 3루를 넘보다가 런다운에 걸려 횡사(橫死)했고 이 사이에 타자 주자 양기탁은 2루에 진루해 2사 2루.

이 운명의 상황에서 3루 베이스코치로 나가 있던 군산상고의 최관수 감독(98년 별세)은 타석에 나설 3번 김준환(훗날 해태에서 김봉연, 김일권과 함께 활약. 원광대 감독 역임)을 불러 “조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침착하게 몸 쪽 직구를 노려 치라”며 김준환의 엉덩이를 두드린다.

김준환은 한복판으로 들어오는 편기철의 느린 커브 두 개를 그냥 흘려 보내 투스트라이크 노볼의 위기에 몰렸으나 ‘3구 삼진’을 의식한 편기철의 3구 몸쪽 직구를 힘껏 끌어 당겨 좌전안타를 만든다.

2루 주자 양기탁이 3루를 도는 순간 부산고 3루수 김문희(훗날 프로팀 롯데 자이언츠에서 활약)는 엉겁결에 양기탁과 부딪혔는데 이때 홈플레이트를 벗어나 3루 쪽으로 이동하며 이 상황을 지켜본 구심 박상규씨(훗날 아시아야구연맹 사무총장 역임. 2002년 별세)가 지체 없이 김준환에 대한 김문희의 주루방해를 선언해 김준환의 득점이 인정됐다.

미국이나 일본 등 외국의 경우는 몰라도 국내의 아마와 프로야구를 통틀어 홈플레이트를 밟지 않은 주자에게 득점을 인정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5-4 역전승. 웨이팅 서클에서 자신의 타순을 기다리고 있던 4번 김봉연은 만세를 부르며 김준환과 감격의 포옹을 나눴고 3루 쪽에 자리잡은 군산상고 응원석은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그때 준환이가 포볼을 얻거나 내야안타를 치고 1루에 나가서 저한테까지 타순이 돌아왔다면 제가 과연 안타를 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지금도 가끔 합니다. 어쨌거나 준환이가 장하고 고마울 따름이지요.”

▲10살에 입학한 국민학교

김봉연은 국민학교(초등학교의 당시 명칭)를 10살에 들어갔다. 사연인 즉.

“저는 기억이 없는데 어렸을 때 제가 그렇게 아팠답니다.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요. 그러니 학교를 어떻게 가겠어요. 그래서 남들은 다 8살에 입학하는 국민학교를 저는 10살에 가게 됐던 겁니다. 1962년이었지요.”

입학한 학교는 고향인 전주의 중앙초등학교.

“이상한 일 아닙니까. 그렇게 아프던 애가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펄펄 날았으니까요. 운동도 좋아했고요. 그래서 3학년인 1964년에 야구를 시작했습니다. 수비에서는 투수를 했고요. 타석에 들어서면 장타력도 제법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듬해인 4학년 때 시도대항전에서 3연타석 홈런을 쳤으니까요. 그것도 어린이들만 사용하는 리틀야구 구장이 아니라 전주 구장에서 친 거니까 최소한 90m 이상은 날아갔다고 봐야지요.”

훗날 홈런왕으로서의 ‘싹’이 이때부터 트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한데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전주북중에 들어가 한창 야구에 열을 올리고 있는 김봉연에게 문제가 생겼다.

“운동하는 애들이 원래 말썽을 많이 부리지 않습니까. 저희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말썽이 얼마나 심했는지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교장선생님이 야구팀을 없애버리셨지 뭡니까. “

졸지에 야구선수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해버린 김봉연은 이때부터 농구도 하고 육상부에 들어가 포환도 던지고 100m달리기 선수로도 뛰었다고 한다.

“중 2때 제 키가 1m65였으니까 농구를 해도 충분히 되지요. 또 달리기도 100m를 11초4에 달릴 정도로 발도 빨랐습니다. 제가 주루플레이만 좀 잘했으면 정말 완벽한 야구선수라는 평가를 받았을 겁니다.”

하지만 국민학교 때부터 시작한 야구에 대한 미련은 늘 김봉연의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진학한 고등학교가 전주 인근의 군산에서 신흥 야구명문으로 도약할 채비를 하고 있던 군산상고. 이때가 1970년이다.

“1학년 때는 별다른 성적을 올리지 못했고요. 2학년에 올라가면서 투수로 제 실력을 발휘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해(1971년) 전국체전(제52회ㆍ서울)에서 우리 학교가 우승했으니까요. 그때 타자로는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는데 투수로는 거의 제 혼자 결승전까지 도맡다시피 했습니다.”

그의 주무기는 빠른 직구. 스피드건이 나오기 전이라 정확한 구속(球速)은 측정해보지 못했지만 대략 시속 130km 내외였을 것이라고 한다.

“3학년 때인 72년 여름에는 봉황기 대회가 있었는데요. 그 때 1회전에서 투수는 남우식, 4번 타자로는 정현발이 버티고 있는 최강 경북고를 만났는데 연장전이 16회까지 갔습니다. 몰론 저 혼자 던졌지요. 16회초에 제가 1점을 뺐겨서 0-1로 지긴 했지만 한 투수가 16회까지 던진 예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군산상고가 그 다음에 출전한 대회가 바로 위에서 길게 설명했던 바 곧이어 벌어진 황금사자기 대회.

“한데 황금사자기 대회 때 저는 투수로는 나서지 못했습니다. 봉황기에서 16회까지 던지고 난 뒤부터 오른쪽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거든요. 타석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마운드에만 서면 허리가 아픈 거에요. 그래서 제 대신 나온 투수가 바로 그 유명한 스마일피처 송상복입니다.”

▲고ㆍ연전에서 알지도 못하고 달성한 노히트노런

군산상고 3년 동안 타자보다는 투수로 명성을 날린 김봉연이 진학한 학교는 연세대.

그런데 김봉연은 연세대에 입학하자 마자 또 한차례 대업을 달성한다.

입학 첫해인 1973년 3월의 봄철 대학연맹전에서 ‘영원한 맞수’라는 고려대를 만나 대망의 노히트노런을 이룩한 것이다.

“7회를 던지고 덕아웃에 들어오니까 배수찬 감독님이 ‘8회부턴 기록 같은 거 너무 의식하지 말고 던져라’ 이러시는 거에요. 저는 그때까지 제가 노히트노런을 하고 있다는 걸 전혀 몰랐거든요. 그래서 무슨 말씀이시냐고 그랬더니 ‘모르면 그냥 지금까지처럼 던져라’ 그러시기에 정말 노히트노런 의식하지 않고 던졌습니다. 9회까지 다 던지고 나니까 난리가 나는 거에요. 신문기자들이 수십명씩 쫓아 오고…. 그때서야 제가 큰 기록을 달성했다는 사실을 알았지요. 그때 고려대에는 허구연(야구해설가)씨도 있었습니다. ”

하지만 이 경기는 ‘투수 김봉연’의 마지막 마운드이기도 했다.

앞서 그의 말대로 타석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마운드에만 오르면 찾아오는 허리 통증 탓에 더 이상 투수로 활약할 수가 없게 됐던 것이다.

“배팅에만 전념하니까 더 잘 맞더군요. 봄철리그에서 3연타석 홈런을 두 번인가 쳤을 겁니다. 당연히 홈런왕이 됐지요. 2학년 때도 홈런왕을 했고요.”

3학년이 된 1975년 2월, 육군에 입대해 군복무를 시작한 김봉연은 곧바로 태극마크를 달고 그 해 6월에 열린 제1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다.

특히 6월25일 벌어진 2차 리그 필리핀과의 경기 6회말에 ‘한 이닝 2개 홈런’의 이색적인 기록과 함께 한국의 28-0 압승을 견인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한데 이 스코어는 아마와 프로를 망라해 100년 한국 역사상 최고득점 기록이기도 하다.

김봉연은 이후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까지 한번도 대표팀에서 탈락하지 않고 1루수에 4번 타자로 굳건한 활약을 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필자 개인의 기억에 뚜렷이 각인돼 있는 것은 1977년 11월, 중미 니카라과에서 열린 대륙간컵 일본과의 경기에서 5-4로 앞선 8회말 상대투수 세키네로부터 ‘목측(目測) 거리’ 150m의 장외홈런을 치는 모습을 본 것과 1980년 8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26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당시까지의 세계대회 사상 최고 성적인 2위에 오르는데 주역을 맡은 두 가지다.

▲’해태 왕국’ 건립에 1등 공신

프로선수로 ‘옷’을 갈아 입은 1982시즌에도 김봉연의 방망이는 쉬지 않고 불을 뿜었다.

소속팀 해태를 우승으로 이끌지는 못했지만 홈런 22개로 수위에 오른 것이 이를 말해 주는데 특히 프로 출범 첫 해인 그 해에는 팀 당 경기수가 80게임에 불과한 가운데 74게임에 출전해 거둔 성적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할 듯.

83년 역시 김봉연의 해였다.

전기리그 우승을 달성하고 올스타전을 앞둔 그 해 7월,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안면을 314 바늘이나 꿰매는 역경 속에서도 한 달 만에 그라운드에 복귀하는 투혼을 과시했는데 팀내 최고참인 김봉연의 이 같은 열의는 결국 해태의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어졌다.

열세일 것이라던 MBC 청룡과의 대결에서 한 차례도 패하지 않고 4승1무의 압도적인 우세로 팀이 우승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면서 자신은 한국시리즈 MVP에 오르는 겹경사를 누렸던 것.

1984년과 85년의 ‘평년작’을 딛고 다시 일어난 86시즌에는 홈런왕(21개)과 타점왕(67점) 2관왕과 함께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견인차가 된데 이어 1987시즌과 현역 선수로서의 마지막 해였던 88시즌에도 해태 우승의 밑바닥에는 김봉연의 숨은 공로가 깔려 있었다.

프로선수로서의 7시즌 통산기록은 630게임 출전에 2,145타수 596안타(홈런 110개, 3루타 8개, 2루타 84개, 단타 394개), 타율 2할7푼8리, 타점 334, 득점 311.

김응용 감독을 보필해 타격코치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1989시즌부터 해태를 떠난 2000시즌까지의 12시즌 동안에도 현역시절에 못지 않은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해 후배들이 5차례(89, 91, 93, 96. 97 시즌)나 국내 프로야구의 정상에 오르는데 밀알이 됐다.

선수로 4차례, 지도자로는 이보다 하나가 많은 5차례나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데 큰 공을 세웠다는 얘기가 된다.

‘해태 왕국’ 건설의 절대적인 기여자라는 평가를 받을 만 하지 않은가.

하지만 시작과 과정이 아무리 좋고 훌륭해도 마무리가 매끄럽지 못하면 전체적인 평가에 일말의 오점이 남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라고 볼 때 김봉연에게도 아쉬움은 있다.

2000년 시즌을 마치고 김응용 감독이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이적해 공석이 된 감독 자리에 그의 후배인 김성한이 구단으로부터 낙점을 받았을 때의 일이다.

“그때의 솔직한 심정을 말씀 드리자면 정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세상에 모든 일이 다 순서가 있고 차례가 있는 법인데, 구단이 꼭 나를 이렇게 대해야 하나 하는 섭섭함 때문이었지요. 하嗤?그때 지나고 나니까 그런 마음도 금방 없어지더라고요. 그 순간의 심정을 물어보시니까 말씀 드린 것뿐입니다.”

하기야 강산이 변하고도 한참이나 더 변했을 12년 전의 일, 이랬으면 어떨 것이며 저랬으면 또 어떠하리.

수첩을 덮을 시간이다. 하고 싶은 말.

“야구 선수로, 지도자로, 또 교육자로 살아오면서 정말 많은 분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은혜를 다 갚는 길은 지금 제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겠지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

그라운드에서 만났을 때보다 인간적으로도 많이 성숙한 느낌이다.

김봉연 교수 약력

▲생년월일 : 1952년 1월13일 ▲출신학교 : 전주 중앙국민학교-전주 북중-군산상고-연세대-원광대(석사)-동신대(박사과정) ▲야구시작 : 중앙국 4년 ▲아마 주요성적 : 제52회 전국체전 우승(1971년) 제26회 황금사자기 고교대회 우승(1972년) 제1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우승(1975년) 니카라과 대륙간컵 대회 우승(1977년) 제26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준우승(1980년) ▲프로 주요성적 : 한국시리즈 우승 4차례(1983, 86, 87, 88년ㆍ이상 해태) 1982ㆍ86년 홈런왕, 86년 타점왕 ▲지도자 성적 : 해태 코치로 한국시리즈 우승 5차례(1989, 91, 93, 96, 97년) ▲좋아하는 음식: 육류 ▲야구 외 즐기는 운동 : 골프(비거리 300야드) ▲가족관계: 부인 정득자(58)씨와의 사이에 아들(민호ㆍ33세), 딸(3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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