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한국 이재호 기자] ‘장유유서(長幼有序) : 오륜의 하나, 어른과 어린아이 사이에는 사회적인 순서와 질서가 있다.’

단점도 존재하지만 유교를 받아들인 한국 문화가 서양 문화와 비교해 장점 중 하나로 여겨지는 것이 바로 ‘장유유서’다. 선후배간 존중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바로 이 문화를 박찬호는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마운드에서 보여줬다.

2001년 7월 11일.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에 박찬호는 2번째 투수로 마운드에 서게 된다. 8승5패 평균자책점 2.80 탈삼진 137개의 엄청난 성적을 발판으로 올스타전 마운드에서 오른 그가 맞은 첫 타자는 생애 마지막 올스타전에 나선 ‘철인’ 칼 립켄 주니어.

칼 립켄 주니어는 무려 18년간 2,632경기 연속 출전 기록을 세운 선수로 미국인들에겐 영웅 그 자체였던 인물. 그런 그와 상대하게 된 박찬호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밋밋한 패스트볼을 한복판에 던졌다. 그리고 칼 립켄 주니어는 지체없이 그대로 좌월 솔로홈런을 쏘아올렸고 이 장면은 올스타전 역사상 명장면을 얘기할 때 항상 언급된다.

더 재밌는 건 이후 박찬호는 당대 최고의 포수-우익수-유격수였던 이반 로드리게스, 이치로 스즈키,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상대했는데 모두 이반 로드리게스와 이치로는 2루 땅볼,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삼진으로 돌려세웠다는 점이다. 박찬호의 구위와 제구는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칼 립켄주니어에게 홈런을 허용한 것일까.

이유는 곧 밝혀졌다. 박찬호는 "불펜에서 준비를 하면서 어떻게 상대할까 생각하다 립켄이 은퇴한다는 말을 듣고 삼진을 잡는 것보다는 직구를 가운데 넣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면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립켄이 드라마틱한 홈런을 때렸다”고 털어놓았다. 홈런을 때릴 만한 투구를 했던 것이다.


2001 올스타전에서 박찬호에게 홈런을 때려내던 칼 립켄 주니어의 모습(왼쪽)과 경기 후 MVP 수상한 모습

전형적인 `장유유서'의 훈훈한 모습이었고 뒤늦게 이를 알아챈 현지 매체들은 앞다퉈 박찬호의 세심한 마음 씀씀이에 대해 칭찬하며 ‘기특한 후배’라고 평했다.

그리고 2015년 5월 17일. 은퇴한 지 3년째인 박찬호는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LA 다저스 레전드 자격으로 '올드 타이머스 게임(Old Timers' Game)'에 초청받아 다저스타디움 마운드에 선 것.

이날도 공교롭게 두 번째 투수로 마운드에 오른 박찬호는 1이닝 4피안타 3실점(2자책)으로 부진했다. 팀이 0-3으로 졌으니 박찬호의 잘못이 가장 큰 셈이다. 그러나 이 역시 박찬호의 한국적인 정서가 드러난 결과다.

이날 올드 타이머스 게임은 1965년 월드시리즈가 우승한 것을 기념해 당시 멤버들이 참가한 경기였다. 무려 1965년 우승을 기념했으니 적어도 6,70대 할아버지 선수들도 함께한 자리에서 박찬호는 은퇴한 지 3년밖에 안된 42세의 `청년'이나 다름없었다. 마음만 먹었으면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박찬호의 생각은 달랐다. 중요한 것은 그 자리에서 함께 빛나고 선배들을 받드는 것이지 삼진을 잡거나 성적을 내는 것이 아니었다. 2001년 올스타전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사진= ⓒAFPBBNews =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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