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한국미디어 이재호 기자] 300승. 한때는 그렇게 어렵다고 여겨지지 않았던 지표일지 모르는 현대 야구에서 사실상 실종된 승수다.

현역 최다승 랭킹 3
1위 : 팀 허드슨 214승 40세
2위 : C.C. 사바시아 208승 35세
3위 : 바톨로 콜론 204승 42세

현역 선수 중 300승에 가장 가까운 선수는 허드슨이지만 2015년 불혹의 나이를 맞았다. 사바시아만큼은 300승을 해낼 줄 알았지만 극심한 다이어트 이후 사실상 원상태 회복이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나마 다승 15위(125승)인 펠릭스 에르난데스가 현역 15위 이내에서 유일한 20대 투수(29세)로 기대된다. 19세에 데뷔해 메이저리그 10년차를 지난 ‘킹’ 펠릭스는 20대 동안 해온 ‘위대한 10년’을 한번 더 한 뒤에, 좀 더 노력을 해야 300승이 가능하다. 하지만 30세부터 시작되는 노쇠화를 그 역시 피해가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세이버매트릭스의 '대부’ 빌 제임스가 발간한 ‘2015 빌제임스 핸드북’에는 현실적으로 300승 가능성이 가장 높은 순위와 가능성을 계산했다. 이 책에 따르면 최근 4년간 3번의 사이영상을 수상하고 올해는 MVP까지 거머쥐었던 클레이튼 커쇼가 현역 중 그나마 가장 높은 31%의 확률로 300승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됐다. ‘킹’ 펠릭스는 26%, 재임스 실즈가 16%로 그 뒤를 따랐지만 커쇼와의 격차는 컸다.

그렇다. 현존하는 최고의 투수인 커쇼조차도 고작 31%의 확률에 불과할 정도로 300승은 향후 가장 보기 힘든 기록이 될 가능성이 크다. 혹사에 따른 수술 급증, 이와 함께 커지는 투수 보호의 움직임 등을 감안하면 300승은커녕 200승조차 보기 힘들지도 모른다. 즉 역사상 마지막 300승 투수의 타이틀은 '빅유닛' 랜디 존슨(52)이었는지 모른다.

랜디 존슨은 7일(이하 한국시각) 전미야구기자협회(BBWAA)의 2015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97.3%의 높은 득표율로 입성 첫해 만에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됐다. 만장일치가 되지 못한 것이 화제일 정도로 매우 당연한 결과였다.

대체 랜디 존슨은 왜 대단할까. 단지 엄청나게 큰 키(208cm)나 무시무시한 강속구, 스프링캠프 경기에서 나는 비둘기를 맞춘 일화만으로는 그의 위대함은 설명되지 않는다.

▶랜디 존슨의 위대한 업적들

1988년 9월 15일 몬트리올 엑스포스(현 워싱턴 내셔널스의 전신) 소속으로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서 데뷔해 5이닝 2실점(2피홈런) 3볼넷 5탈삼진으로 데뷔전 승리를 거뒀을 때 그의 나이는 24세. 그의 특이한 신체조건을 제외한다면 평범한 메이저리그 데뷔였다.

하지만 좀처럼 빠른공을 살리지 못하는 지독한 제구력 난조 탓에 남들은 선수인생 전성기를 누리는 30세 전까지 랜디 존슨이 기록한 승수는 고작 68승. 하지만 30세 이후 그가 은퇴할 때까지 거둔 승수는 235승으로 통산 그보다 많은 승을 쓸어 담은 선수는 사이 영, 필 니크로, 워렌 스판, 게일로드 페리 밖에 없다.

랜디 존슨의 30대 성적은 실로 놀랍다. 특히 스테로이드로 인해 타고투저가 가장 극심했던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연평균 354개의 탈삼진(2014 탈삼진왕 데이비드 프라이스 271개)을 잡아내며 4년 연속 사이영상을 쓸어 담은 것은 마치 샌디 쿠팩스의 ‘황금의 4년’과 같은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특히 2001시즌 김병현이 소속했던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서 커트 실링과 함께 월드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며 공동 MVP를 수상했던 활약(6경기 2완투 5승 41.1이닝 평균자책점 1.52)은 그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시리즈 반지를 낀 영광의 순간이기도 했다.

그의 300승 달성은 극적이었다. 역사상 300승을 랜디 존슨(2009년 달성, 45세 265일)보다 늦게 달성한 선수는 ‘너클볼러’였던 필 니크로(1985년 달성, 당시 46세 188일)뿐이었다.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고도, 영광의 시절을 함께했던 애리조나가 300승을 5승 앞둔 자신을 내쳤을 때도, 생전 인연이 없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손을 맞잡으면서도 끝내 300승 달성에 욕심을 보여야했을 정도로 랜디 존슨에게 300승은 간절했다.

▶랜디 존슨, 워렌 스판·레프티 글로브·샌디 쿠팩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다

랜디 존슨 이전에는 역사상 최고의 좌완 투수 랭킹 3에는 항상 워렌 스판과 레프티 글로브, 샌디 쿠팩스가 언급됐다. 좌완 투수 중 통산 다승 1위인 스판(363승)과 화려한 투구 덕에 이름 자체에 좌완(Lefty)이 들어간 레프티 글로브, ‘황금의 4년(노히트 3회, 4년 연속 평균자책점 1위, 사이영, 다승왕, 탈삼진왕 3회, MVP 1회, 월드시리즈 MVP 1회)’이라고 불리는 1963년부터 1966년을 보낸 샌디 쿠팩스에 랜디 존슨은 충분히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

그가 기록한 탈삼진 숫자(4,875)는 단연 좌완 통산 1위이며 놀란 라이언(5,714개)에 이어 역대 2위다. 또한 9이닝당 탈삼진에서는 10.60개로 통산 1위에 올라있다. 그야말로 탈삼진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

또한 통산 좌타자 피안타율이 1할대(0.199)인 유일한 투수(2위 빌리 와그너 0.200)이며 세부지표인 세이버매트릭스의 정수로 불리는 WAR(대체선수대비 승리기여도)에서도 투수 통산 5위(111.7 *팬그래프닷컴 자료)에 올라있다. 역대 투수 1위는 로저 클레멘스(139.5)이며 좌완 1위는 워렌 스판(123.9)으로 랜디 존슨은 좌완 통산 2위의 성적이다.

수비무관평균자책점으로 최근 각광 받고 있는 FIP에서도 3.20을 기록, 1970년대 이후 활동 선수 중 통산 5위에 좌완 1위에 올라있기도 하다. 그의 큰 키에서 나오는 무시무시한 속구와 엄청난 각의 슬라이더는 세이버매트릭스 지표에서도 크게 빛을 낸 것이다.

톰 글래빈, 그렉 매덕스, 랜디 존슨과 페드로 마르티네즈에 이어 마리아노 리베라까지 2013년 은퇴하면서 투수황금기의 한 세대가 저물었다. 이 세대는 고전적인 투수 운영과 현대적인 투수 운영의 교차로에 있던 세대로 예전처럼 많게는 300이닝 가까이 던지는 많은 투구수를 기록하면서도 엄청난 이동거리와 경기수 모두를 감당했던 마지막 세대이기도 했다.

랜디 존슨은 300승이라는 기본 지표에 충실함은 물론 45세 시즌까지 활약한 꾸준함, 눈에 보이지 않는 WAR, FIP같은 세이버매트릭스의 세부지표와 비둘기를 맞춘 것으로 대변되는 엄청난 강속구를 이용한 단기적인 임팩트마저 뛰어나 결국엔 명예의 전당 역사상 좌완 최고 득표율(97.7%, 종전 1994년 스티브 칼튼 95.82%)을 기록할 수 있었다. 역대 최고를 가리기는 힘들다. 하지만 분명 우리 시대의 최고 좌완 에이스는 랜디 존슨 하나로 귀결된다.

*스탯볼은 기록(Statistic)의 준말인 스탯(Stat)과 볼(Ball)의 합성어로 '이재호의 스탯볼'은 경기를 통해 드러난 각종 기록을 분석한 칼럼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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