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그노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이 가톨릭 교회의 반발 속에 피임기구 무료 배포 및 가족계획을 골자로 하는 출산보건법안을 승인했다. 필리핀 대통령궁은 29일 "아키노 대통령이 상하원에서 법안이 가결된 지 나흘 만인 21일 승인 서명을 했다"며 "사안의 민감성을 고려해 뒤늦게 공표한다"고 밝혔다. 대통령궁은 이어 "법안을 둘러싼 찬반 논쟁으로 빚어진 분열의 역사가 막을 내리고 더 나은 국민 복지의 열망에 기반한 참여와 대화의 가능성이 열렸다"고 말했다.

'콘돔 법안'으로 불린 이 법은 ▦빈곤층에 콘돔 무료 배포 ▦교내 성교육 및 산모 보건교육 실시 ▦가족계획 정보 제공 ▦에이즈 경각심 고취 등이 핵심 내용이다. 인위적 피임을 죄악시하는 가톨릭 교계의 반대로 13년 동안 의회에 계류돼 있다가 아키노가 최근 의회에 조속한 처리를 요청하며 입법화의 동력을 얻었다. 아키노는 2010년 취임 당시 임기(6년) 전반기에 법안을 통과시키겠다고 공약했다.

가톨릭은 강하게 반발했다. 필리핀은 국민의 80%를 신자로 두고 있는 아시아 최대 가톨릭 국가다. 오스카 크루즈 대주교는 아키노가 비밀리에 법안을 승인한 것을 비난하며 "수치스러웠던 것일까 아니면 파장이 두려웠던 것일까"라고 반문했다. 그는 또 "출산보건법이 아니라 인구조절법"이라며 "이름 붙일 때부터 이 법은 사기"라고 공격했다. AFP통신은 교계가 법 폐기를 위해 대법원에 이의를 제기하고 내년 총선 때 법 지지자를 상대로 낙선운동을 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여성운동 단체는 환영했다. 카를로스 콘데 휴먼라이츠워치 아시아 조사관은 "필리핀 여성에게 자신과 가족 건강을 위한 결정권을 부여했다"고 평가했다. 인구가 1억400만명인 필리핀은 연간 출생률이 인구 1,000명 당 25명으로 한국(8.4명)의 3배, 미국(13.7명)의 2배 수준이다. 특히 피임기구를 마련할 여유가 없고 가족계획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저소득층 출산율이 부유층의 2배인 6명에 이른다. 필리핀 정부 및 유엔 통계에 따르면 신생아의 절반 가량이 계획하지 않은 채 태어나고 영아 사망률도 10만명 당 162명(한국은 17.2명)에 이른다.

저작권자 © 스포츠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