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愛] 男간호사 무거운 기계·첨단 장비 다룰 땐 존재의 빛 더해
의대 못 가서? 무뚝뚝할 거다? 편견은 버리세요

▲ 보건관리자실 백용길씨.
#1 장출혈로 중환자실에 입원한 A(43)씨. 한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던 그는 흐릿한 의식 너머 자신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체온을 느꼈다. 세상은 온통 깜깜한데 그 손길과 위로의 목소리가 사선(死線)을 넘는 힘이 됐다. 의식이 돌아와 '간호사겠지'하고 눈을 뜨는 순간 한 남성이 자신을 보살피고 있었다. 혼란스러웠지만 힘겹게 입을 뗀다. "밤새 지켜 주셨군요. 당신이 절 살렸습니다. 의사 선생님." 남성의 얼굴이 살짝 굳는다. 잠시 후 남성의 한마디. "저 간호사에요. 남자 간호사."

#2 30대 초반의 주부 B씨는 병원에 갔다가 기겁을 했다. 항생제 주사를 맞으라는 의사 처방에 따라 주사실에 들어가 치마를 살짝 내리고 엎드려 있는데 웬 남자가 불쑥 들어온 것. "꺅~ 당신 누구야!" 당황하긴 그 남성도 마찬가지. "진정하세요, 간호사입니다."

남자 간호사도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의 어엿한 후예다. 여자 간호사와 더불어 오직 환자만을 위한 '나이팅게일 선서'를 가슴깊이 품고 살건만 세상 인식은 아직 색안경을 낀 채로 있다. 환자들은 의사가 아니라고 하면 "넌 누구냐"를 외치기 일쑤고, 대충 뭉뚱그려 "아저씨"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실 '남자 간호사'란 호칭 자체가 성역할에 대한 편견의 산물이다. 여의사 여기자 여검사 여경 등 일부 직업 앞에 쓸데없이 '여'(女)자를 다는 것과 같은 맥락. 굳이 변명을 하자면 각 직업에 속한 특정 성(性)의 희소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긴 하다. 고려대의료원(안암 구로 안산병원) 간호사 1,600명 중 남성은 1%도 안 되는 12명에 불과하다. 고대안암병원에서 일하는 박기태(28ㆍ흉통 코디네이터) 백용길(34ㆍ보건관리자실) 최영운(29ㆍ심장초음파실) 간호사를 만났다. 이들은 간호사인 남자에게 덧씌워진 '오해와 편견'이 깨지길 바랐다.

▲ 흉통 코디네이터 박기태씨.
오해-의사할 실력이 모자랐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진로의 8할을 결정하는 게 현실이다. 최 간호사는 "의대 못 가서 어쩔 수 없이 간호대학 갔지"라는 말을 들으면 "막막하다"고 했다. 의대와 간호대의 입학 성적 차이를 직업의 우열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른바 '꿩 대신 닭'론은 여자보다 남자 간호사가 더 자주 당하는 오해다.

우열이 아니라 (직업의) 차이를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아직 소수다. 최 간호사는 "솔직히 의대 갈 실력이 모자랐던 건 인정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의사는 '큐어'(cureㆍ치료)하지만 간호사는 '케어'(careㆍ돌봄) 하는 존재"라며 "치료의 전 과정, 심지어 환자가 잠들어 있을 때도 빠뜨리지 않고 보살피는 게 간호사의 역할"이라고 했다.

"시간에 쫓기는 의사와 달리 간호사는 집중적으로 환자를 살필 수 있다"(박 간호사), "의사는 이성적 판단, 간호사는 감성적 보호"(백 간호사)라는 설명도 뒤따랐다. 의사와 간호사의 역할을 제대로 구별해달라는 얘기다.

영화 (Meet The Parents)의 한 장면은 그래서 더욱 극적이라고 했다. 주인공(벤 스틸러)은 우리 현실처럼 가끔 의사로 오인 받는 좌충우돌 남자 간호사다. 박 간호사는 "스스로 의대를 포기하고 환자와 더 가까이 삶을 나누기 위해 간호사의 길을 택했다는 주인공의 대사가 모든 간호사의 속 마음을 대변한다"고 말했다.

▲ 심장초음파 검사는 간호사의 업무는 아니지만 이를 돕는 역할을 한다. (위 사진은 촬영을 위해 잠시 연출한 것임.)
무엇보다 첫 마음이 그랬다. 최 간호사는 강압적인 분위기의 해양대학을 중퇴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 백 간호사는 공대를 휴학하고 군 생활을 하던 중 뜻 있는 일을 하기위해 백의를 입을 결심을 했다. 그들의 결정에 세상의 오해는 낄 틈이 없다.

이들이 보람을 느끼는 순간도 환자와 함께 할 때다. 5년간 중환자실에서 일한 최 간호사는 당뇨 등 합병증으로 사지를 절단한 환자(68)를 잊지 못한다. 그는 "어느날 전동휠체어를 타고 온 그 환자가 의족을 신고 일어섰는데 저보다 훨씬 크더라"고 했다. 굳이 일어서서 감사의 맘을 전하기 위해 다시 최 간호사를 찾아온 것이다.

박 간호사도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평생 피던 담배를 제 컨설팅을 계기로 끊고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난 중년 남성들을 보면 힘이 솟는다"고 했다. 물론 환자에 대한 애정은 간호사라면 남녀 구분이 있을 리 없다.

편견-성 정체성이 희박하다?

남자 간호사는 10년 새 무려 23배나 급증했다. 그러나 아직 간호사의 세계는 금남(禁男)의 구역으로 통하는 게 사실. 백 간호사만 해도 간호대학 시절 정원 50명 중 유일한 남자였다. 병원 사정도 비슷하다. 여성들 틈에서 살아가니 성 정체성이 희박해질 거란 편견에도 시달린다. 심지어 "호모 아니냐"는 수근거림도 감내해야 할 정도.

실제 남자 간호사들의 말투는 조심스럽고 사근사근한 면이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환자를 대하는 태도일 뿐 그들도 어김없는 남자다. 오히려 여자 간호사가 갖지 못한 강점도 지니고 있다고 항변한다.

최 간호사는 "남자 간호사는 조정자의 역할을 한다"고 했다. 한 사람의 생사가 달린 의료 현장에서 환자 또는 보호자와 의료진의 갈등은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욕설을 퍼붓고 간호사를 협박하는 일도 있다. 최 간호사는 "여자 간호사를 얕잡아보는 환자나 보호자도 남자 간호사가 나서면 함부로 하지 못한다"고 했다. 백 간호사는 "남자가 대부분인 의사와의 의견 조율도 감정적으로 앙금이 남는 여자 간호사보다 남자 간호사가 나은 편"이라고 귀띔했다.

최첨단 장비와 무거운 의료기계가 많은 병원 환경도 남자 간호사에게 유리하다. 아무래도 복잡하고 까다로운 기계 작동방법 습득은 남자가 빠르기 때문이다. 섬세함은 여성에게 뒤지지만 결단력이 필요한 상황에선 남자 간호사의 존재가 빛을 발한다고 한다.

역으로 남자 간호사는 무뚝뚝하다는 편견에도 시달린다. 박 간호사는 "남자라 냉정하고 잘 못해줄 거라 여기지만 실제 보살핌을 받아본 환자들은 '자상하고 따뜻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결국 성의 차이가 아니라 일에 대한 자부심과 가치관이 중요하다는 것. '나이팅게일'보다는 간호사의 3교대 근무(데이-오전, 이브닝-오후, 나이트-밤샘) 중 가장 힘든 밤샘 근무를 따 '나이팅가이'로 불리는 게 제격인 남자 간호사는 언제나 환자 곁에 있다.

최 간호사는 최근 고민이다. "결혼을 앞둔 그는 간호사인 남자보다 '간호사 사위'가 되기 어렵다"고 했다. 의료계의 선구자가 되기 위해 나섰다는 그의 발걸음이 흔들리지 않길 고대한다.

▲ 간호사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치유하는 처방전

-간호원이 아니라 '간호사'가 정확한 호칭

-의사는 '큐어'(치료), 간호사는 '케어'(돌봄) 하는 존재

-병원에서 정체가 모호한 남성이 있거든 간호사인지 물어보는 센스

-병원에서 욕설이나 폭력은 삼가고 의료진과 상의하는 게 최선

-남자 간호사라고 무뚝뚝하다는 생각은 잘못된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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