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악·지휘 모두 전공
▶ 성악 전공 때부터 지휘에도 깊은 관심
▶ 특히 성악가들과 소통 잘하기로 정평
▶ 2017년 기네스 신기록 경신
▶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인생의 분기점
▶ 궁극적으론 ‘오페라 전문’ 지휘자 지향
▶ 9월 국립오페라단 ‘마술피리’ 객원 지휘

[스포츠한국 조성진 기자] ‘레어’한 것도 ‘스페셜’한 것도 아닌 ‘거의 대부분’의 모든 사람이 고루 즐길 수 있는 클래식 음악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모스틀리(Mostly)’를 오케스트라 이름 앞에 붙인 모스틀리 필하모닉이 창단과 함께 본격적인 활동을 한 지 어느덧 10년이 넘었다.악단 명 만큼이나 정통 클래식은 물론 팝, 영화 O.S.T 등등 다양한 레퍼토리로 남녀노소 불문 폭넓은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스틀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정통 클래식에 대한 전문성이 없다는 게 아니다.

모스틀리 필하모닉의 수장(음악감독) 박상현(53)은 서울대 음대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 석사(음악학) 및 소피아 국립음대 대학원에서 지휘를 공부한 정통파다. 성악에 지휘까지 수학했으니 그야말로 오페라 등의 성악곡에서 오라토리오 등등 성악/합창이 동반되는 오케스트라 지휘에 재능을 발휘할 만반의 준비가 돼 있는 셈이다. 모스틀리 필하모닉은 클래식뿐만 아니라 팝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를 추구하지만 그럼에도 레퍼토리의 80%는 여전히 성악(오페라)이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지휘자 박상현의 지향성이 잘 나타나 있는 예다.

세계의 클래식 음악사에서 알 수 있듯이 지휘를 전공한 지휘자가 곡의 전체적인 흐름과 화성악적 이해가 깊다면 성악 출신 지휘자는 무엇보다 소리의 흐름을 잘 이해한다. 지휘과 출신 지휘자는 오케스트라의 박자를 비롯해 각 파트의 디테일에 특히 강점을 보이는 반면 성악을 공부한 지휘자는 가수의 소리의 명료함과 그걸 각 악기와의 탁월한 밸런스를 잘 이루어 내는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것보다 성악 지휘자에겐 ‘민주적 커뮤니케이션’이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박상현은 바로 이 ‘민주적’인 소통을 통해 모스틀리를 오늘날 이 분야를 대표하는 악단으로 끌어 올린 장본인이다.

이태원에 위치한 모스틀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사무실에서 지휘자 박상현을 만났다. 모스틀리 악단은 현재 서울문화재단 후원 용산구 상주단체로 지정됨에 따라 용산 이태원에 연습실 겸 사무실을 두고 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을 즐길 수 있게 하자는 신조로 대중적인 레퍼토리 상당수를 연주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모스틀리 필하모닉의 본령은 성악곡/오페라다.

성악은 특히 주연 가수에 대한 존중이 필요한 철저한 협업의 산물이다. 적어도 각 역할을 맡은 성악가들은 자신이 부르는 아리아를 최소 수십 수백 번 이상은 불러본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 누구보다 그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하지만 적지 않은 지휘자들이 오케스트라를 자신의 스타일대로 리드하듯 성악가들의 노래 역시 자기 스타일로 연출하려는 경향이 있다.

“성악가들은 각자 자기가 더 잘할 수 있는 역할이 있는데, 저는 그 부분을 존중하고 되도록이면 그에게 90%는 맡겨야 한다는 게 지휘 신조입니다. 나머지 10%는 악단의 전체적인 통일성을 위해 지휘자가 관여하는 정도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태원에 위치한 모스틀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습실

모스틀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유명해진 건 조수미와 신영옥이란 한국 성악계의 두 거장의 공로도 크다.

모스틀리 필하모닉은 2006년부터 조수미와 협연하기 시작해 조수미 전국 투어 등 8년 동안 함께 했다. 또한 2007년부턴 신영옥과도 함께 협연하기 시작했고 그 인연으로 현재까지 파트너로서 활동하고 있다. 조수미, 신영옥 두 거장 소프라노와 함께 하는 악단이란 꼬리표가 붙으며 모스틀리 필하모닉에 대한 음악적 신뢰는 더욱 높아지게 된 것이다.

두 거장은 성악을 전공한 박상현과의 음악적 소통이 너무 편해서 즐겁게 협연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그간 지휘자 박상현은 모차르트 오페라를 자주 의뢰받아 연주했다. ‘마술피리’, ‘돈 조반니’, ‘피가로의 결혼’ 등을 특히 많이 연주했다. 하지만 지휘자로서의 그의 궁극의 목표는 본격 오페라 전문 지휘자다.

“향후 베르디 오페라만큼은 정말 멋지게 해보고 싶어요. 특히 ‘아이다’와 ‘오델로’ 같은 작품 말이죠. ‘아이다’는 정말 합창이 압권입니다. 폭풍같이 몰려오는 다이내믹은 그야말로 감동 그 자체죠. 이러한 감동을 제대로 멋지게 표현해보고 싶습니다.”
 

모스틀리 필하모닉 사무실 내 진열된 기네스 세계 신기록 보유 증명서.

박상현은 오는 9월 공연 예정인 국립오페라단 ‘마술피리’ 객원 지휘를 맡았다. 자신이 잘하는 모차르트 작품 중 하나다. 지휘 일정 이외에 그는 현재 세종대 겸임교수로 주 1회 학교 강의를 하고 있다.

3년 전 박상현은 색다른 월드기네스 기록을 세워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2017년 12월 16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CTS 주최 ‘2017 월드기네스 오케스트라 합동연주회’ 기네스 기록 도전을 하는 자리의 지휘자로 나선 그는 이 자리에서 8076명의 합동 연주를 지휘해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 장소, 최다 인원 기네스 기록을 경신했다. 이전까진 2013년 호주 브리즈번에서 열린 7224명 규모의 오케스트라 합동 연주가 세계 기록이었다. 처음엔 9500~1만여 명이 참가해 엄격한 심사를 거쳐 최종 선발된 인원만 연주에 참여시켰으며 성가 및 애국가, 엘가 ‘위풍당당’, 인디아나존스 OST 등 10여 작품을 연주했다.

“이제 오케스트라 기네스 기록을 세웠으니 다음엔 합창으로 도전해 보고 싶어요. 현재 합창 신기록은 일본이 갖고 있어서 더욱 이 분야 월드 레코드에 대한 기록을 경신하고 싶습니다.”

성악 전공자로서 서울대에서도 이미 노래 잘하는 학생 중 하나로 평가받던 박상현이다. 전공 후반으로 가면서 그의 재능이 발휘되기 시작했고, 학교 음악(오페라) 축제의 주역으로 발탁돼 성악 솜씨를 선보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런 그가 성악가가 아닌 지휘자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뭘까?

“성악 전공이었지만 2학년 때부터 지휘에도 관심이 많아 지휘과 수업을 청강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 지휘의 세계에 대한 매력이 갈수록 쌓여가게 된 겁니다.”

지휘 전공생 이상으로 열정을 보이며 열심히 수업을 청강하는 이 성악 전공생을 기특하게 여긴 당시 지휘과 임헌정 교수는 훗날 이러한 인연으로 박상현이 외국에서 지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자 부천필하모닉 객원 지휘를 맡기기도 했다. 이미 임헌정 교수는 학생 때부터 지휘에 대한 박상현의 열정과 잠재력을 간파했던 것이다.

하지만 본격 지휘자로서 데뷔하게 된 것은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고 이를 통해 오늘날 지휘자 박상현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성악 박사 과정을 위해 유학을 준비 중이던 그는 2001년 어느 날 세계적인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국내 공연을 위한 지휘자 공개 오디션에 응시하게 된다. 그는 이 작품을 워낙 좋아해 해외에 직접 나가서 볼 정도였다.

‘오페라의 유령’은 워낙 유명한 작품이다 보니 공개 오디션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국내 유명 지휘자들도 응시했지만, 이들을 제치고 지휘 전공이 아닌 성악 전공자인 박상현이 당당히 합격에 놀라움을 던져 줬다. 당시 현지에서 온 심사진들이 엄정한 심사로 지휘자 오디션을 했는데 당시 심사위원장은 ‘가이(Guy)’라고 불리던 인물이었다. 가이 위원장은 ‘오페라의 유령’만 몇천 회 이상 공연 경력이 있는 이 작품 최고의 베테랑이다.

오디션이 끝나고 심사위원장은 박상현에게 “이 작품을 어찌 이렇게 무식하게 암보를 하고 지휘를 했느냐”며 “이런 경우는 자네가 처음”이라고 했다. 또한, 가이 심사위원장은 박상현에 대해 “분명 전문 지휘자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과도 같은 가능성이 돋보였다”고 평가했다.

그리곤 자신이 직접 2개월가량 한국에 체류하며 박상현을 트레이닝했다. 아침 9시부터 시작해 밤 10시까지 쉴 새 없는 하드트레이닝이었다. 연습이 끝나면 파김치가 된 상태로 온몸이 너무 쑤셔 파스를 붙여가며 임했을 정도.

이렇게 혹독한 트레이닝을 거쳐 박상현은 ‘오페라의 유령’을 무려 7개월 동안 지휘하며 국내 흥행 대성공을 거두었다. 세계 최고의 메이저 뮤지컬 작품을 수많은 대중 앞에서 7개월이 넘도록 지휘하는 와중에 박상현은 지휘자로서 완벽하게 틀을 갖추기에 이른 것이다.

‘오페라 유령’의 대성공으로 그에게 지휘 섭외가 갑자기 많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생역전의 시작된 것이다. 지휘에 대한 자신감이 들며 이 길이 진짜 자신의 길이라고 여긴 것도 이 무렵부터다.

위와 같은 일련의 사례로 볼 때 박상현은 계획했던 바와는 다른 형태로 삶이 흘렀음에도 그 변화가 언제나 최상급의 성공을 거두며 오늘날에 이른 ‘럭키 가이’ 중 하나랄 수 있다.

1966년 8월 서울에서 태어난 박상현은 고등학교 선생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권유로 초교 4학년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학교 때부터 교회 성가대(테너)에서 노래 활동도 열심히 했다.

어릴 때부터 음악과 미술(그림 그리기)을 좋아해 이 두 분야를 예술적으로 잘 살릴 수 있는 게 뭘까를 고민하다가 건축가를 장래 희망으로 꿈꾸었다. 따라서 대학 진학도 건축학을 전공으로 하려고 했으나 고3 때의 어느 날 그가 다니던 교회 성가대를 지휘하던 최명룡으로부터 “이미 네 가창력은 서울대 음대에 들어가고도 남는 실력”이라고 극찬을 받으면서 인생의 방향을 성악으로 바꾸게 됐다.

평소 좋아하는 지휘자로 카를로스 클라이버, 카라얀, 주빈 메타, 사이먼 래틀 등을 꼽았다.

또한, 높이 평가하는 국내 성악가로 조수미, 신영옥, 임선예, 강혜정 등을 꼽았다. “조수미 선생은 자기 관리가 철저할 뿐 아니라 자기 영역이 정말 확실한 분입니다. 리리코(Lirico, 서정적인) 레지에로(leggiero, 경쾌한)에서 콜로라투라(coloratura)까지 갖춘 흔치 않은 케이스죠.” “신영옥 선생은 리리코 레지에로, 자기만의 스타일이 확고한 거장입니다. 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조수미 선생이 ‘화려함’이라면 신영옥 선생은 ‘우아함’입니다.” “소프라노 임선예는 밝고 경쾌한 스타일에서 돋보입니다. 전형적인 ‘레지에로’이고 강혜정은 모든 것에 능한 팔색조, 멀티 플레이어 가수죠.” “남자 성악가론 먼저 고성현 님이 떠오릅니다. 베르디 오페라에 특화된 실력파이고 테너 류정필 또한 멀티 플레이어입니다. 김동규 님 역시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와 함께 이분은 무대에서 관객이 무얼 원하는지 잘 아는 성악가죠.”

후배 지휘자 중에선 성시연을 주목하고 있다고.

“지휘자 성시연은 그간 심포니 지휘에서 이제 오페라 쪽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어 기대가 됩니다.”

“한국 지휘계에서 서울대 지휘과는 여전히 막강하지만, 한예종 지휘과도 돋보이는 약진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실기가 많은 게 강점이죠. 지휘를 전공한다고 해서 실제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기회는 매우 적은 데, 한예종은 이러한 기회를 많이 주는 편입니다. 따라서 향후 한예종 지휘과 출신들이 큰 활약을 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정치용 선생 제자들이 정말 많아요.” “오페라단을 운영하려면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보유가 기본임에도 국내엔 이러한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아요. 그때그때 오케스트라와 객원 지휘자 등을 투입하는 현실이죠. 앞으로 성악/오페라 발전을 위해선 이러한 시스템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박상현은 남은 올해 안에 꼭 해보고 싶은 것을 이렇게 꼽았다. “코로나19가 좀 잠잠해지면 프란츠 레하르 탄생 150주년 기념 공연을 해보고 싶습니다. 레하르는 오페라 사에 길이 빛날 작곡가 중 하나임에도 올해 베토벤 탄생 250주년 기념 공연은 많은 반면 레하르 공연을 제대로 준비하는 프로그램은 아직 보질 못했어요. 레하르와 함께 해보고 싶은 또 하나는 베토벤 250주년 기념 차원에서 9번 ‘합창’을 멋지게 무대에 올리고 싶습니다.”

좋은 지휘를 위해선 건강이 첫째이기에 그는 매일 오후 6시부터 남산을 오르내리며 체력 관리를 하고 있다. 술, 담배는 하지 않는다.

아들 둘을 두고 있는데, 첫째는 한양대에서 실용음악(작곡)을 전공 중이고, 둘째는 군에 입대했다.

좌우명
“이 또한 지나가리라”
 

저작권자 © 스포츠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