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롯데문화재단
[스포츠한국 조성진 부국장] 모험이 없는 곳에서 정서 영역은 자칫 건조할 수 있다. 모험은 매너리즘을 막고 창조를 위한 끊임없는 시도를 통해 정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예술에 있어서의 테크닉도 하나의 모험이다. 테크닉은 말 그대로 ‘기교’ 다시 말해 기술적인 측면을 뜻한다. 하지만 악보가 의도하는 온갖 감성과 메시지 전달은 기본적으로 테크닉을 통해 표현된다. 그럼에도 일반적으로 지향성이 투철하다거나 정신이 담긴 작품을 대하게 되면 일단 테크닉 쪽에는 관심이 덜 갈 수 있다. 그러나 음악을 듣다보면 테크닉이 어느 순간 감동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되는 경우를 종종 접하게 된다. 테크닉을 통한 모험적 시도가 정서 영역으로 가 감성과 합일할 때, 바로 그 순간 감동은 함께 공유되는 산물이 된다. 하지만 테크닉이 감동의 차원으로까지 오르려면 말 그대로 대가(마스터)적 역량이 필요하다. 정서 영역과 자연스럽게 조우하며 다채로운 표정을 그려내는 그런 차원 말이다. 이러한 수준이야말로 대가의 격조이자 범할 수 없는 존재감이다.

독자적 감성과 치열한 정신력은 테크닉과 삼위일체를 이뤄 완벽한 연주를 만드는 산물이다.

지난 1월3~4일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있은 조성진 리사이틀은 이러한 ‘삼위일체’의 표본과도 같았다.

모험은 실패 확률이 많을 수 있는 위험한 시도의 모험이 있는가 하면 참신하게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많은 모험도 있다. 조성진의 새로운 연주는 “아니 왜 이렇게 연주하지?”라는 의구심보다 “아, 이렇게도 연주할 수 있구나”라는 새로운 방법적 설정의 창구를 제시하는 참신한 모험이라는 데에서 그 설득력이 더욱 돋보인다.

사진제공=롯데문화재단
베르크(피아노소나타 b단조), 슈베르트(피아노소나타 19번 c단조), 쇼팽(발라드와 프렐류드)이란 이례적인 조합으로 레파토리를 꾸민 것도 남달랐고 그 접근방식과 연주 역시 통념을 깨는 새로운 결과물이었다.

베르크는 충분히 텐션을 유지하면서도 아름다움과 서정미를 잘 녹여냈고, 쇼팽은 다시 한 번 그가 이 분야 최고의 스페셜리스트 중 하나라는걸 증명한 명연이었다. 특히 프렐류드 전곡은 각기 독립적인 구성임에도 마치 한편의 완벽한 감동의 미니드라마를 보듯 아름다움과 격조, 때론 용암같이 분출하는 격정 또 때론 불필요한 모든 것들을 배제한 순정 프레이즈까지 표현력의 절정을 보여줬다.

슈베르트는 조성진의 이번 ‘종합선물세트’에서 가장 이례적이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듣던 슈베르트 피아니즘의 세계, 즉 슈나벨이나 브렌델, 리히터, 바두라스코다 등이 이룩한 영역과는 또 다른 조성진만의 슈베르트였다. 시정이나 애수의 정서와는 또 다른 그 순정한 투명함이란. “이 작품은 이렇게 연주해야 한다”라는 틀에 구속되지 않은 그만의 접근, 하지만 이거야말로 조성진이 가진 가장 큰 힘 중 하나다. 슈베르트를 통해 대단히 독창적인 접근을 보인 조성진은 이미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수준보다 훨씬 더 총명하고 깊이를 거듭하며 진화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했음에도 ‘누구를 사사한 스타일’ 또는 ‘어떤 학교에서 배운 스타일’ 등 그 흔한 제도권 트레이닝의 티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조성진의 강점이다. 충분히 정석적임에도 자유롭고 독창적인 접근방식으로 충만한 건반의 크리에이터인 것이다.

한편 이번 공연은 관객의 엄청난 집중력도 돋보이는 풍경이었다. 25년 넘게 국내외를 아우르며 공연 취재를 해왔음에도 이번 무대만큼 관객이 집중을 위해 숨소리 하나 아끼려고 했던 적은 매우 드물었다. 물론 이것은 자신에 대한 몰입도 뿐 아니라 청중을 매혹시키는 조성진의 주술과도 같은 에너지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빈틈없는 최고 수준의 연주력과 독창적 감성으로 이미 최고의 쇼팽 스페셜리스트 반열에 오른 조성진은 이번 리사이틀을 통해 슈베르트 연주자로서도 탁월한 존재감을 알리는데 성공했다.

조성진 리사이틀은 이틀 동안 두 차례 공연 약 4000여석이 9분 만에 매진되는 진기록을 세워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84매(3일 기준) 1937(4일 기준), 총 3921매가 판매되었는데 특히 첫날은 롯데콘서트홀 개관 이후 가장 높은 유료 판매 기록이다. 2016년 가장 높은 유료 판매기록은 장기유 리사이틀(1724매)이었다.

준비된 공연 프로그램 책자 1000부(하루 기준)는 모두 소진돼 추가로 700부를 긴급 제작하는가 하면 공연이 끝나고 시작된 사인회는 10시가 훨씬 넘은 늦은 밤이었음에도 공연장 로비에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뤄 예정시간 45분을 넘길 만큼 아이돌 스타를 연상케 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2015년 쇼팽 콩쿠르 쾌거 이후 불과 1년 만에 조성진이 이처럼 더욱 강력하게 업그레이드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속도라면 바흐와 모차르트를 통해 자연스럽게 연주세계의 외연과 삶의 깊이를 더하는 조성진의 모습을 접할 시점 또한 매우 가까워지고 있는 셈이다.

이미 우리는 피아노계의 ‘세계 최고’ 중 하나를 가진 것이고 가까운 장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반열에 오르는 걸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어리다”는 비판의 준거 틀로 사용되는 22라는 나이는 조성진에겐 단지 숫자일 뿐 그는 이미 충분히 젊은 ‘거장’이라는걸 이번 리사이틀에서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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