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태 6년 만에 소설집 '두 번의 자화상' 출간

문학의 길에 투신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작가는 인생에 단 한편을 남긴다는 마음 붉은 문학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런 각오로 똘똘 뭉쳤을 때가 스물대여섯 즈음. '문청'으로서 문학의 '길'을 '바르게' 걸으려 애썼던 그는 이제 사십 대 중반이 됐다. 소설가 전성태(46) 얘기다.

1994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데뷔한 그는 올해로 21년째 전업 작가로 글을 쓰고 있다. 소설집 '매향' '국경을 넘는 일' '늑대'와 장편소설 '여자 이발사'를 내면서 신동엽문학상, 채만식문학상, 오영수문학상, 현대문학상 등 굵직굵직한 상도 받았다.

그러나 '마흔 고개'를 넘으면서 슬럼프가 찾아왔다. 새로운 소설집을 준비하면서 구체적인 상(像)을 잡지 못했다. 작가가 글을 쓰며 집착했던 하나의 상 혹은 색채가 소설집의 결과물일 텐데, 그 색채가 뚜렷하지 않았던 것이다. 글을 쓰면서 거의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다.

"이번 소설집에 담긴 소설을 구상하고 쓰면서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다"는 그는 "'소풍'을 쓰면서 비로소 상을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지난 25일 연합뉴스와 전화인터뷰에서다.

최근 출간된 '두번의 자화상'은 지난 2009년 발간한 '늑대' 이후 6년 만에 낸 소설집이다. 자전적 색채가 강한 '소풍'부터 '이야기를 돌려드리다'까지 모두 12편의 단편소설을 묶었다. 지난 2009년부터 조금씩 써놓은 결과물이다.

'로동신문' '성묘' '망향의 집'은 휴전선을 따라 여행하며 궁리한 소설들이고, '배웅'은 찻집에서 주워들은 이야기이며 '밥그릇'은 로알드 달의 '목사의 기쁨'을 우리식 이야기로 꾸민 작품이라 한다. 소설집의 문을 열고 닫는 '소풍'과 '이야기를 돌려드리다'는 치매를 소재로 했다. 두 작품 다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저자 스스로 밝혔듯 향후 창작 방향성을 가늠해볼 수 있는 작품인 '소풍'은 치매를 앓다가 숨진 아버지를 둔 세호의 하루를 담은 미시적인 소설이다. 그가 앞으로 추구할 "소소한 일상성 구현"에 방점을 뒀다.

아내와 장모, 자녀와 함께 소풍을 떠난 세호는 보물찾기 과정에서 장모가 치매 초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장모도, 아내도 부인하지만 이미 아버지를 통해 지긋지긋하게 치매라는 병의 실체를 경험했던 세호는 그 사실을 모를 수가 없다.

소설은 세호의 장모가 치매라는 사실을 가족들이 눈치 채는 과정을 보여준다. 보물찾기 놀이를 하며 손주들의 보물을 숨겨놓았던 장모가 보물을 찾지 못하고 울상이 된 채 허둥대는 순간, 세호가 장모에게 손을 내미는 장면이 꽤 인상적이다.

2년 전 어머니를 여의고, 한 달 전 아버지를 떠나 보낸 저자로서는 "괜찮아요, 장모님. 아무 문제 없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세호의 처지가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그는 "당시 어머니의 상태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글을 쓰며 나 자신을 다독였다. 떠난 부모님은 작가에게 숙제처럼 남는 것 같다. 많은 작품 속에서 두 분을 뵙게 될 것 같다"고 했다.

'영접(迎接)' '로동신문' '밥그릇'은 채만식문학상을 수상했던 전성태의 장기인 해학미가 돋보인다. '영접'은 대통령이 작은 마을을 방문하면서 말단 공무원들이 영접을 준비하는 좌충우돌을, '로동신문'은 아파트 경비원이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던 중 북한의 노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을 발견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촌극을 그렸다. '밥그릇'은 문화재를 밀반출하는 전문가들이 시골 할머니에게 농락당하는 코미디다.

코믹한 요소가 다분하지만 고단한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서민들의 삶이 녹아있다는 점에서 세 작품의 뿌리는 삶의 비극성에 닿아있다. "인생이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씁쓸하게 웃으며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는 이유다.

현대문학상 수상작 '낚시하는 소녀'는 여기서 한층 더 현실 속으로 파고든다. 약봉지와 공과금 고지서가 수북하게 쌓인 가난한 집을 배경으로, 어느 살찐 창녀와 그녀의 어린 딸과 이제 막 매춘을 시작한 여관집 주인 딸이 등장하는 서글픈 이야기다. 동심과 비루함과 서글픔이 얽히면서 현실의 고단함은 정점으로 치닫는다.

전성태는 "문학이란 현실에 대해 발언하고, 시대를 담아내야 하며 삶을 성찰하는 힘을 가져야 한다고 한때 생각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 자신의 부족함 탓에 조금 유연해지는 부분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내 문학이 사회와 호흡하면서 운동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문청이었던 청년 시절보다 조금은 더 유연해졌다는 전성태. 그는 슬럼프를 극복하고 나자 쓰고 싶은 작품이 많아졌다고 한다. "한 20년 정도는 쓸 힘을 축적했다"고도 한다. 올여름부터는 계간지를 통해 장편소설도 선보인다. 우리의 질곡 많은 현대사를 상징화한 작품으로 큰 틀에서 첫 장편소설 '여자 이발사'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20년 동안 문학을 해보고 깨달았다. 항상 청년의 마음으로 작품을 쓰는 게 작가의 올바른 '길'인 것처럼 말하지만, 문학도 나이를 먹는다는 걸 알았다. 인생에서 단 한 편의 소설은 없다. 실패하고, 만회하는 길을 찾아나서는 게 문학이 아닐까. 겸손한 실패들로 점철된 게 문학이다. 이런 내용을 담아서 첫 번째 '길'(소설 제목)이 나온 지 20년 만에 두 번째 '길'을 써보고 싶었는데 이번 소설집에 수록하지 못했다. 앞으로 쓸 거다. 또 20년이 지나면 세 번째 '길'을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창비. 328쪽. 1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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