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가 승무를 변용해 만든 작품을 시연하는 사진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사진=한국근대춤연구회
'최승희 승무 사진 공개'

최승희(1911~1969)가 승무를 변용해 만든 작품을 시연하는 사진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19일 한국근대춤연구회(회장 성기숙 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춤 자료관 연낙재는 "최근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이자 최승희의 스승인 이시이 바쿠의 손자 이시이 노보루에게서 이같은 사진을 기증받았다"고 밝히며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에는 최승희가 흰 저고리에 장삼을 걸치고, 머리에는 흰 고깔을 쓰고 어깨에는 가사를 걸친 채 춤사위를 펼치는 모습이 담겨있다.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보고 무용가가 되기로 결심한 최승희는 1930년대 중반 일본을 방문한 '근대 전통 춤의 아버지' 한성준에게서 승무를 비롯한 전통 춤을 배웠다. 최승희는 이를 바탕으로 '초립동', '화랑무', '장구춤', '천하대장군' 등 신무용사에 기념비로 꼽힐 만한 작품을 연달아 내어놓으며 세계 최고의 무용수로 우뚝 섰다.

한국근대춤연구회 회장 성기숙 교수는 "전통 승무의 형식미가 살아있으면서도 세련되고 현대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전통의 현대화'의 상징적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한편 최승희는 일제 말기 일본의 압력에 굴복하여 공연 목록의 3분의 1을 일본적 소재로 바꿀 수 밖에 없었으며, 중국으로 옮겨 매란방, 상소운 등과 교우하며 중국 고전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내놓았지만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해방 이후에는 친일의 대가를 치를 것을 불안해하다 공산주의자이자 프로문학 비평가인 남편 안막, 큰오빠 최승일을 따라 월북했다. 이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최승희 무용연구소 소장 등을 지냈지만 이내 인민극장 청소부, 생산공장의 서클 지도원 등으로 전락했다. 1967년 숙청당해 가택연금 처벌을 받았으며 1969년 사망했다.

네티즌들은 "최승희 승무 사진 공개, 사진 멋지다", "최승희 승무 사진 공개, 이런 자료가 아직 남아있구나", "최승희 승무 사진 공개, 아름답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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