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로 본 대한민국 60년]

영화 '라디오스타' 배경이 됐던 강원 영월읍 청록다방.
1966년주스 한잔 120원 "너무 비싸다" 아우성

"오렌지 주스 한 잔에 120원을 받는다는 화성 식다방 얘기가 나오면 소심한 고객들은 누구나 옛 돈으로 고쳐 생각해본다. 빛 좋은 개살구식 '컵'에다 씁쓸한 노란 물을 담아서 대금 1,200환을 받는다는 것이다. 모르긴 하지만 '코피' 한 잔에 150환할 때 '오렌지'고 '파인'이고 간에 주스 한 잔 값이 300환을 넘었을 리 없다. 물수건 값, 의자 값, '레지'의 얼굴 값, 냉방 값, 값이란 값을 모조리 다 친대도 그네 갑절이 되는 1,200환을 받을 수 있느냐. 재료가 외래품이기 때문에 그 정도는 받아야 한다면 특정외래품 단속이란 방망이는 어디서 낮잠을 자고 있는가."

1966년 6월 20일 중앙일보 1면에 났던 기사의 일부다. 1962년 '환'이었던 화폐 단위를 한글 '원'과 10대 1의 비율로 바꾼 이후 나타난 세태를 보여준다. 화폐 개혁을 한 지 4년이 흘렀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원이란 단위에 익숙하지 않았다. 오렌지 주스 한 잔에 120원이라니까 얼른 감이 안 온다. 그래서 옛 화폐 단위로 고쳐 1,200환으로 따져본다.

당시 오렌지 주스는 신문물이었다. 지금의 스타벅스 커피쯤이었다고나 할까. 1965년 자장면 한 그릇이 35원이었고, 커피 한 잔과 목욕비가 30원이었음을 고려하면 비쌌다. 오렌지 주스에 따라 나온 물수건과 푹신한 소파, 그리고 어여쁜 종업원의 상냥한 미소를 감안하더라도 바가지란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을 법하다.

쇠고기·돼지고기 값 차이 없어

1948년 달걀 5개=쇠고기 1근 값
정부가 수립된 19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과는 사뭇 다른 물가와 만난다. 달걀 5개면 200g 기준 쇠고기 1인분과 바꿀 수 있었다. 달걀 한 개로 전차 다섯 번을 타고도 남았을 만큼 달걀이 비쌌다. 쇠고기와 돼지고기의 가격은 별 차이가 안 났다.

소비재 공업이 발달하기 전이었던 탓에 빨랫비누는 귀했다. 250g짜리 빨랫비누 한 장을 사려면 전차 요금 다섯 번을 아껴야 했다. 60년이 흐른 지금은 달걀 5개를 모아도 서울에서 시내버스 한 번을 타기 어렵다. 시내버스 요금 한 번을 아끼면 빨랫비누 한 장을 사고도 남는다. 쇠고기 값은 돼지고기 값의 네 배에 가깝다.

해방 이후 서민생활에 가장 큰 어려움은 살인적인 물가였다. 1945년 해방 이후 정부 수립 때까지 3년 동안 소비자 물가는 814% 올랐다. 한국전쟁은 불붙은 인플레이션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1951년 한 해만 물가가 390% 뛰었다. 현금을 들고 있었다면 1년 만에 가만히 앉아서 그 가치가 4분의 1토막 났다는 얘기다. 정해진 봉급을 받는 월급쟁이의 살림살이가 팍팍할 수 밖에 없었다. 1953년 정부가 일제 때 쓰던 원이란 화폐 단위를 환으로 바꾸면서 100대 1의 교환 비율을 적용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모든 거래의 단위에서 '0'을 두 자리씩 빼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나 화폐개혁의 효과는 오래 못 갔다. 정부가 돈을 계속 찍어낸 데다 사람들의 몸에 밴 거래단위가 잘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100원이었던 물건은 화폐개혁 후 1환에 거래가 돼야 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슬금슬금 값이 올라 예전과 같은 100환이 돼버린 것이다.

1962년 발행된 100환권. 20일만에 퇴장한 최단명 화폐.
81년부터 한자리 물가 정착

이는 1962년의 화폐개혁 때도 마찬가지였다. 1950년대 후반 한 자릿수였던 물가상승률이 1962년 화폐개혁 이듬해부터 2년 연속 20%대로 갑자기 뛴 것은 이 때문이었다. 결국 두 차례 화폐개혁은 물가만 1,000배 끌어 올린 셈이 됐다.

1970년대 이후 10%대를 유지하던 물가상승률은 두 차례 오일쇼크 때 다시 25% 안팎으로 뛰기도 했다. 물가가 잡히기 시작한 건 전두환 정부에 들어서면서다. 전두환 대통령은 물가안정을 어떤 경제정책보다 우선했다. 도로ㆍ항만과 같은 사회간접자본 확충도 미뤘고, 농어촌 지원도 줄였다. 여기에다 3저(저유가ㆍ저달러ㆍ저금리) 호황까지 겹쳤다. 안팎의 호재 덕분에 두 자릿수 물가상승률은 1981년 2.4%를 기록한 이후 역사에서 사라졌다. 최근엔 선진국 수준인 2%대로 떨어졌다.

1948~2008년 사이 물가의 변화는 상상을 초월한다. 소비자 물가지수는 1만 710배가 뛰었다. 1948년 1만원의 가치를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억원이 넘었다는 얘기다. 품목별로는 변화의 폭이 더 크다.

두 차례 화폐개혁을 고려했을 때 쇠고기와 쌀ㆍ콩 값은 대체로 소비자 물가지수 오름폭과 비슷하게 뛰었다. 빨랫비누나 돼지고기 값은 상대적으로 덜 올랐다.

반면 시내버스와 지하철 요금은 20만 배가 넘게 올랐다. 인플레이션의 최대 피해자는 늘 서민이었다. 한 푼 두 푼 손톱 밑에 피가 나도록 아껴 돈을 모아도 물가를 따라가기 힘들었다.

은행돈을 많이 갖다 쓴 기업은 인플레이션의 혜택을 많이 봤다. 시간을 끌수록 빚 부담이 줄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인플레이션으로 서민의 부가 기업으로 강제 이전됐다는 평가가 나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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