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방위칼럼SGS] Liberty of SEX

밧데리 없는 바이브레터 같았던 '성교육 박람회'에 부쳐...

불투명하고 야리꾸리한 시트로 전면을 가리고, '성인용품'이라는 알쏭달쏭한 상호가 붙어있는 괴 건물들은, 판교에 알박기 하듯 조용하고 은밀하게 늘어만 갔다. 이제 시내의 어느 구석진 곳에서 그런 건물들을 만나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요즘에는 불투명한 시트를 다 떼어 내고, 깔끔한 인터리어와 함께 콘돔 및 러브젤을 판매하는 프랜차이즈 상점을 비롯하여, 남로당의 '부르르'와 같은 발랄한 느낌의 섹스숍들도 늘어가는 추세며, 신촌의 한복판에는 무려 '성박물관'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버젓이 영업 중이다.(들어가는 사람은 아직 한 번도 못 봤다만)

이러한 가운데, 한국사회에서 최초의 '성박람회'를 개최하겠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동안 각종 건전하기 짝이 없는 물건들을 전시해온 '한국무역전시 컨벤션센터'에서 '성'을 주제로 박람회를 열겠다는 것은 꽤나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박람회라는 매우 공개적인 형태로 '성'을 표현한다는 것은 인류의 숙원(?)이었던 성의 양성화에 급진적인 한 발을 내딛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행사는 파행의 연속이었다. 우선적으로 프로그램들이 문제가 되었다.

세미 스트립쇼, 누드사진 촬영회, 미스 '섹스포' 선발대회(심사기준이 내심 궁금하다), 트랜스젠더 선발대회 등이 내부사정(이라고 쓰고 외부 압력이라고 읽는다)에 의해 취소되었으며, 각종 절차상의 문제와, 서울시의 압력 등으로 인하여 '수위'역시 한없이 내려갔다.(이하 자세한 안습의 현장은 너부리 사무총장님의 탐방기를 참고하시라)

이러한 파행에 대하여, 수많은 이들이 일갈을 터트렸다. 행사를 진행한 주최측에 대한 분노도 많았지만, '아직도 성을 어둡고, 음란한 것으로 취급하는 한국사회'에 대한 성토가 줄을 이었다.

아기가 더 이상 배꼽에서 나오거나, 황새가 물어다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알아버린 탓에, '당신은 (섹스)안하고 사느냐!'라는 박애 주의적 비판에서부터, 외국 선진 문명과의 비교 등 아직도 요원한 '성해방'에 대한 말들이 줄을 이었다.

성해방의 그날까지 전진 또 전진하라?

'성은 억압당해왔으며, 자유롭게 해야 할 어떤 것'이라는 것은, 인류의 진보를 추구하는 수많은 이들에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명제다.

보수적이고, 금욕주의적인 성 관념을 비롯하여, 성을 죄악시하고, 부끄럽게 여기는 고매하신 태도들을 물리치고, 쾌락을 복권시키는 것. 그리하여 기존의 보수적인 세계관을 뒤엎음과 동시에,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 이른바 '성해방'의 듣기만 해도 배부른 시나리오다.

그 문제의식은 물론이고, 지향하는 목표역시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성해방을 위해, 많은 이들의 이론적, 실존적인 저항이 있었다. 온갖 욕을 다 들어먹으면서도 인류를 위한 숭고한 떡을 멈추지 않은 이들의 덕택에, 완벽하지는 않아도 상당한 진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 이다.

이제 성해방에 대하여 딴지를 거는 이들은 간첩이거나, 외계인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정도로, 성해방은 이시대가 이룩해야하는 사명으로서,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먼 하나의 당위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쯤에서 입가에 고인 침을 잠시 닦고,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필자가 사랑해 마지않는 '미셸푸코'는 그의 저서인 [성의역사 1권 : 앎의 의지(1976)]에서 이러한 성해방의 담론에 대한 삐딱한 질문을 던진다. 그는 '성과 권력의 관계를 억압의 관점'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 우리에게 만족감을 주는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성에 대해 '말'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기존의 체제에 대한 위반이고, 권력에 대한 저항이며, 해방된 성, 자유로운 성에 대한 약속을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 그것이 우리들이 그것을 입에 올릴 때 가지는 나름의 엄숙한 태도와, 그토록 집요하게 성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그것이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푸코는 이러한 일종의 '공리'가 되어버린 성해방의 담론이 진정으로 '권력에서 벗어나'있는지를 자문한다.

특히 푸코는 이러한 저항의 주요한 부분인 성에 대하여 '말하기'라는 것에 대하여, 모종의 '선동'이 있었음을 이야기 한다.

카톨릭의 고해성사에서, 정신분석학의 기다란 의자에 이르기까지, 성에 대하여 말할 것, 그것도 아주 자세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이야기 할 것을 요구받아 왔으며, 이러한 것은 권력과 공조관계에 있는 '앎의 의지'에 의한 것이고, 이로 인해 출범한 '성에 대한 지식'이 우리들의 침실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

나아가 사람들의 육체를 억누르기는커녕 되려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형성하고, 관리하는 '생체-권력'의 출현에 이러한 '말하기'가 기여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푸코의 이야기에 동의 할 수도,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고민해 보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쉽고, 당연하게 '성이 억압되고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 그러므로 좀 더 많은 말하기와, 양성화를 통하여 '성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이 너무 없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이들이 성해방에 대해 거품을 물고 이야기 하지만, 성해방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가, 또한 어떤 방식으로 실현해 낼 수 있는 가에 대한 논의는 매우 빈곤하다. 우리는 쉽게 '성'이라는 일반화된 언어를 사용하지만, 성별, 계급, 정체성 등등에 따라 각자의 성이 놓여있는 위상은 매우 다르다.

그러나 우리가 성해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자연스레 떠오르는 주체는, 사지 멀쩡한, 젊고, 아름다운 남녀의 육체이다. 더욱 엄밀하게 말하자면, 지금의 성해방의 담론은 섹스산업의 주 고객이자, 이성간의 섹스에서 공세적이고, 주도적인 입장을 점하고 있는 남자들의 '자유로운 성욕해소'에서 맴돌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성해방이 섹스산업과 성에 대한 노골적인 언설들의 범람이라면, 우리는 이미 말 그대로 차고 넘칠 정도의 성해방을 이루었다. 한쪽에는 취향에 맞게 골라보는 포르노며, 주요한 레져산업으로 떠오르고 있는 '섹스관광', 여성의 몸을 탐욕스럽게 훑어대는 TV카메라들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분석학이 사회의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남성'과 '여성'들을 찾아내고, 인간의 모든 것은 '성'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상태에 대하여 끝임 없이 '부족하다' 말하며, 좀 더 노골적인, 좀 더 많은, 좀 더 자극적인 것들을 요구한다.

하지만 성해방이라는 것이 '외압'을 받지 않고, 개개인의 주체들이 자유롭게 성에 대한 가치관들을 세우고, 자신의 쾌락에 충실한 동시에, 그것에 지배받지 않는 상황이라고 가정하면, 성해방은 아직 꽤나 요원한 일이 된다.

이것은 기존의 성해방의 담론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하는 논의임과 동시에, 어쩌면 기존의 것들을 갈아엎어버린 허허 벌판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본능에 충실해?

성에 대한 욕구는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본능이고, 어디까지가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한 경계는 매우 모호하다. 본능의 영역이 좀 더 커질수록, 성해방은 보편적이고 많은 이들을 포괄하는 담론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개체성을 지우고, 서로 다른 조건과 환경에 속해있는 욕망들을 '(여성의)몸'으로, 성기결합중심의 섹스로 환원한다.

실은 어느 특정한 욕망일 뿐인 그러한 기준을 가지고 수많은 이들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너도 똑같잖아~'라는 느끼한 미소를 날리는 이들, '난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이의 이마에 '위선자'라는 도장을 찍으며 오르가즘을 느끼는 이들은, 아직도 찌꺼기처럼 남아있는 성에 대한 엄숙주의만큼이나 진부하고, 해악적이다.

자유롭고, 평등하고, 행복한 '성'을 쟁취하는 데에, 반드시 모두가 아랫도리를 드러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성에 대한 각종 관념들을 형성해온 가부장제의 5000년 역사에 대한 비판과 저항 없이는, 우리가 얻고자 하는 '자유'가 제자리에서 맴돌게 모습만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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