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연애] 친밀한 타인들 - 말하지 않아도 알까?

얼마 전에 방영되었던 SBS 드라마 '연애시대'는 노희경 작가가 쓴 '거짓말' 이후 정말 오랜만에 열렬히 시청한 드라마였다.

이 바쁜 세상에 미니시리즈를 한 회도 빼놓지 않고 본다는 건 제법 힘든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연애시대'를 한번도 빼놓지 않고 보았을 뿐더러 볼 때마다 탄복에 탄복을 거듭했다.

이 드라마를 끌고 간 스토리는 제법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이 드라마 속에 존재하는 이야기와 인물과 갈등의 밑그림을 그리는 것은 대부분 '제대로 전하지 못한 서로의 속마음'이 아니었나 싶다.

동진은 은호에게, 은호는 동진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서로를 오해했다. 그 결과 파경을 맞았고, 서로의 존재감을 밀어내지 못해 근처에서 배회하면서도 역시 그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주인공 뿐만 아니라 동진의 친구 닥터공이나 은호의 동생 지호도, 은호를 좋아한 교수와 그의 아내 역시 마찬가지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모두 진심을 보여주지 못하고 겉돌기만 한다. (은호의 친구만 다르다. 그녀는 인생이 짧다는 걸 아는 모양이다.)

주인공들의 맘을 아는 시청자 속만 태우다가 그들은 마지막에 가서야 진심을 보여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진심을 알고 나자 드라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끝나 버렸다.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분쟁의 궁극적 원인은 '그 쪽 맘이 내 맘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다름'의 운명은 연인 관계에 매우 세밀하고 치졸한데다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연애 초기에는 그의 맘이 내 맘 같이 않다는 것이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같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덜 사랑하는 사람의 맘에 맞추려고 무진장 노력하기 때문이다. 간도 허파도 모두 빼놓고 만나는 동안이니 당연히 내 맘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맘이 곧 나의 맘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사랑의 공격력이 약해지면서 주권이란 것이 슬슬 생겨난다. 마음이 자치권을 되찾게 되면서 슬슬 '내 맘'이 활개를 치기 시작하고, 그때부터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대화의 기술을 가졌다. 이해력과 포용력도 어느 정도 구비했다. 없는 줄 알았던 그의 마음을 인정하고 그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가능하다. 진정한 '소통'이란 이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또 복병이 있다. 그건 많은 연인들의 관계에 대한 로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건 무엇일까? 바로 '말하지 않아도 아는 관계'이다.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내 맘을 아는 사람, 혹은 내가 아무리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 이것은 모든 연인들이 꿈꾸는 이상형이다. 어느 cf의 노랫말처럼 '말하지 않아도 알아...' 할 수 있는 사람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가? 말하지 않아도 알기는커녕 목에서 피가 나오도록 말해도 모르는 상대가 더 많다. 그래서 지지고, 볶고, 좌절하고, 심지어는 헤어지는 것이다.

프랑스 영화 '친밀한 타인들'은 소통에 관한 영화이다.

재정상담사로 일하는 윌리엄에게 어느 저녁, 미모의 여성이 찾아온다. 그런데 여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약간 이상하다. 비과세 통장이나 현금 영수증 따위는 전혀 언급을 안 하고 남편 이야기만 한다.

알고 보니 이 여자 '안나'는 윌리엄을 정신과 의사로 착각했다. 그녀가 착각했다는 걸 안 윌리엄은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그녀가 털어놓는 이야기에 빨려 들어간다. 하긴 미모의 여성이 남편과의 잠자리 이야기까지 털어 놓으니 귀가 안 커질 수 없다. (정신과 의사가 아닌 걸 후회했을지도.)

안나의 남편은 사고를 당해 다리를 다친 데다 남자구실까지 못하게 되자 그때부터 안나를 정신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해, 급기야는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라고 강요하는 상황에까지 다다랐다. 안나는 남편과의 불행한 결혼생활로 조금씩 미쳐가다가 그것을 털어놓기 위해 정신과를 찾았고, 결국 윌리엄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안나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윌리엄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애정을 가지게 된다. 안나 역시 속내를 드러내진 않지만, 윌리엄이 정신과 의사가 아닌 걸 알게 된 뒤에도 그를 찾아오면서 그에게 요상한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한다.

남녀가 밀폐된 공간에서 서로 얼굴을 맞대고 비밀을 공유한다는 건, 지극히 자극적인 상황이다. 윌리엄처럼 정신과 상담에 대한 직업적 의식이 투철하지 않는 사이비 상담자의 경우에는 더더욱, 고민을 털어놓는 상대에게 연민을 느끼고 그것이 애정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시간이 지나면서 윌리엄에겐 안나가 자신에게 속내를 가장 많이 털어놓은 사람이 되고, 안나에겐 윌리엄이 자신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된다.

처음에는 아무 관계가 없는 타인으로 출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로에게서 진정한 소통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이 소통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서로에게 '말'을 했기 때문이다.

유부녀인 친구 '순애'는 요즘 회사일과 삼십대 중반에 찾아든 정체성 고민 등으로 힘겨워하고 있다. 어느 늦은 밤, 친구들끼리의 술자리에서 순애는 그 고민들을 진지하게 털어놓았다. 순애가 입을 열자 뒤이어 봇물처럼 다른 친구들의 고민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가? 등등...

고민을 듣다가 문득 그들에게 물어보았다.

"남편도 그걸 알아?" "니 애인도 알아?"

그들 중 대부분은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도 자신의 고민으로 머리가 터진다.', '아직은 말할 단계가 아니다.' 등의 이야기를 댔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말하면 뭐하나' 였다.

'말하면 뭐하나'는 잠자리 문제에서도 그대로 통용되는 것 같다. 서로의 욕구를 공유하기 보다는 속으로 투덜대는 것에 더 익숙하다.

여자들의 경우, 인생의 진짜 비밀은 모두 친구들과 공유한다. 여자는 친구에게라도 털어놓지, 남자는 대체 어디다 털어놓는지 모르겠다. 남자들은 삶이 힘들수록, 털어놓아야 할 고민이 커질수록 입을 더 꼭 다무는 것 같다. 그것이 때론 여자의 오해를 증폭시켜 미쳐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대부분의 연인들이 '말하면 뭐하나'하고 생각하면서도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기를 바라고, 오해가 쌓여 결국 파경을 맞게 될 무렵에는, 서로에게 '말하지 그랬냐.'고 원망한다는 사실이다.

2002년 월드컵 때 우리팀 경기 중에 있었던 일이다. 상대팀에게 먼저 한 골을 먹고 난 뒤 우리 선수들이 주눅이 들었는지 몸놀림이 좀 경직되는 듯 보였다.

그때 차범근 해설 위원이 이런 말을 했다.

"이럴 때 일수록 말을 해야 합니다. 말을 해서 의사소통을 하고 분위기를 바꿔가야 합니다. 이럴 때 일수록 말을 해야 합니다..."

말을 해야 한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은 독심술사나 무당 밖에 없다.

좌절된 꿈에 관해 말하고, 비어버린 지갑에 관해 말하고, 섹스가 끝난 뒤 먼저 돌아눕는 등짝에 대해 말하고, 외로운 주말에 관해 말을 해야 한다.

마음이 식어갈 때일수록, 꼴 뵈기 싫어질 때일수록, 상대가 같잖아 보일 때 일수록 말을 해야 한다.

잔소리를 하고 말다툼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거라는 오해를 가지고 몇 년을 버티다 보따리를 싸기 보다는, 더 늦기 전에 진심을 말하고 제대로 소통해 보라는 소리다.

타인에서 출발했지만 결국은 제대로 소통한 안나와 윌리엄의 결말에 관해 말해야겠다.

어느 날 안나의 남편이 윌리엄을 찾아온 것을 계기로 안나는 자취를 감춘다. 윌리엄도 평생을 살아온 사무실 겸 집을 정리해 떠난다.

몇 달 후, 그들은 따뜻한 햇살이 일렁이는 남부 프랑스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안나는 어린 시절의 꿈을 되살려 발레 학원 선생이 되었고, 윌리엄은 햇볕이 잘 들어오는 사무실을 개업했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 말하지 않았지만 그 곳에서 만났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경지에 드디어 오른 것이다. 살다보면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중요한 건 기적 같은 그 순간을 맛보기 위해서, 어쨌든 지금은 '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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