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애인과 섹스파트너의 중간쯤 어딘가에...

어제 광식이 동생 광태라는 영화를 비디오로 빌려봤었다. 거기 그런 대사가 나온다.

여자를 만나서 12번의 섹스 이전에는 헤어져라. 그러자 옆에 있는 남자가 그걸 언제 다 헤아리고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별 다방(원래 명칭은 따로 있으나 간접광고의 위험이 있으므로)은 커피를 마시면 도장을 찍어주는 카드에 10개를 찍어야 1잔을 무료로 마실 수 있지만 콩 다방(역시 간접광고의 위험을 피하고자)은 12잔이 무료라고. 따라서 여자와 한번 잘 때마다 콩 다방에서 커피를 한잔씩 마시고 스탬프를 받은 다음 무료커피를 마시기 전에 헤어지라고.

거기에는 또 이런 대사도 나온다.

김아중이 이불 속에서 열심히 자신을 애무하고 있는 광태에게 다소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한다. 넌 내 몸의 딱 세 군데만 만지는 거 알아? 영화 속에서 그 세 군데가 어딘지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게 가슴, 엉덩이, 성기라는 것은 누구나 다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남녀 사이에서 섹스를 빼고 얘기를 한다면 무슨 할 말들이 있을까?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말을 걸고 데이트를 하고 손을 잡는 건 결국 한 침대에서 뒹굴기 위함이 아닐까? 각기 다른 과정과 또 다른 감정을 가지고 시작하겠지만 종착점은 언제나 같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섹스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떠올릴 추억거리 하나 없이 온통 이 모텔 저 호텔로 옮겨 다니며 섹스만 한 남녀가 헤어진다면 그들은 뭘 아쉬워하고 또 무엇을 떠올리며 슬퍼할까?

참으로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내가 섹스 파트너를 둘 수는 있으나 반대로 누군가에게 섹스 파트너로써의 의미만 가지기는 싫다. 상대방과의 섹스가 아무리 환장하게 좋다 하더라도 그가 오직 내 몸에서 세 군대에만 집중을 한다면 쿨 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만나면 오직 섹스만 하기를 원하는 남자에게 여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넌 나만 보면 그 생각만 하냐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또 무엇을 좋아하는지 혹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저 침대에서 함께 헐떡이기만을 바라는 남자. 그건 내 몸에 무관심한 남자만큼이나 싫다.

남자가 나의 몸에 관심을 가지면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이 남자는 나란 인간에게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오직 내 몸. 그리고 그 몸으로 하는 섹스에만 관심이 있구나.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정 반대되는 입장인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내가 싫은데 어떻게 나와 섹스를 할 수 있겠느냐고. 나와 섹스를 하는 건 나라는 인간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이런 내 말에 남자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설사 싫은 여자랑 한다 하더라도 얼굴에 신문지만 덮으면 섹스 할 수 있는 게 남자라는 동물이라고.

나와 섹스를 했던 그 많은 남자들은 내가 좋아서 섹스를 한 것일까? 아니면 섹스가 좋아서 나와 한 것일까? 어쩌면 그 두 가지를 나누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지도 모른다.

한때. 섹스 파트너를 둘 이상 둔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었다. 사랑하는 사람도 없이 단지 육체적 쾌락을 위해 섹스파트너를 둘 만큼 나는 쿨한 인간이 아니었나보다. 허나 사랑하는 사람. 그 한 사람 하고만 섹스를 할 만큼 지고지순하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그 섹스 파트너들은 내가 단지 섹스파트너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 했으며, 밤이 아닌 낮에 만나서도 데이트를 하기를 원했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싶어 했었다.

어쩌면 그들이 그러지 않았더라면 나는 섹스 파트너로 옆에 두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까 말했다시피 섹스 파트너를 둘 수는 있어도 내가 상대방에게 그 정도의 의미만 가지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정말로 고리타분한 얘기지만 연애에는 한 가지 진실이 존재한다. 절대로 상대방보다 내가 더 많이 좋아하지 말 것.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티는 내지 말 것.(그러나 이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마음은 어떤 식으로건 티가 나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정말 이상하게도 상대방이 나보다 나를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그 인간에 대해 자기가 우위에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랑해줘서 고맙다는 것은 책에나 나오는 말이다. 실제로는 니가 더 많이 사랑하니까 니가 더 많이 참아야지만 존재한다. 우물은 언제나 아쉬운 놈이 파게 되어 있으니까. 목마르지 않은 상대방은 우물을 팔 일도. 우물에서 물을 얻을 일도 없다.

내가 섹스 파트너를 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표현하지 않기 위해. 또한 내 열정을 분산하기 위해.

사랑하는 그를 만나기 이전에 섹스 파트너를 만나서 섹스를 하고 나면 나는 그에게 섹스를 거절할 용기가 생기곤 했다.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은 여자들이 어느 정도 튕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할 때면 언제든지 자신의 성기를 꽂을 수 있는 여자는 헤프거나 재미가 없거나 아니면 다 잡은 물고기라고 생각을 하니까.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몸을 들키지 않아야 했다. 당신과의 섹스를 너무도 기다렸다는 듯 그렇게 미끈하게 그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었다.

나이가 들수록 애인과 섹스 파트너의 경계가 조금씩 모호해지고 있다. 예전에 그들의 경계는 너무나 확실했었다. 마치 태극기의 빨간색과 파란색처럼 절대 섞일 수 없는, 누가 봐도 확연하게 구분이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요즘의 나는 섹스 파트너에게 조차 사랑을 기대한다. 아니 사랑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따뜻한 무언가가 함께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애인에게는 점점 나를 숨기게 된다.

상처받지 않으려면 딱 한 가지 방법뿐이다. 상처 주는 상대방을 어쩔 수가 없다면. 그래서 그가 상처를 준다면? 정답은 받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선물도 아닌데 어떻게 주는 상처를 받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겠다. 모든 걸 주지 말라고. 몸도 마음도 상처받지 않을 정도로만 주라고.

가끔 섹스 파트너와 공원을 함께 산책한다. 산책을 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다. 어렸을 때 있었던 얘기 혹은 직장에서의 재수 없는 상사 얘기. 섹스 파트너니까 별 부담 없이 어떤 얘기든 해도 된다는 생각에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런 날의 우리는 섹스 없이 허브티만 한잔씩 나눠 마시고 헤어지기도 한다.

어떤 날은 애인을 만나 술을 마신다. 이미 누군가와 술을 마셔서 충분하게 취해있는 그는 꼬이는 발음으로 몇 마디 되도 않은 얘기들을 하다가 눈으로 말한다. 너랑 자고 싶다고.

그럼 우린 내 집이나 그의 집. 혹은 근처의 모텔로 향한다. 먼저 씻는 건 언제나 내 쪽이다. 긴 머리를 말려야 하니까. 축축한 머리로도 섹스를 할 때는 초창기뿐이다. 그 다음부터 그들은 신경질을 낸다. 머리 좀 말리라니까.

나에게 있어 누가 섹스 파트너이고 누가 애인인지 모호해지는 결정적인 순간들이다.

만약 내가 선택을 할 수 있다면 그래서 내 맘대로가 가능하다면 요즘의 나는 섹스 파트너도 그렇다고 애인도 아닌 그 중간쯤 어딘가에 위치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 애매함을 즐기고 싶다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서 각각의 것을 취하는 것에 지쳤기 때문이다.

거기다 요즘은 점점 그 경계도 모호해지고 있는 판국이라 실로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애인인지 섹스 파트너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면 차라리 한 사람이 그 중간의. 그러니까 어중간하다 말할 정도의 위치에 있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면 누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혹은 누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는 일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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