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브컬처탐방] 로망포르노 - 제9회 재판장에 선 에로스

김인규씨의 경우.

지난 7월 27일 김인규교사 부부가 본인들의 홈페이지에 올려놓았던 전라 사진이 '음란물'로 판결되었다. 대법원은 1심과 2심을 깨고 '보통 사람의 정상적 성적 수치심을 해치면 음란물' 이라며 김씨에게 일부 유죄 취지로 대전고법으로 파기 환송 했다.

경악할 노릇이다. 대한민국 최고재는 아직도 선사시대에 살고 있나보다. 더욱이 그 판결의 이유가 1960년대의 일본재판정에서 나온 판결문과 흡사함에는 정말이지 정이 다 떨어진다.

1995년 마광수 교수 재판 때 대다수 일반국민들은 그를 魔狂獸라 했고, 지식인들, 예술가들도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사회적 분위기가 험했다고는 하지만 그때의 침묵의 대가를 앞으로도 10년은 더 치러야 할 것이다.

'국산 포르노를 장려해서 외국포르노로부터 우리의 달러를 지켜야한다'고 문광부와 세관에서 부르짖었던 몇 해 전 필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때 나를 비웃던 공무원들도 집에서는 외국사이트에 접속에서 달러를 날리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포르노를 합법화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중학생도 버젓이 PC용 카메라 앞에서 옷을 벗고 채팅을 하는 이 나라에서 아직도 반세기전 일본의 재판문을 베껴가며 점잖을 떠는 그 '이중성'이 성표현물들을 점점 음성적으로 키워갈까 그 걸 걱정하는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한 사회의 성적표현 수위는 사회적 합의에 따른다. 이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사회가 변하는 동안 법적 표현수위가 자동적으로 변하는 경우는 어디에도 없다. 늘 그 계기가 있게 마련이고 그 계기를 놓치지 않고 확실한 주장과 투쟁으로 쟁취한 사회만이 좀더 많은 표현의 자유를 누린다는 것을 밝혀 두고 싶다.

로망포르노 재판

▲ 호시 마리코의 캘린더 사진

1972년 1월 28일, 동경도내 10개 극장에서 3편 연속 상영되고 있던 로망포르노 3작품이 '외설'의 혐의로 경시청 보안과에 적발되었다. 동시에 니카츠 본사와 촬영소, 영화윤리위원회(영화심의 위원회)의 사무소, 감독의 자택 등 7개소에서는 경시청에 의한 가택수색이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영화윤리위원회(이하 영륜)가 경찰의 수색를 받은 일은 유사 이래 처음 있는 일로 당시 위원장이던 다카하시 세이치로 위원장이 수색을 받은 다음 날 항의의 표시로 사퇴하는 상황까지 치닫게 되었다.

적발된 영화는 [프리마 기획]이 니카츠로부터 하청 제작한 [여고생게이샤]와 니카츠의 [암고양이의 냄새] [러브헌터-사랑의 사냥꾼] 이어서 4월 말에 또다시 적발 된 [사랑의 온기] 등 총 4 작품이었다.

영륜의 심사를 통과한 일반영화가 형법175조, (외설 도화공연전시죄)에 적용된 예는 1965년 니카츠의 다케치 데츠지 감독의 [검은눈]이 유일한 선례였다. 그러고 보면 니카츠와 검찰의 악연은 질긴 것이었다.

로망포르노 제작이 당시의 법과 탈법의 경계를 오가는 위험한 일이라는 것은 제작의 선두에 섰던 경영진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었고 또 그만한 각오의 위에 시작한 일이었다. 모두 '은팔찌를 찰 각오'로 시작한 일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일본은 세계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 볼 수가 없을 만큼의 다양한 폭력과 섹스를 담은 사진과 영상이 거리마다 넘쳐나고 있다. 일반인 소비자가 그것들을 '접하기 용이함'에 있어서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보다도 훨씬 앞서고 있다.

▲ 74년 작품. [회전침대의 여자] 스틸컷

그러나 1970년대 초기의 일본은 국민 99%가 햄버거가 뭔지 모르고 살던 시대였다. 뿐만 아니라 동시대 구미세계에서의 성 표현수위도 그리 높은 것이 못되었다. 미국의 플레이보이지에 처음으로 헤어누드가 게재된 것이 69년의 일이었고, 이것은 측면에서 털이 조금 보이는 정도였다.

정면에서 헤어를 노출하기 시작한 것은 1971년에 들어서였으며, 영화에서는 마이크 니콜라즈감독의 [러브헌터]에서 전라 남녀의 섹스 씬이 당당하게 그려졌다. 이 영화는 3년간에 걸친 재판 끝에 연방 최고재에서 만장일치로 무죄평결을 받고 그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표현의 자유를 얻게 되는 시금석이 된 작품이었다.

72년 9월9일 동경지검은 상기 4작품의 각각 제작 책임자, 감독 등 6인과 영륜의 3인, 합하여 9인을 각각 '외설 도화공연진열죄' 와 '동조방임죄'로 기소했다. 73년 6월 4일 제1회 공판이 열렸으며 공판에서 야마구치 세이치로감독과 주연 다나카 마리가 과격하게 반론을 펼쳤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나카 마리는 아직 전공투세력이 남아있는 대학가 축제에 불려 다니며 '경시청의 아이돌' '싸우는 여배우'등의 닉네임을 얻게 된다.

이 [니카츠 로망포르노 재판]의 제1심에서는 먼저 외설이라는 개념의 정의가 문제시 되었다. '성욕을 흥분 또는 자극하기위해 보통인의 정상적 성적수치심을 훼손하고 선량한 성적도덕관념에 반하는 것' 이라는 최고재판소판례가 있었으나 재판의 기준이 되는 '사회통념'이라는 것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며 그 사회통념에 대한 고찰이 있어야만 판단가능한 일이었다.

문제가 된 4개의 작품에 대해서는 결국 '배우들이 성교와 성기 애무 등을 진짜로 하지 않고 연기하였으므로 블루 필름과는 구별되고 사회통념상 노골적이 위화감을 주지 않는다' 는 이유로 외설이라고 인정하기 힘듦을 재판정은 인정하였다.

니카츠 측의 증인들로서 영화인, 언론인, 평론가, 당시 시나리오작가협회 회장 신도우 가네토 등이 출석하였다. 78년 6월 동경지재에서 2차 판결이 있었으며 이로써 지루하게 계속되던 니카츠의 로망포르노 재판은 종지부를 찍는다.

악연의 시작 - [검은 눈] 재판

사실 로망포르재판 이전에 니카츠는 검찰에 적발된 적이 또 있었다. 다케치 데츠지 감독의 핑크영화 [검은 눈]이 외설혐의로 기소된 것이다. (혹자는 핑크영화로 구분하지 않기도 한다)

다케치 데츠지감독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좌익계열의 열혈 학생운동가였으며, 그후 가부끼를 포함한 전통극을 개량한 연극의 연출가로 명성을 얻게 되자 핑크영화 [백일몽]을 찍는다.

핑크라고 하기에는 제작비가 많이 들어간 (당시 600만 엔)작품이었지만 이 작품은 흥행수입 3억 엔이라는 대박을 터뜨린다. 그 다음에 만든 작품이 반미민족주의영화를 표방한 [검은 눈] 이었다.

미군기지촌의 매춘부의 아들이 흑인 병사를 죽이고, 이제는 매춘을 그만두고 미군의 현지처가 된 숙모를 범하고 2만 달러를강탈한다는 이야기다. 확실히 '반미민족주의'적 이야기이긴 했으나 스캔들을 위한 스캔들영화였다. 이 [검은 눈]이 개봉된 지 7일 만에 경시청에서 형법175조 위반혐의로 다케치 데츠지를 위시한 니카츠 관계자 40여명이 조사를 받았다.

재판은 1심에서는 '영화를 전체적으로 보고 한 장면, 한 장면을 떼어서 평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고 보고 '외설성'이 없다고 판단 무죄를 선고 하지만 2심에서는 거꾸로 '외설성'은 인정하되 영화제작을 한 사람들은 영화윤리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하였으므로 '외설성이 없고 법률상 허락된 것으로 믿었을 것이며 범죄로서 성립하지 못한다' 라는 이유로 무죄가 또다시 선고되었다. 이것이 69년 9월 17일의 일이었다.

즉, '영화는 확실히 외설적이었으나 영화계의 권위 있는 영륜의 심사를 통과 했으므로 피고는 범의가 없었다' 라는 의미였다.

여하튼 이때는 영륜의 심사위원들은 기소유예가 되고 영화제작담당자들이었던 감독과 배급부장만이 기소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만약 이 영화를 통과시킨 영륜이 기소되었다면 유죄가 된다. 72년 니카츠의 로망포르노가 검찰에 적발되었을 때 영륜이 수색을 받은 것은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 재판에서 피고측, 즉 다케치 데츠지를 변호하는 증인으로서 미시마 유끼오, 오오시마 나기사 감독 등 당대를 대표하는 문화인들이 증언대에 섰다. 결국 이 재판은 1심 무죄, 2심에서도 무죄를 선고받고 종결 되었다.

▲ [젖은 욕정 도쿠다시 21신]의 스틸 컷

74년의 작품들

1974년 발표된 45작품의 로망포르노중 대표작들은 이소미 타다히코 감독, 타치노 유미코 주연의 [어린처의 고백-실신엑스터시], 나카시마 아오이의 [OL일기 젖은 지폐다발] 히로미 마야 주연의 [실록집시로즈] [젖은욕정 도쿠다시21인] 호시 마리코 주연의 [터키탕 승천] [제복밑의 소용돌이] 등이 있었다.

▲ [어린처의 고백-실신엑스터시] 스틸컷

[제복밑의 소용돌이]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고등학생 류지는 평소에 흠모하고 있던 16살의 야노 루미를 불량배로부터 구해낸다. 불량배에게 강간을 당해 상처받은 루미는 오직 류지만이 자신의 유일한 보호자임을 알고 신뢰한다.

류지는 루미를 데리고 자신의 배다른 누이, 야스코의 집으로 들어간다. 루미와 단 둘만의 생활을 꿈꾸며 류지는 루미와 같은 바에서 일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야스코의 남편인 켄이치가 출소하고 루미에게 흑심을 품는다.

켄이치는 루미에게 값비싼 선물을 하고 고급레스토랑에 데려가고 하며 환심을 사다가 어느 날 바에서 취해 쓰러진 루미를 범한다. 그리고 차츰 자신의 장사도구로 루미를 이용하기 시작한다. 한편 루미는 켄이치가 베푸는 호화스런 생활과 테크닉의 노예가 되어 류지를 잊게 된다. 그런 루미와 켄이치를 지켜보던 류지가 펼치는 치정 복수극이다.

▲ [제복밑의 소용돌이]의 스틸컷

[터키탕 승천]은 일본의 성풍속업 소프란도의 전신인 터키탕의 아가씨들이 펼치는 포복절도의 코메디다. 하야시 이사오 감독의 작품.

현재에도 그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는 카와사키의 터키탕 거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이야기는 [극락터키]라는 업소의 인테리 딸이 어머니의 대를 이어 터키탕의 넘버원 아가씨가 되어 [극락터키]를 경영해 나간다는 줄거리다. 코메디이긴 하지만 터키탕에서 일하는 다양한 여자캐릭터들이 리얼한 삶의 단면들이 짙은 페이소스를 느끼게 해준다.

▲ 하야시 이사오 감독의 [터키탕승천]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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