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브컬처탐방] 로망포르노 - 제8회

패전과 GHQ

1973년, 영화사에 길이 남을 아메리카 영화[대부(代父)]가 전 세계를 강타한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오르나 '수상식에 나가면 죽이겠다'는 마피아의 협박을 받은 말론 브란도는 수상거부 성명을 발표해야했다.

세계경제는 오일쇼크로 꽁꽁 얼어붙었던 해였고, 또 우리에겐 잊을 수 없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발 했던 해 이기도 했다. 니카츠가 '에로 노선'으로 들어서고 잃은 것과 얻은 것이 수 없이 많던 한 해가 지나갔다.

짐승의 발자국을 쫓는 헌터처럼 흩어진 로망포르노의 자료를 하나하나 챙기다보니 당시의 시대상황과 일본에서의 '에로영화의 계보'가 궁금해졌다. 일본 굴지의 AV업체인 '우주기획(宇宙企劃)'이 나마도리(生撮), 이른바 '공사' 를 하지 않고, 배우들이 실제 섹스를 하는 '진짜 포르노'를 찍기 시작한 것이 70년대 후반이었다.

그렇다면 니카츠의 에로노선은 어느 날 갑자기 기획 된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어떤 문화현상이든 아무 예고 없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일이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니카츠 이전에 이미 35mm 필름으로 작업된 에로영화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신극' 이니 '핑크영화'니 하는 말로 부르고 있었다. 무르익은 토양이 있었기에 니카츠의 로망포르노도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이다.

패전 후, 일본에 주둔한 맥아더의 점령군 사령부(이하 GHQ)는 모든 일본의 영화를 검열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영화에 키스신이 없는가?' 하고 화를 냈다고 한다. 예를 들어 1946년에 공개된 대영(大映)의 [어느 날 밤의 키스]의 경우, GHQ에 제출한 시나리오에는 분명 키스신이 있었는 데 스크린에는 우산으로 가리는 등의 수법으로 키스신이 없어졌다.

GHQ는 분노했다. 비슷한 시기에 사전 검열을 받고 개봉한 쇼치쿠(松竹)의[20살의 청춘]에서 처음으로 입술이 닿는 키스신이 등장했다고 한다.

GHQ의 눈에는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마저 표현하기를 꺼려하는 당시의 일본인들이 아마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미국 헐리우드의 영화론과 점령하에 급속히 퍼지고 있는 신 풍속을 비판한 [커다란 육체, 작은 육체]의 저자이자 영화평론가인 오카와 토오루(小川徹) 등의 지식인들의 저항에 GHQ는 분노했다.

하지만 일부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스크린뿐만 아니라 일반사회에서도 부녀자들의 육체 노출도가 점점 정도를 더해갔다.

90년대의 '헤어누드' 열풍과 지금은 전 세계 포르노 업계에서 전문용어가 되어버린 일본어 '부카케' 등 일본은 세계 성인영상컨텐츠업계에서 선도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한편 '원조교제'니 최근의 '고교생이하 성행위 금지법 추진 논란' 등은 패전국 일본에게 급작스럽게 밀려들어온 미국문화의 부작용이다.

'태양족'의 출현

▲ 73년 데뷔한 코즈에 히토미의 극중 열연장면

또 한편으로 우리에겐 일본 극우의 수괴로 알려진 동경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의 이른 바 '태양족 소설'이 대히트, 사회현상으로까지 확대되자 영화계도 탄력을 받는다.

태양족 소설이란 피학적, 신경증적인 당시의 일본문학의 사조에 반기를 들고 위선적이지 않은 가해자로서의 폭력과 복싱 등의 스포츠, 혹은 재즈, 요트 등을 등장시킨 스캔들 소설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성풍속을 화제 삼아 호기심을 자극한 통속소설'이라는 세간의 식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태양족'이라는 유행어와 함께 문학에도, 스크린에도 새로운 사조는 빠르게 퍼져갔다.

출발점이야 어디든 간에, 스크린에 여우(女優)의 나신을 노출시켜 부족한 제작비, 기획력, 시나리오, 테마의 빈곤 등을 커버 해보려는 제작진의 의도가 일본의 에로계 영화를 급진전 시켰다.

50년대 말이 되면서 스크린에는 여배우의 나신이 등장하게 된다.

일본 전국에 극장 수가 6,800개에 달하던 1940년대 중반의 일본 영화계는 전무후무한 번영의 시기를 맞이한다. 6,800개의 극장이라니! 현재 한국의 비디오방 만큼이나 많은 숫자다. 이런 호황을 주도한 것은 다름 아닌 '뉴스영화'였다.

러일 전쟁의 상황을 시시각각으로 보도하던 것이 뉴스영화의 효시였고 이어서 태평양 전쟁이라는 호재(?)를 만난 후, 각종 교양뉴스, 외국뉴스 등, '뉴스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은 마치 IMF 이후 한국에서 식당이 늘어나는 속도로 확산일로의 기세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패전 후 5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일변했다.

'뉴스영화'로 금고가 빵빵해진 대형 영화사중에는 자체 배급망을 갖추고 있던 곳이 상당수 있었는데 이들은 재빠르게 '에로계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한다. 에로계 영화는 확실한 황금 알을 낳아 주었다.

이러한 대형 제작사의 에로계 영화는 성교육이니, 때로는 신풍속이니 하는 개똥철학으로 치장하고 있었지만 결국 에로티시즘, 아니 보고 싶고, 하고 싶은 인간의 말초신경을 건드려 장사를 하자는 속셈이었음은 두말 할 나위 없는 것이었다.

핑크와 블루필름

▲ [색정여행 홍콩모정]의 스틸 컷.(차인표 아님;;)

한편 '뉴스영화'의 배급이 끊긴 이 시대, 골목 안에 자리 잡은 작은 극장에서는 소자본의 독립 프로덕션이 제작한 또 하나의 에로계 영화가 돌아가고 있었다. 이것이 이른바 '핑크영화'였다.

대개의 극장에서는 메인 메뉴로 스트립 쇼를 해주고 그것이 끝나면 디저트로 '핑크영화'를 틀어주곤 했다. 반대로 방금 영화에서 본 '그 여배우'가 알몸으로 스크린 앞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뛰어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핑크영화'가 대형 제작사의 에로계 영화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우선 '개똥철학'이 없고 단순, 순진, 무식하게 오로지'쌕돌이'들만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라는 것이다. 평론가 중 혹자는 제작비가 200만∼250만엔 정도의 에로영화를 '핑크영화'라고 규정하는 사람도 있다.

혹자는 당시 지하시장에서 유통,상영되던 소위 '블루 필름'이라 불리던 8mm 에로영화를 '핑크영화'와 동일 범주에 넣고 있는데, 이것만은 사실과 크게 다르다. '핑크영화'의 베이스는 중,단편의 기록 영화에서 찾을 수 있으며 특히 외국의 스트립쇼를 기록한 영화를 흉내 내어 일본 국내에서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 기원이라는 해석이 가장 유력한 학설이다.

'핑크영화'라는 호칭이 붙기 시작한 것은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인 1963년 나이가이타임스(內外タイムス)지의 무라이 미노루 (村井實) 기자가 사용하기 시작한 후 부터였다는 설이 가장 신빙성이 있다.

세키 코우지 감독의 여자 타잔의 이야기 [욕정의 동굴]을 취재한 무라이 미노루기자는 ''블루 필름'이 아니면서 섹스의 묘사는 핑크색 정도의 농도로 묘사하는, 그런 영화'라는 의미로 '핑크영화'라는 말을 생각해 냈다고 회상한다.

1973년에 새로이 데뷔한 로망포르노의 배우는 코즈에 히토미, 외국인 배우 사라 등이 있고 각각 한 작품씩 출연해 이 기간의 유일한 신인이 되었다.

▲ 코즈에 히토미의 그라비아

훔쳐보기(노조끼)에 미친 한 사내가 창녀에게 자신의 방을 빌려주고 그 방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다양한 정사를 고도의 테크닉으로 훔쳐본다는 스토리의 코믹물 [색도강좌 훔쳐보기 전과]로 코믹물의 귀재 다케다 잇세이 감독이 데뷔한 것도 이 때다. 니죠우 아케미가 주연했다.

▲ [색도강좌 훔쳐보기 전과]의 스틸 컷

▲ 니조 아케미의 그라비아

* 본 기사는 반짝반짝 연애통신(www.yonae.com )에서 제공합니다. 퍼가실 때는 출처를 명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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