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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럴의 이데에로기] 프리섹스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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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원 - 프리섹스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신다면 난 서슴지 않고 '프리섹스라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김구 선생처럼 세 번의 소원 기회 모두를 한가지로만 올인 할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프리섹스는 내가 간절히 원하는 소원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물론 대부분의 인간 수컷들의 판타지가 이쁜 여성을 마음 놓고 유린하는 주지육림의 쾌락적 군림에 있기 때문에 프리섹스라는 '나의 소원'이 새삼스러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프리섹스라는 '나의 소원'은 그런 판타지와 구분되고 싶다. 물론 나 역시 플레이보이지의 사장 휴 헤프너처럼 평생을 쭉빵걸들과 환락적으로 보내고 싶은 마음이 한편으로 존재하는 건 사실이다.

현대판 주지육림은 돈만 있으면 언제든 실현 가능하므로 막연한 공상과는 좀 다르다. 일말의 현실성이 있기 때문에 사실 판타지가 아닐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욕구라는 점에서 나의 윤리적 심미안에 좀 거슬리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보노보 원숭이 사회처럼 프리섹스가 만연한 사회이다. 아마 실현 가능성으로만 따지고 보자면 프리섹스가 (특히 한국에서) 도래하기를 기대하는 것보다, 내가 휴 헤프너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 훨씬 쉬울 지도 모른다.

이렇듯 프리섹스는 나만이 즐기는 이기적 욕망을 넘어서기 때문에 나는 매우 공리적인 소원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본다면 김구 선생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라는 소원과 나의 프리섹스 소원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왜 나는 프리섹스주의자가 되었을까? 누군가에게는 식탐이 참을 수 없듯이, 나에게는 섹탐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대부분의 젊고 싱싱한 수컷들이 그러하니까. 사연은 이렇다. (아마 이 얘기하면 나는 마눌님에게 '맞아죽을 각오'로 쓴 셈이 될 지 모르겠다. 제2의 조영남? - -;)

나는 왜 프리섹스주의가 되었는가?

내가 결혼한 지 불과 6개월 남짓 했을 때이다. 어느 날 직장동료와 술을 진탕 마셨고 3차까지 간 술자리의 종착역은 안마시술소가 되었다. 총각이었던 그 친구가 종종 애용하던 곳이었던 듯 하였지만, 나는 그런 곳이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그곳에서 행해지는 '연애'를 예상치 못할 정도로 쑥맥은 아니었다.

내 직장 동료는 이미 나의 화대까지 지불해주었던 모양이다. 장님 안마사가 내 몸을 주무르고 나간 직후 미니스커트를 입은 아가씨가 '오빠, 자?'라며 배시시 웃으며 들어왔다.

나는 순간 '올 것이 왔구나'라는, 그곳에서는 어울리지 않을 긴장감에 잠시 휩싸였다. 술에 적잖이 취해 있었음에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도덕적 필터링을 통과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유부남인 놈이... 그것도 아직 새신랑 소리를 듣는 놈이 너 뭐하는 짓거리냐?'라는 도덕적 통념이 내면에서 울렸던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그런류의 심리적 갈등은 낯선 여인의 향취를 결코 이겨낼 수 없었다. 결국 10초만에 나는 심리적 무장해제를 당하고 그녀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취기가 빠진 새벽녘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오는 길은 아무래도 추레한 기분에 휩싸이기 십상이다. 비록 우연한 기회였지만 혼외정사라는 것을 처음 저지르고 난 직후이다보니 머리 속이 복잡해지기까지 했다. 물론 아내에게 변명할 알리바이까지 챙겨야 했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과연 비도덕적 인간이 되어버린 걸까?'라는 윤리적 자기 점검을 아무리 해도 이상하게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자니 더욱 그렇다. 어느 소설 제목처럼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고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실 내 몸뚱이를 내 맘대로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신체의 권리는 천부인권인데 기혼자의 몸뚱이는 배우자에게 영원히 저당 잡혀야 한다는 것이 이른바 책임의 완수일까? 정조대를 중세유물로 치부하는 것 같지만 사실 도덕주의적 압박으로 배우자에게 정조대를 채우는 심리는 여전하지 않은가?

자기 합리화의 반문들은 급기야 노자를 연상케 하는 초월주의적 단상으로까지 치닫게 되었다. '씨바, 기껏해야 몇 십년 더 살다가 흙과 먼지로 돌아갈 몸. 소소한 성기의 놀림에 대해 뭐 그리 심각하게 생각할쏘냐'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나는 프리섹스주의자가 안 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아내의 경우를 내 상황으로 돌려세우는 역지사지의 추체험을 해보아도 역시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아내의 '외도'를 상상해 보니 과연 질투심이 스믈스물 피어오르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적 가치관으로 비추어 본다면 그런 질투심은 반성의 대상이지 구현해야할 가치는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여기에는 '내가 혼외정사를 했고, 앞으로도 하고 싶은데 아내 또한 그럴 권리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상호주의의 윤리학이 바탕에 깔려있는 것이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흔하디 흔한 안마시술소에서의 그런 단편적 경험 하나만 갖고, 프리섹스주의자가 되었다면 과장이 너무 심하지 않느냐는 힐난도 있을법 하다. 과연 그렇긴 하다. 내가 총각 시절을 떠올려보니, 사실 성적 윤리관이라고는 개미의 발톱만큼도 없었다.

지금의 아내가 된 애인과의 섹스는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 당시에도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돌리고 싶은 적이 있던 거 같다. 그러나 실행한 적은 없었다. 주류적 성적 윤리관에 투철해서라기보다는 아마 기회와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나의 프리섹스주의 결심은 태생적으로 느슨했던 성적가치관이 안마시술소의 경험을 계기로 성립되었다고 봄이 아마 정확할 것이다.

집에 돌아와 잠든 아내의 모습을 슬며시 지켜보니, 마음 한 켠에 약간 켕기는 구석이 없지 않다. 성적 죄의식이라기보다는 어떤 미안함에 가까운 감정이었는데, 깨어난 아내에게 외박에 대한 잔소리를 흠씬 듣고 나니, 나는 뾰루퉁해져서 어느새 미안한 감정도 증발해버리고 말았다.

프리섹스의 규범

내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프리섹스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보려고 이곳저곳을 뒤져봐도 기본적인 개념조차 얻기에도 실패했다. 정녕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제각각의 답변을 내놓는 형국과도 같다. 그렇다면 국어사전이 친절하게 '자유 성애'로 풀이해준 그 개념을 나 역시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자유로운 섹스의 대전제가 '상호 동의'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또 두 사람 이상이 자유롭게 상호 욕망에 기초하여 육체적으로 결합한다는 점을 두고 보면, 매춘은 '육체-육체'라기 보다는 '육체-돈'이라는 등식이라는 점에서 프리섹스의 범주에서는 벗어난다고 본다.

여기까지는 무난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프리섹스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간에도 분화되는 지점이 있으니, 기혼 또는 커플의 처지에서 프리섹스의 허용가능성이다.

파트너를 둔 자의 '외도'는 대체로 배우자(애인)을 속이는 행위를 동반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커플 상대방에게 기만과 배신감을 안겨줄 수밖에 없다.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은 '자유'의 본령을 훼손하는 것이니 '프리' 섹스의 범주에 삽입시킬 수 없다는 것이 허용불가능론자의 주된 논지로 보인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배우자(애인)의 동의가 전제된 스와핑류의 섹스는 윤리적으로 전혀 문제될 것이 없을 터이다. 일견 타당하다.

하지만, 배우자를 속인다는 행위 자체가 무조건 배신과 기만으로 링크되는 것은 좀 억울한 측면이 있다.

배신이나 기만이라면 상대방을 이용해먹다가 버린다든지 등의 행각으로, 자신의 이기를 위해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인데, 배우자(애인) 몰래 남과 섹스를 하는 것은 그것과는 좀 성격이 다르지 않느냐는 것이다. '속인다'기 보다는 '숨긴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혹자는 떳떳하지 못하니까 숨기는 것이 아니냐고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배우자 몰래 섹스하는 행위를 숨기는 것은, 도둑질을 한 사실을 숨기는 것과는 궤를 달리한다. 그것이 잘못이기 때문에 숨기는 것이라기보다는 상대방이 그 사실을 알게 됨으로 인하여 당할 정신적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근한 예를 들자면, 운동권 학생이 데모하러 갈 때. '어머니, 저 시청 앞에서 백골단과 맞짱뜨고 오겠습니다!'라고 인사하면서 갈 수 없는 상황과 유사한 경우라 할 수 있을 터이다. '너 어디가니?'라는 어머니의 물음에 '도서관이요!'라고 속이는 행위가 데모를 잘못으로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은 갸륵한 심리의 소산이 아니던가.

나는 아까 섹스할 수 있는 권리를 신체의 자유로 표현했다. 배우자의 유무에 따라 그 천부적 권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신탕을 즐겨먹는 자에게 개고기를 죽도록 혐오하는 배우자가 있을 때, 그는 배우자를 위한 마음으로 보신탕을 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이타적 행동으로 칭송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배우자 몰래 보신탕을 먹고 들어왔다고 해서 그의 천부적 권리를 나무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진중권의 명쾌한 해설은 나를 안도케 한다.

'오늘날 서구에서 혼외정사는 일반화한 현상이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법의 문제도 아니고, 심지어 도덕의 문제도 아니다.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서 부부가 각각 이성의 친구를 갖는 소위 '가벼운 결혼'의 경우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중략)... 간단히 요약하면 파트너에게 동일한 권리를 주는 한 혼외정사는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진중권, [시칠리아의 암소], 다우)

한편, 이런 주제가 나오면, 가장 조악하고 흉포한 논법을 들이대는 자들이 꼭 있게 마련이다. 이른바 '역지사지' 논법. 즉, '니 부모가, 마누라가, 자식이 이렇게 된다면, 또는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기분 좋을거 같냐? 이 후레자식아.' 같은 류의 훈계들이다. 애들이나 할 수 있는 유치한 논법임에도 대중적으로 은근히 먹히기도 한다.

전도유망한 양가집 규수가 어느 날 중증 장애인, 또는 외국인 노동자 같은 사회적 약자에게 시집간다고 하면, 아마 그 집안은 발칵 뒤집어지고 부모는 몸져 누울 것이며, 부모-자식간의 연을 끊네마네 난리 법석이 일어날 것은 경험칙상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사회적 약자에게 시집가는 것이 비도덕적 행위가 아닌 것만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다. 또 내 자식이 동성애자가 되길 바라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동성애자가 비윤리적 인간이 아닌 것도 양식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상식이다.

이처럼 나 자신을 비롯하여 친지들이 '좋아할 수 있다-없다'를 '옳고-그름'의 판단기준으로 삼는 것만큼 한심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선이고 싫어하는 건 악이라는 가치규범은 유치원생들, 혹은 초-중딩들의 사고방식과 똑같은 것이다. GOD팬과 HOT팬 사이의 해묵은 불화는 그런 유치한 사고방식의 산물이 아니던가.

지금까지 살펴본 걸 잠시 정리하자면, 내가 생각하는 프리섹스는 돈이라는 매개 없이, 상호욕망에 기초한 섹스 당사자들 간의 '상호 동의' 과정은 필수적이며, 그 영역은 기혼자까지 넓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섹스 상대방의 '동의'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그것의 윤리성이 완결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동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구라와 기만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할 마음도 없으면서 섹스할 기회를 얻기 위해 거짓으로 사랑을 꾸미는 것은, 섹스 상대방의 심리를 기망하는 것이나 다름 없으므로 진정한 동의를 얻어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프리섹스에 규범이 있다고 한다면, 섹스 당사자간에 상호 기만적 행위가 없는 정직한 동의가 최소의 요건이라고 볼 수 있으며, 혼외정사까지 그 영역이 넓혀야 된다면, 자신의 배우자에게도 상호주의를 적용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에서의 프리섹스는 다양한 적들에 둘러싸여 있는 듯하다. 프리섹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주로 전통적 보수주의로부터 흘러나온다.

그러나 공격은 이들에게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도 다른 각도에서 치고 들어오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좌파들에게서도 프리섹스는 뭇매를 맞기도 한다. 그 비판의 적실성 여부들을 다음 주에 검토해보기로 하자.

* 본 기사는 반짝반짝 연애통신(www.yonae.com )에서 제공합니다. 퍼가실 때는 출처를 명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사제휴] 남로당 사상투쟁위원회 리버럴

입력시간 : 2007/05/02 15:5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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