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정담] 사랑과 우정 사이? 'G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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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에 오래전 일이라 그녀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그는 자세히 기억 하지 못한다. 사실 그들의 관계에 있어서 어떻게 만났는가 하는 부분은 어쩌다 친하게 되었냐 보다는 덜 중요한 문제이다.

그와 그녀가 '아주' 친해진 것은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부터인데, 그렇다면 '덜' 친한 사이에서 남녀 단둘이서 어떻게 여행을 갈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에 접하면 그 조차도 혼란스러워한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그와 그녀는 어떤 계기로 서로 알게 되었고 가까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는 친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은 함께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그 여행을 끝마치고 와서 그들은 서로의 인생이 한권의 책이라고 할때 한 페이지 빡빡하게만큼은 의미가 있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남녀의 여행담이라는 것이 다분히 성적인 코드로 읽혀질 것을 예상하면서도 그와 그녀의 이야기를 여행으로 시작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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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에 갈꺼야.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과 선실에서 술을 마실꺼고, 그러다 갑판 위에서 떠오르는 해를 볼꺼다."

당시 그는 평범한 대학생이었고 그녀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가 자신이 짠 계획에 스스로 도취되어 늘어놓은 저 여행 자랑에 그녀가 더욱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난데 없이 자신을 데리고 가달라며 부탁했고, 아주 잠깐의 망설이는 시늉 끝에 그는 선선히 승락했다.

그렇게 떠난 그녀와의 여행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낭만으로 뒤덮여 있었다. 배 위에서 바라본 밤하늘은 아름다왔고, 따가운 초여름의 제주도 햇살도 유쾌했고, 달리는 차 안에서 바라본 구름들은 여지껏 본적 없는 시각적 감동을 안겨주었다. 무엇보다도 곁에서 느껴지는 서로의 체온은 그와 그녀를 훨씬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애초에 삼박 사일로 예정 됐던 여정은 때 맞춰 불어온 태풍에 제주도가 고립되면서 오박 육일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빚어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자체는 낭만성을 더욱 강조하게 해준 요소로 그들의 기억에 남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란 것은, 무의식 중에 정해진 선을 깨고 서로의 품으로 다이빙 할 수 있는 정서적 충분조건이 마련된 상황이었음을 의미한다. 서로에게 호감이 있고, 쑥맥이 아닌 평범한 청춘남녀의 여행에서 이렇게나 완벽하게 분위기까지 받쳐주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당시의 그와 그녀는 이상하게도 그런 맥락에선 한발을 빼고 있었다. 여행 내내 같은 침대에 누워 잠을 잤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모종의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넘으면 혼란스러웠을 선을 넘지 않은 그 스물 두살의 청년과 스무살의 처녀는 성적인 면에서만큼은 비슷한 위치에 서 있었다고 이야기해도 좋을 것 같다.

둘 사이엔 섹스를 해도 괜찮은 사이라는 전제가 아직 성립되어 있지 않았고, 그런 전제 없이 사고를 치진 않을만큼의 분별력 정도는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여행 중에 특히 성적인 모랄 부분에서 그들이 충돌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결국 오박 육일의 여행은 어떤 종류의 선을 넘지 않고 서로의 친밀감만 최대치로 증폭 시킨 채 끝을 맺었다. 그 친밀감은 그 후 그녀와 그가 사귈 뻔 한 관계로 나아갈 추진력을 제공해주었지만, 인연이란 그리 단순한 게 아닌지라 결국 그런 사이는 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사이가 되지 못했던 덕분에 10년쯤 지난 지금까지도 그들은 서로를 친근하게 부르며 만날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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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그 후 남자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그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꽤 큰 연예 매니지먼트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몇명의 여자와 연애를 했고 그러다 한 여자와는 꽤 깊은 사이로 오래 사귀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사랑한 그녀는 소위 리버럴한 부류였으며 그 과정에서 그녀의 '바람끼'라는 것에 의해 상처를 받게 된다. 그녀에게 지치면서 남녀의 사랑이란 것에 시니컬한 태도를 가지게 된 그는, 마침내 그녀와의 그 파괴적이었던 관계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노말한 연애에 대한 염증을 흉터처럼 안게 되었다.

마침 그의 직업은 여자와 술과 돈이 비교적 흔한 독특한 환경을 제공했다. 특히 섹스는 늘 그에게 너무 과해서 문제일만큼 넘쳐나는 종류였다. 처음 보는 여자와 아무 감흥 없이 섹스를 나누기 시작했고, 온갖 매춘의 장르를 섭렵했으며 유부녀와의 불륜도 그에겐 더 이상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시대적 성모랄의 변화와 함께 그는 스리섬, 그룹섹스 등으로 진출하며 그의 성 이력을 다채롭게 만들어갔다. 그의 이런 모습은 그가 함께 하는 무리에선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가 자신의 변화를 자각할 기회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 그동안 그녀는?

그녀는 중간에 회사를 두번 바꿨고, 남자를 한번 바꿨다. 5년을 사귄 애인이 있고, 가끔 부부같은 느낌으로 익숙한 섹스를 나눈다. 주말이면 그 애인이 운영하는 가게로 가서 일을 도와주며 오는 가을엔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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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는 각자 연애에 몰두하던 상황에서도 일년에 두세번 정도는 만나는 사이였다. 여전히 둘은 서로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각자의 삶의 방식의 차이가 그 호감을 능가할만큼의 수준은 아니었던듯 하다.

그러나 내재되어 있던 둘 사이의 차이로 인한 갈등은 어느 술자리를 계기로 결국 표출되고 말았다. 여느 때와 달리 술이 꽤 취한 남자는 평소에 딴 여자를 대하던 관성으로 그녀를 유혹했다.

그녀는 갑자기 그런 그를 낯설어하며 두려워했고, 남자는 그런 그녀의 고지식함을 유치하다고 느꼈다. 그 술자리 이후 그들의 사이는 어색해졌으며 그 후 5년간 서로 먼저 전화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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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을 넘어서면서 그의 불규칙하고 자유분방한 생활이 건강을 해쳐왔음이 증명되었다. 건강 문제로 회사도 잠시 떠나 있으며 요양 아닌 요양을 하던 중, 그는 문득 그녀를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음을 떠올렸다. 갑자기 그녀가 보고 싶어진 그는 근 5년만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 역시 그의 갑작스러운 전화에 놀라면서도 무척 반가와하며 만날 약속을 잡았다.

다행히도 그들의 해후에는 예전 갈등의 그늘은 끼여들지 않았고 오랜만에 그들은 옛추억에 잠기며 서로에 대한 친밀감을 마음껏 나누었다. 서로의 차이에 대해 날을 세우지 않게 된 것은 그들이 더 이상 젊지 않기 때문일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늦게까지 술을 마시던 그와 그녀는 답답한 술집을 빠져나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그것은 10년전 제주도에서 하루종일 걸어 다니던 그 여행을 그들에게 떠올리게 해주었고, 그들은 다시 한번 애틋한 추억에 젖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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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길을 걸으며 잠시 화제가 그녀와 그녀의 현재 애인 얘기로 옮겨갔다. 아무 문제 없느냐는 그의 질문에 그녀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5년을 사귀며 아무 감흥 없이 일상이 되어 버린 연애에 대한 한탄이 잠시 이어졌다. 잠시 뭔가를 망설이던 그녀는 최근에 딴 남자를 만나 '바람 피운적이 있다' 고 그에게 고백했다.

그는 역시 너도 평범한 사람이었구나 하는 쾌감과, 그래도 세상에 너 하나만큼은 그렇게 계속 살아주어도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함께 느꼈다. 그런 심정을 감춘 채 그는 자신의 부정을 지나치게 괴로와하는 그녀를 다독 거려주었다.

그러나 얘기가 길어지면서 그는 대화들이 뭔가 핀트에 안 맞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곧이어 그 어색함의 이유를 깨달았다. 그는 '바람 피우다' 의 의미를 (너무나 당연하게도) 섹스했다, 로 받아 들였는데 그녀는 그것을 '데이트 했다'로 사용한 것이다.

"그럼 안 잔거야?"

그가 저 질문을 던진 순간 오히려 그녀가 난감해 했으며, 그로 인해 그와 그녀는 잊은척 하고 있던 서로의 차이에 대해 다시 한번 크게 자각하고 말았다. 고작 딴 남자와 두세번 데이트를 한것만으로도 그녀는 애인에게 이렇게 거대한 죄책감을 가지며 제자리로 돌아왔고, 그런 모습은 그에겐 일종의 문화쇼크였던 셈이다.

서로 사용하는 어휘의 의미 이상의 어떤 간극을 느낀 그들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리고 그녀의 동네 어귀에 들어설 때까지 그 정적은 이어졌다. 그렇게 동네 입구에서 그와 그녀는 어색한 웃음으로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뭔지 모를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문득 여행 중간의 어느 밤에 대해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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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사흘째 되던 날 그들은 제주 시내로 들어섰다. 짐을 풀고 그녀가 씻는 동안 그는 먹을거리와 상비약 몇개를 사기 위해 모텔을 나섰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길을 잃어버린 그는 거의 한시간을 넘겨서야 간신히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가 방문을 열었을 때 발견한 것은 침대 구석에서 공포에 질린 채 쪼그려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그가 들어서자 그녀는 울음을 터트리며 그의 품에 매달렸다. 그는 그제서야 낯선 도시의 모텔에 혼자 남겨진 어린 여자의 두려움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 미안하다며 다독거리는 그의 한편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절실히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감동도 묻어 있었다.

그 도시에서 서로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던 그들은, 만난 후 처음으로 그 순간 키스를 나누었다. 그리고 서로를 꼭 안은 채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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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녀는 몇달 후면 결혼을 할 것이고, 남편에게 성실하기 위해 그와 저녁 때 만나서 술 마시는 종류의 행동은 더 이상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평소의 바램대로 곧 아이를 낳을 것이고 모범적인 가정을 꾸리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은 그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종류의 욕망들이다. 순간 그는 이 좁은 땅에서 사는 사람들의 스펙트럼의 차이를 다 합치면 한반도 스무배의 크기가 나올 것이라는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어릴 때 그들은 비슷한 생각을 하며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잠들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커버린 어른이 다시 아이가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듯이, 꼭 안고 잠이 들던 그 시절의 그들은 이제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렇게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예전 자신의 흔적을 찾던 그는 이윽고 그 청춘을 떠나보내는 심정으로 그녀에게 작별인사를 보냈다.

그녀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에도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던 그는 이윽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가 간 반대방향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발걸음을 옮기며 대체 얼마나 멀리 온걸까 그는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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