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 '업', '코코' 외 다수 흥행작 캐릭터 개발

의대 졸업 후 애니메이터로 전향

오래 즐겁게 일하는 게 꿈

김재형 애니메이터가 스포츠한국과 만났다. 사진=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스포츠한국 조은애 기자] 영화 '소울'에서 중학교 음악 교사인 조가 바쁜 삶 속에서도 잃지 않은 건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재즈 피아니스트로서의 꿈이었다. '소울'은 이를 '불꽃'이라고 부른다. 삶을 지탱하는 가치, 가슴을 뛰게 하는 일 말이다. 거창한 목표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푸른 하늘, 맛있는 피자 한조각까지도 오늘을 살아갈 이유가 되고 이미 시작된 우리 모두의 삶은 충분히 가치있다. '소울'의 김재형 애니메이터에게도 '불꽃'은 따로 있었다. 의사 가운을 벗고 좋아하는 일을 쫓아 애니메이터가 된 그의 이야기는 '소울'의 메시지와 꼭 들어맞는다.

20일 개봉하는 '소울'은 ‘태어나기 전 세상’에서 저마다의 성격을 갖춘 영혼이 지구에서 태어나게 된다는 픽사의 재미있는 상상력에서 출발한 이야기로, 예기치 못한 사고로 영혼이 된 ‘조’와 지구에 가고 싶지 않은 영혼 ‘22’가 함께 떠나는 특별한 모험을 그린다. 최근 화상 인터뷰를 통해 만난 김재형 애니메이터는 '소울'을 비롯해 '라따뚜이', '업', '토이스토리3', '카3', '인사이드 아웃', '코코', '인크레더블2', '토이스토리4', '온워드' 등 다수 작품의 캐릭터 개발에 참여하며 주목받았다.

"제가 하는 일은 화면 안의 인물, 사물, 동물들의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연기를 시키는 거예요. 예전엔 그림을 그려서 했는데 지금은 인형극처럼 이미 캐릭터들이 만들어져있고 보이지 않는 뼈대가 심어져 있어서 가상으로 캐릭터들의 포즈를 잡고 돌려서 만들어요. 작업은 굉장히 세분화돼있어요. 컴퓨터 화면 속 조명이나 카메라 촬영을 담당하고 배경을 만드는 분들도 따로 있답니다."

'소울'은 뜻밖의 사고로 영혼이 된 조가 새로운 영혼들이 멘토링을 받아 지구에 갈 준비를 하는 '태어나기 전 세상'에 가게 되는 흥미로운 사건으로 시작된다. 그 곳에서 자신의 꿈을 위해 지구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조와 지구에 가기 싫어하는 시니컬한 영혼 22가 만나 동행하게 된다. '소울'을 연출한 피트 닥터 감독은 23년 전 자신의 아들이 태어날 때 떠오른 아이디어를 기점으로 중심 스토리를 구상했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부모와 닮은듯 다른 개성이 존재하는 걸 보면서 '태어나기 전 세상'과 꼬마 영혼들의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감독님은 처음부터 아들 얘기를 자주 하셨어요. 아들이 본인과 성격이 비슷하기도 하고 아내를 닮은 점도 있는데 또 자기만의 뭔가를 갖고 태어난 것 같다고요. 특히 '소울'의 주인공은 40대 중반의 남자고 이미 직장도 있고 노력하는 사람이에요. 그건 자신의 여정을 투영하신 것 같아요. 우연히 영화를 시작했고 좋은 사람들 덕분에 아카데미상도 탔지만 오히려 그 이후에 정말 중요한 게 뭔지 많이 생각하셨다고 해요. 결국 중요한 건 가족이었고 '소울'이 탄생하게 됐죠."

독특한 세계관만큼 주목받은 건 캐릭터 설정이다. '소울'은 40대 흑인 남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최초의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이다. 영화엔 많은 흑인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흑인 문화와 밀접한 재즈가 흐른다. 성별, 인종, 연령 등 많은 분야에서 다양성을 강조하는 디즈니 픽사의 현재와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지점이다. 김재형 애니메이터는 "문화적인 배경의 표현은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고 조심스럽게 작업한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주인공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이기 때문에 그들 특유의 문화적인 부분을 반영하려고 노력했어요. 제스처, 표정이 제대로 보여지지 않으면 진정성이 떨어질 것 같았거든요. 실제로 흑인 백그라운드를 가진 친구들과 상의했고 흑인인 캠프 파워스 공동 감독님의 조언도 많이 참고했어요."

디즈니 픽사의 전매특허인 황홀한 영상미는 이번에도 러닝타임 내내 힘을 발휘한다. 새로운 영혼들이 지구에 가기 전 자신만의 가치관, 성격, 재능을 찾는 공간인 '태어나기 전 세상'은 파스텔 톤의 따뜻하고 환상적인 비주얼로 구현됐다. 반면 뉴욕은 높은 빌딩, 다양한 상점과 군중 등 역동적인 요소들이 가득한 이미지를 선보인다. 다양한 텍스처로 실제 뉴욕의 길거리를 옮겨 놓은 듯한 현실감도 인상적이다.

"제가 처음 작업한 부분은 조의 피아노 오디션 장면이었어요. 피아노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재즈 뮤지션, 음악, 피아노에 대해 많이 공부하고 작업을 시작했어요. 테스트용으로 피아노 애니메이션도 만들어서 감독님께 보여드리기도 했죠. 사실 '소울'의 초기 스토리는 지금보다 좀 더 어렵고 어두웠어요. 계속 수정하면서 희망적인 형태로 바뀌었고, 더욱 단순하고 명료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노력했죠. 개인적으로는 작업 내내 의미가 남달랐던 작품이에요. 살면서 주인공과 비슷한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식으로 살아야 될까' 생각해보는 기회가 됐죠."

'소울'이 김재형 애니메이터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 이유는 남다른 이력 때문일 것이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는 2003년 미국 아카데미 오브 아트 유니버시티(Academy of Art University)에서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고 2006년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인턴으로 근무했다. 이후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등을 거쳐 2008년 픽사에 입사했다. 의사로서 탄탄대로를 달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방향을 튼 이유는 즐거운 일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의대를 졸업하고 병원에서 일하는 건 정해진 순서겠죠. 사실 고등학교 때까지 어떤 일을 하고 싶다는 구체적인 생각이 없었어요. 주변에서 바라기도 했고, 보통 시험을 잘 보면 많이들 선택하니까 의대를 갔어요. 근데 점점 열의가 줄고 만족할 만한 결과도 나오지 않더라고요. 결국 내가 즐거워하는 일이 아니라서 그런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죠. 내가 처음부터 좋아서 선택한 일이라면 오래 즐겁게 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병원을 그만두고 애니메이션이 떠올랐어요. 이전에 취미로 직접 만들어보고 싶어서 휴학하고 잠깐 공부도 했던 분야라 제대로 시작해보기로 마음먹었죠."

안정적인 길을 포기하고 꿈을 쫓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분명 자극이 되지만, 누구나 섣불리 따라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직업과 삶의 방향을 선택하는 일이 단순한 열정만으로는 어렵기 때문이다. 김재형 애니메이터 역시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아무리 좋아서 하는 일이라도 공부하고 직장을 구하기까지의 과정은 다른 사람들처럼 쉽지 않았어요. 가고 싶었던 회사에서 연락이 안 와서 힘들어하기도 했고, 취직 이후엔 생각만큼 결과물이 나오지 않거나 치열한 내부 경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죠. 그래도 평균적으로 즐거웠어요. 처음부터 이쪽 일을 한 건 아니지만, 병원에서 일해본 백그라운드가 도움이 되기도 해요. 이번에도 영화에 병원 장면이 나오면 의견을 많이 냈어요. 실제 병원 상황과 맞지 않는 부분을 정리해서 감독님께 건의하곤 했죠. 애니메이터가 된 걸 후회하진 않아요. 즐겁거든요. 앞으로도 매일 기쁘고 좋은 일만 생기진 않겠지만 즐거운 일인 것 만큼은 분명해요."

인터뷰 말미 그는 한국 관객들을 향한 각별한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특히 '소울'이 코로나19 쇼크에 지친 모두를 끌어안는 작품으로 남길 바란다고 전했다.

"미국에서는 극장이 아예 열지 않아서 '디즈니플러스'라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서 개봉했어요. 덕분에 집에서 온가족이 모여 앉아 '소울'을 보게 됐다고 해요. 깜짝 놀란 부분이에요. 저희는 극장 개봉을 원했지만 오히려 예전보다 더 연령대 높은 분들도, 혹은 더 어린 아이들도 감상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런 식으로 개봉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드릴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죠. 한국의 상황도 빨리 나아져서 많은 분들이 함께 즐기고 잠시나마 힐링이 되는 시간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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