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서 여성 연대 이끄는 자영 역

[스포츠한국 모신정 기자]

배우 고아성을 영화 '괴물'(봉준호 감독)에서 괴물에게 먹이가 돼 끌려간 어린 소녀 현서, '설국열차'의 기차에서 태어난 소녀 요나 역으로만 기억하고 있다면 그가 가진 진가의 절반도 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배우로서 그 누구보다도 인상적인 초기작들을 내놨던 그는 영화 '우아한 거짓말'(이한 감독, 2014), '오피스'(홍원찬 감독, 2015),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홍상수 감독, 2015), '더 킹'(한재림 감독, 2017), '항거: 유관순 이야기'(조민호 감독, 2019)와 드라마 '공부의 신'(2010), '풍문으로 들었소'(2015), '자체발광 오피스'(2017), '라이프 온 마스'(2018) 등을 거치며 충무로와 브라운관을 쉴 새 없이 오가는 20대 대표 배우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 왔다.

어린 나이에 성공한 아역 출신 배우들이 어김없이 겪는 이미지 소모에 따른 캐스팅 난조나 슬럼프도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유명세를 올리며 데뷔했기에 주연 작품만을 고집할 법도 한데 작품 선택을 보면 그때 그때 끌리는 작품을 위주로 주, 조연과 상관 없이 작품의 의의나 시나리오, 함께 하는 인물들의 면면이 기준이 된다는 지점도 엿보인다.

최근 개봉해 10~30대 여성들의 단단한 응원을 받으며 롱런 중인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종필 감독/이하 '삼진그룹')은 여상 출신의 입사 8년차 동기 여직원 이자영(고아성), 정유나(이솜), 심보람(박혜수)가 토익 600점을 넘기면 대리 승진을 시켜주겠다는 회사의 제안에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열공을 하던 중 회사 소속 공장에서 검은 폐수의 유츨을 목격한 자영의 제안으로 유나, 보람 세 사람이 함께 회사의 비리를 캐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그렸다.

'삼진그룹'은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며 사회를 조금씩 변화 시켜왔던 이전 세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꿔 나가는 20대 여성들의 연대를 그렸다. 시대 배경은 1990년대 초반이지만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불합리한 처우들을 각자 자신에 맞는 방법과 장점을 발현해 변화시켜 나가는 모습은 2020년 현재를 살아가는 지금 세대 여성들의 모습이 충분히 투영돼 있다.

'삼진그룹' 속 당찬 이자영만큼이나 인터뷰 현장에서 만난 고아성은 당당했고 에너지로 가득했다. 어떤 일에 앞장 서서 목소리를 높이는 스타일이기보다 밝은 에너지를 전파하며 묵묵히 일을 진행하고 도모해나가는 유형일 것으로 보여졌다. 실제 성격은 굉장히 내성적이지만 평소 즐기는 운동은 스카이 다이빙, 번지 점프 등의 익스트림 스포츠라는 걸 보면 그야말로 팔색조다운 면모도 엿보인다.

"전작 '항거:유관순 이야기' 때와 출연 배우나 스태프의 규모는 비슷했어요. '삼진그룹…'도 30명 정도 되는 인원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영화의 성격에 따라 기운은 많이 달랐죠. '항거 때는 많은 배우들과 함께 하면서 묵직한 구석이 있었다면, '삼진그룹'은 든든한 결속력 같은 게 매번 현장에서 느껴졌어요."

극 중 고아성이 연기한 자영은 생산관리3부에서 남자 상사들의 구두 심부름부터 커피 타기, 전화 응대, 서류 정리 등 갖은 잡무를 도맡아 하고 있지만, 실제 부서의 돌아가는 상황은 누구보다 완벽히 파악하고 있는 실무 능력의 달인이다. 어느 날 폐수 유출 사건을 목격한 후 동료들과 회사의 은폐 의혹을 파헤치는 싸움을 시작하고 연대의 네트워크를 리드해 가는 캐릭터다.

"자영 뿐만 아니라 세 캐릭터가 뚜렷한 개성이 있었죠. 저는 오지랖이 크고 이솜 언니가 맡은 유나는 성격이 세 보이지만 할 말 하는 성격이라면 혜수가 맡은 보람은 수학 천재죠. 이렇게 개별적 캐릭터로서 존재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제 입장에서는 실제 사건의 진위를 밝히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게 더 중요했어요. 페놀 유출을 목격하고 내부 고발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사건의 큰 틀을 끌고 가야 했기에 개성이 두드러지게 하기 보다 자영이 사건과 함께 가도록 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자영이 피해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고 끊임 없이 친구들과 함께 하는데에는 그의 이타심이 중요했죠."

극 중 자영이 이타심이 크고 이것 저것 관심 가지는 것이 많은 오지랖도 큰 여성이라면 실제 고아성은 내성적이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먼저 다가가지 못하는 편이라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삼진그룹'을 촬영하면서 실제 성격이 서서히 외향적으로 변해 갔다.

"사람을 좋아하고 친하게 지내기도 하지만 사람들을 리드하는 성격은 아니었어요. 누군가에게 먼저 만나자고 말 건네거나 현장에서 먼저 다가가지도 못했고요. 자영을 연기하며 많이 변했죠. 이 역할을 해내려면 변해야만 했어요. 이솜 언니와 박혜수 도움도 많이 받았죠. 주로 지방 촬영을 했기에 숙소가 배정이 되는데 처음엔 방을 다 각자 썼었죠. 그런데 촬영 끝나고 다 같이 제 방에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다 같이 잠들곤 했거든요. 나중에 PD님이 방을 그냥 하나로 합쳐 주셨죠. 박혜수는 영화 '스윙키즈'와 드라마 '청춘시대'를 보고 너무 좋아했었죠. 연기는 매 순간의 선택이기에 어떤 사람인지 여실히 드러나는데 제가 연기할 때 가장 자신 없는 지점도 그거고요. 그런데 혜수는 연기를 보면 굉장히 멋있는 사람이에요. 역할의 흐름이 매순간 선택하는 것이 담백하고 표현이 멋있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함께 하게 돼서 너무 좋았죠. "

'삼진그룹' 속 고졸 출신 여사원들의 하루 일과는 깨끗하게 닦여 있는 구두를 남자 선배들의 책상 밑으로 가지런히 열맞춰 놓아주고, 이들의 각자 취향에 맞게 커피를 타서 한 잔씩 대령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들 중 하나가 혹시 내 출세길을 막을까 쌍심지를 켜고 남자 상사와의 불순한 루머를 만들어내려는 대졸 출신 여사원도 존재한다. 을 중의 을인 그녀들의 연대를 연기해나간 고아성이 가장 인상 깊게 간직한 장면은 무엇이었을까.

"저희 영화가 시대극이어서 공간이 주는 영향이 컸어요. 삼진그룹은 95년 당시 국내 최고 기업으로 설정돼 있었고 옛날식 인테리어이긴 했지만 정말 크고 으리으리한 구조와 화려한 장식들로 꾸며져 있었거든요. 촬영장에 가면 압도됐죠. 엔딩 장면을 찍을 때 출근 길에 수많은 인파들과 함께 걸어 나오잖아요. 그 장면은 정말 벅차 오르는 느낌을 받으며 찍었어요. 서울대 연구소엘 자영이가 찾아가는 장면에서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캠퍼스에서 자영이가 '나는 정말 작은 사람이구나'를 느끼잖아요. '나는 아무것도 할수 없겠구나'라고. 고졸 출신 여직원들의 책상에 복도 한 구석에 있는 장면도 참 기억나죠. '나도 진짜 내 일 하고 싶다'라는 대사가 있잖아요. 그런 자영이가 진짜 '내 일'을 해냈을 때 개인적으로 통쾌한 부분도 있었어요."

10대 시절 출연했던 '괴물'과 '설국열차'의 아우라가 너무 컸기에 여전히 그녀를 20대 초반의 나이로 생각하는 대중들이 많지만 어느덧 20대 후반의 나이에 접어 들었다. 그만큼 작품의 편수와 배우로서의 경력이 쌓여 왔다는 이야기다. 극 중 자영이 굴곡 있는 시간을 보내며 성장했던 것처럼 그에게도 슬럼프를 겪은 시기들이 존재했는지 궁금했다.

"'특히 어떤 때 힘들었다'고는 이야기 드리기는 어려워요. 제 개인적 이야기를 잘 못하는 스타일이기도 하고요. 그냥 제가 바라보고 제가 담고 있는 세상을 작품에 많이 녹이려 하고 있어요. 그게 제 본분이라고 생각해요. 이번 작품을 보시고 저한테 을의 위치에 서 본 적이 있냐고 많이들 물으시는데 배우는 영화 계약할 때 을도 아닌 병이에요. 저는 배우가 직급이 없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시간순으로 경력은 정해지지만 볼링이 아마추어가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스포츠인 것처럼 연기 또한 한 순간의 작은 판단으로 결과가 바뀔 수도 있는 일이죠. 제가 어떤 작품을 잘 했어도 다음에 또 바로 잘한다는 보장도 없고요. 그때 그때 작품에 맞게 연구하면서 녹아드는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고아성은 '삼진그룹'이 밝은 영화를 하고 싶었던 시기에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꿔 준 선물 같은 작품이라고 기억했다. 이번 영화에서 관객들에게 가장 즐거움을 안긴 '어제의 너보다 오늘 더 성장했다'는 대사처럼 스스로 성장한 지점도 되짚어 봤다.

"자영이가 '제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에서의 일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말하잖아요. 제가 연기를 잘 하려고 하는 목적 또한 이걸 봐주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해서인 것 같아요. 제 사적인 측면에서는 익스트림 스포츠를 꽤 좋아해요. 번지점프나 스카이다이빙도 해봤고 최근 '바닷길 선발대'에서 요트 운전도 해봤는데요. 비행기 운전을 꼭 배워보고 싶어요. 그렇게 어제의 나보다 더 성장하고 싶습니다."(웃음)

저작권자 © 스포츠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