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진그룹 영어토익반'서 정유나 캐릭터 열연

90년대 스타일링 위해 동묘시장, 엄마 앨범 참고

고아성·박혜수와 진한 우정 쌓기도

배우 이솜이 스포츠한국과 만났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스포츠한국 조은애 기자] 1995년, 삼진그룹 입사 8년차 동기인 말단 여직원들이 영어토익반에 모였다. 실무 능력은 웬만한 대졸 대리보다 빠삭하지만 상고 출신인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커피타기, 담배 사오기, 가짜 영수증 메꾸기가 전부다. 하지만 드디어 도래한 국제화 시대, 토익 600점만 넘기면 고졸 사원도 대리가 될 수 있단다. 대리가 되면 진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회사와 '맞짱'도 떠야 한다. 해고의 위험을 무릅쓴 이들의 고군분투는 성공할 수 있을까.

오는 10월 21일 개봉하는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감독 이종필)은 1990년대, 모 대기업에서 실제로 개설했던 고졸 사원들을 위한 토익반과, 시기는 다르지만 실제로 있었던 폐수 유출 사건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출발한다. 어느 날 잔심부름을 하러 간 공장에서 검은 폐수가 유출되는 광경을 목격한 자영(고아성)은 유나(이솜), 보람(박혜수) 등 토익반 친구들과 함께 회사의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90년대 배경이라 재밌을 것 같았고 또래 여배우들이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무엇보다 시나리오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감독님이었죠. 예전에 '푸른 소금'에 같이 출연한 적 있는데 유나 캐릭터를 저를 염두에 두고 쓰셨다고 해요. 연기를 하셨던 감독님이라 디렉팅도 섬세하셨고 더 자유로운 소통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배우 이솜이 연기한 정유나는 삼진전자 마케팅부 사원으로 까칠하고 냉철한 성격의 소유자다. 고졸 사원들을 대상으로 대리 진급을 내걸고 회사에서 개설한 토익반 공고에도 정리해고를 하려는 수작이라며 자영의 부푼 꿈에 초를 친다. 똑부러지는 성격만큼 업무 능력도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디어는 대졸 대리에게 뺏기기 일쑤고, 할 수 있는 건 부서원들의 간식을 챙기는 보조 업무뿐이다.

"유나가 겉으로는 힘 빠지는 소리도 많이 하고 강한 척, 센 척도 많이 하니까 처음엔 '얜 도대체 왜 이럴까' 고민했죠. 그러다 '인정욕'을 넣으면 좋겠다 싶었죠. 그제서야 유나가 좀 사람다워지고 친근해지더라고요. 강한 척을 하다가도 선배, 상사랑 있을 때는 긴장도 하고 좀 다른 톤이 자연스럽게 나왔어요. 화면에 다 보이진 않더라도 유나의 정서적인 면을 최대한 담아보고 싶었죠."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유나의 90년대 패션 스타일링이다. IMF 구제 금융 한파가 몰아치기 직전의 1990년대는 특유의 희망적이고 활기찬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감돌던 시기였다. 사람들은 개성과 개인주의를 추구하기 시작했고 젊은이들은 'X세대'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멋과 자유를 만끽했다. 이솜은 모델 출신다운 늘씬한 체형의 장점을 한껏 살려 하이힐, 롱부츠, 미니스커트, 파워 숄더 정장 등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한편 갈매기 눈썹, 블루블랙 헤어, 밍크브라운 립스틱으로 90년대에서 튀어나온 듯 생생한 비주얼을 완성했다.

"유나는 세 인물 중에 90년대 스타일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캐릭터라고 생각했어요. 그 시절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오? 잘 했네?' 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게 제대로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더 과감하게 했죠. 특히 눈썹은 산만 남기고 밑부분은 전부 뽑아버렸어요. 지금도 잘 안 나요. 머리도 블루블랙 컬러로 염색하고 삼각김밥 모양이라 그땐 일상생활이 좀 어려웠어요.(웃음)"

이솜은 현실감을 더하기 위해 직접 발로 뛰기도 했다. 의상팀과 함께 동묘시장을 찾아가 옷을 구매하기도 했고 자료 영상이나 어머니의 젊은 시절이 담긴 앨범을 꼼꼼히 뒤져 당시 트렌드를 익히기도 했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가 90년생이라 10살 때까지가 90년대 기억의 전부거든요. 그래서 엄마의 앨범을 많이 참고했어요. 굉장히 멋쟁이셨더라고요. 블랙 목폴라에 볼드한 목걸이, 가죽치마 같은 것들은 지금 봐도 너무 예쁜 거예요. 유나가 가상의 인물이긴 하지만 엄마의 모습을 담아보고 싶었어요. 나중에 모니터해보니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들더라고요. 무엇보다 을지로, 충무로를 다같이 걸으면서 출근하는 장면에서는 진짜 그 시대에 있는 것 같았어요. 소품, 의상, 미술팀이 워낙 디테일하게 배경을 만들어주신 덕분이고요. 모델 일을 해봐서 그런지 스타일을 보여주는 것엔 겁이 없어요. 그런 장점을 이번에 잘 써먹은 것 같아요."

영화 속에서 삼총사로 함께 호흡을 맞춘 배우 고아성, 박혜수와는 촬영 현장에서 합숙까지 자처하면서 카메라 밖에서도 남다른 우정을 쌓았다고. 이솜은 셋 중 맏언니인데도 오히려 둘에게 많이 의지했다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고)아성 씨는 평소에도 좋아하는 배우였어요.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다고만 생각했는데 여리고 사랑스러운 면이 있더라고요. (박)혜수 씨는 '스윙키즈'에서 처음 봤는데 되게 인상적이었어요. 제일 돋보였거든요. 주변을 잘 챙기는 매력도 있고요. 제가 많이 의지했죠. 어떻게 다가갈지 고민했는데 동료라고 생각하니까 금세 편안해졌죠. 현장에서는 연기 얘기만 나누니까 늘 아쉽더라고요. 그래서 촬영 끝나고 방에서 모여서 얘기하곤 했어요.(웃음) 주로 '뭐 먹고 싶다', '예쁘게 입고 놀러가고 싶다' 그런 사소한 얘기를 나눴던 것 같아요. 성게알 파스타도 해먹었어요.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웠어요."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고졸 사원들의 비애와 페놀 유출, 내부 고발 등 가볍지 않은 주제들이 등장하지만 영화는 심각하게 사건을 풀어가는 대신 드라마의 경쾌한 흐름을 충실히 가져간다. 또 섬세한 터치로 당시 청춘들의 삶과 고민을 엿보게 한다. 지난 2008년 모델로 데뷔해 '맛있는 인생'(2010), '하이힐'(2013), '마담뺑덕'(2014), '좋아해줘'(2015), '그래, 가족'(2016), '소공녀'(2017), '나의 특별한 형제'(2018) 등을 통해 꾸준히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이솜은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한 편이라 유나의 고충을 이해했다"며 캐릭터에 남다른 애착을 드러냈다.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모델 일을 했어요. 또래들처럼 대학에 가진 않았지만 제 일을 먼저 시작했고 사회에 먼저 나온 게 만족스러워요. 콤플렉스도 없고요. 유나도 아마 고졸 콤플렉스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게 힘들었을 거예요. 똑똑하고 일을 사랑하는데 사회 초년생이고 지위가 높지 않다는 게 유일한 단점인 거죠. 저도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런 고충을 알 것 같았어요. 이번 영화를 촬영하면서 90년대에도, 지금 우리도, 어렵지만 굉장히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2020년은 코로나19 때문에 힘든 시기로 기억될 수 있겠지만 10년 뒤에 돌이켜봤을 때 '그래도 우리 모두 열심히 살았고 잘 이겨냈어!'라고 추억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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