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도 없이'서 범죄 조직의 청소부 태인 역 열연

대사 없는 캐릭터, 체중 15kg 증량으로 과감한 도전

도발적이고 신선한 자극에 끌려

배우 유아인이 스포츠한국과 만났다. 사진=UAA
[스포츠한국 조은애 기자] 알록달록한 파스텔톤 배경 위로 살인, 유괴 등 비정한 소재들이 등장하는데 예상치 못한 순간 창백한 유머가 터진다. 가벼운 블랙코미디 같지만 툭툭 삶의 정곡을 찌른다. 이 신선한 수수께끼 같은 영화의 중심엔 배우 유아인이 있다. 대사 없는 캐릭터, 15kg 체중 증량, 삭발까지. 데뷔 이후 가장 낯선 얼굴로 돌아온 그를 만났다.

15일 개봉한 '소리도 없이'는 단편 '서식지'(2017)로 주목받았던 홍의정 감독의 첫 장편 영화다. 유아인은 범죄 조직의 조용한 청소부, 태인을 연기했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저도 선입견이 있어서 훨씬 어두운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어둡고 지독한 이야기를 의외의 톤으로 다뤄요. 그런 대비가 좋았어요. 아무래도 비교적 어린 나이에 유명 감독님들과 작업을 많이 했는데 어떤 시점부터 정형화된 이미지가 생기면서 제 몸이 조금 다르게 쓰일 수 있는 현장에 대한 갈증이 있었어요. 도발적이고 신선한 자극을 주는 작품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소리도 없이'가 정확하게 그 점에 부합했죠."

유아인이 연기한 태인은 묵묵히 범죄 조직의 뒷처리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인물. 어떤 이유에서인지 말을 하지 않는다. 평소처럼 성실하게 일하던 어느 날 어쩌다 맡은 의뢰로 계획에도 없던 유괴범이 되면서 그의 평온한 일상은 송두리째 흔들린다.

"태인은 표현을 거부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표현의 무의미함,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표현, 어떤 표현으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은 인간이라면 이렇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평범한 사람도 때론 표현의 무의미함을 느낄 때가 있잖아요. 저 역시도 비교적 많은 표현을 하며 살아가지만 알 수 없는 의심이 있기 때문에 그 표현이 충분히 가치 있는가, 예의만 있고 공허하진 않은가, 누군가를 만나고 집에가는데 연극만 하고 돌아가는 것 같은, 테이블 위 말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거든요. 그런 지점들을 포착해서 극대화한 인물이 바로 태인이에요."

사진=(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캐릭터를 표현하는 도구로서 직접적인 대사 한 마디보다 쉽고 간편한 것은 없다. 이에 대사가 없는 캐릭터는 배우들에게 부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 속 유아인은 그런 것쯤 문제없다는 듯, 눈빛과 몸만으로 태인의 모든 것을 거뜬하게 담아냈다. 목소리 한번 내지 않고도 인물 내면의 굴곡과 감정의 파고를 섬세하게 전달하면서 기분 좋은 충격을 선사한다.

"말이 만들어내는 인간성이 있잖아요. 말을 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내려놨을 때 좀 더 동물적이고 감각적으로 놓여지는 느낌이 새로웠어요. 대사도 없고 소리도 없어서 표현에 대한 강박을 떨쳐내고 내면의 눈을 뜬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웃음) 이렇게 특별한 설정이 필요없는 인물을 연기할 때 편안해요. 나와 공간 사이의 차이가 줄어드는 느낌이거든요. 물리적인 것이지만 현장에서 메이크업을 받는 순간부터 달라지는 태도나 마음가짐이 있어요. 그런 걸 안 하니까 자연스럽고 편안했어요. 실제로 '소리도 없이' 이후로 메이크업을 안 하고 있어요. 꼭 필요한 분장이 아니라면 자연스러운 상태가 가장 좋은 것 같아요."

'말'이라는 커다란 표현 수단 하나가 사라진 만큼, 태인의 외형은 더욱 세심한 가공이 필요했다. 이에 유아인은 체중을 무려 15kg 증량하고 삭발, 노메이크업을 감행해 한층 둔탁한 몸짓과 펑퍼짐해진 얼굴로 캐릭터의 힘을 더했다.

"원래 밥을 반공기밖에 안 먹는데 하루에 최소한 4끼를 1공기 꽉 채워서 먹기 시작했어요. 치킨, 아이스크림...촬영 내내 욕망에 충실하게 살았죠.(웃음) 사실 감독님은 좀 더 크고 위압감 있는 몸을 원하시긴 했는데 '살크업'한 체중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던데요. 외모 변화는 해볼만한 시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비교적 소비된 배우라 전사들을 지우고 싶기도 했고 저항감도 있었어요. 이런 설정의 남자주인공들이 천편일률적인 부분이 있잖아요. 그냥 마르고 불쌍하고 그런 접근은 옛스럽지 않나 싶어서 오히려 반대로 생각해봤죠. 잘 다듬은 조각 같은 몸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붓고 찌고 관리되지 않은 몸이요. 하지만 성격상 집에서 팔굽혀펴기 정도는 하는 사람. 좀 세보이고 싶어하는 사람. 그런 심리가 작동하는 인물로 설정했어요."

사진=UAA
여타 범죄물과 차별화되는 이 영화의 아이러니는 범죄에 협조하며 살아가지만 나름 평온한 일상을 영위하던 태인과 창복(유재명)이 진짜 범죄자가 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두 사람은 객관적인 도덕적 기준보다 자신들이 처한 생존 조건에서 각자의 기준으로 성실한 일상을 살고, 그 조건에서 변화를 선택한다. 결국 '소리도 없이'는 선과 악, 옳고 그름을 규정하기 힘든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수많은 판단과 선택을 떠올리게 하고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이 과정에서 영화 전반을 뒤덮는 불편한 소재의 무게가 결코 가볍진 않지만, 유아인은 "안정적인 선택보다는 좀 다른 기대를 키울 수 있는 영화였다. 대중들이 내게 기대하고 궁금해하는만큼 스스로 지루하지 않은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제가 (대중들에게) 어떻게 인식되는지 함부로 판단하긴 어렵지만, 거기엔 제 배역들이 만든 이미지도 있을테고 유명작들이 형성한 이미지도 있을 수 있겠죠. 단 몇개의 작품으로 만들어진 강한 이미지가 있는 것 같았고 그걸 배신한다기보다 뭔가 고정화되거나 정체되는 것을 벗어나서 좀 더 입체적으로 제 이미지를 만들어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요즘 계속 전에 해보지 않았던 시도들을 하려고 해요. 예능도 비슷한 경우고요. 최근에 MBC '나혼자산다'에 출연한 이후로 친구들이 이제 '나혼산'이 제 대표작이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조금 더 편하게 대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졌어요. 저는 이전 세대의 배우분들과 다른 형태로 소통하고 유대를 가져가고픈 욕망이 있어요. 아주 성공적이진 않더라도 끊임없이 그런 시도를 이어가려고 해요. 그렇지 않으면 태인이랑 똑같아질 것 같아서요. 표현이나 소통의 의지가 사라질 거예요. 잘 모르니까 알고 싶고 사랑한다는 말이 공허하게 느껴져서 더 채워보고 싶고 더 얘기하고 싶고, 그래서 더 나를 보여주고 싶고 그런 의지가 매순간 있어요."

사진=UAA
'소리도 없이'는 6월 개봉한 '#살아있다'(감독 조일형)에 이어 유아인이 올해 두 번째로 선보이는 영화다. 코로나19 여파로 고사 상태에 빠진 영화계에서 꾸준히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고 있는 그는 요즘 넷플릭스 오리지널 '지옥'(감독 연상호) 촬영에 한창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로 분명 영화 시장은 변했고 지금도 계속 변하고 있다. 어떤 영화들은 극장 개봉 대신 넷플릭스를 선택했고 개봉일을 무기한 연기했으며 제작이 무산되기도 했다. 유아인은 "이런 상황이 만들어낼 수 있는 다른 힘이 뭔지 찾아봐야 한다. 더 좋은 영화가 나올 수도 있는 기회"라고 강조했다.

"코로나19 여파로 극장 관객은 줄었지만 넷플릭스처럼 또 다른 무대가 생겨나기도 해요. 이제 '옛 것이 좋아, 새로운 건 싫어'라고만 하기엔 어렵죠. 새로운 현상을 받아들이고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 내 일을 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봐요. 외려 배우들이 설 자리는 더 많아지고 있단 생각도 들어요. 물론 대중들이 스스로의 얼굴보다 배우들을 쳐다보는 시간이 많아지는 게 무조건 좋은 거라고 판단하기엔 어렵기도 하지만, 우린 그런 아이러니 속에서 살 수밖에 없고 그래서 '소리도 없이'가 좋은 것 같아요. 명확성을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뭔가 판단하고 단정하는 습성을 상쇄시키는 힘을 주는 영화거든요. 어떤 것도 명확하지 않다는 게 가장 명확한 사실이잖아요. 규정하고 판단하는 걸 좋아하는 우리가 범하는 오류를 모호하면서도 명확하게 짚어내고 그래서 불명확한 지점을 더 명확하게 가리키는 매력, 그게 '소리도 없이'의 힘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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