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냉혹한 레이 열연

타투, 셔츠부터 커피 소품까지 직접 아이디어 내기도

'신세계' 이후 재회한 황정민, 액션 합 최고

배우 이정재가 스포츠한국과 만났다. 사진=CJ엔터테인먼트
[스포츠한국 조은애 기자]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묻더군요. '레이는 왜 구원받고 싶어하느냐'고요. 근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레이는 타깃으로 정한 사람을 죽여서 구원해주려고 하는 거예요. 이상한 사고에 빠진 캐릭터죠."

올 여름 텐트폴 빅3 마지막 주자인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감독 홍원찬)가 5일 개봉했다. 영화는 마지막 청부살인 미션 때문에 새로운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남자와 그를 쫓는 무자비한 추격자의 처절한 추격과 사투를 그린 작품으로, '황해', '추격자' 등을 각색하고 '오피스'를 연출한 홍원찬 감독의 신작이다. 배우 이정재는 무자비한 추격자 레이를 연기했다.

"레이는 지금까지 연기했던 인물 중 가장 어려웠던 캐릭터였어요. 어떤 인물을 표현할 때 '난 이런 사람이야'라고 대사를 하는 게 가장 쉬운데 설명이 없어서 느낌으로만 표현해야 했거든요. 시나리오 상에도 레이의 디테일한 설정은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오히려 '얘는 뭐지?', '어떤 동력으로 이렇게 달려가는 거지?'라는 의문이 흥미로운 미스터리로 다가왔어요. 이 캐릭터를 잘 표현하면 관객들 각자의 상상으로 레이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도 있었죠."

레이는 한번 정한 타깃은 절대 놓치지 않는 추격자다. 그는 자신의 형제가 인남(황정민)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무자비한 복수를 계획한다. 그렇게 인남의 흔적을 찾던 레이는 태국까지 쫓아가 집요한 추격에 나선다.

"처음 보는 듯한 모호한 인물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쟤는 도대체 왜 저래?'라는 생각이 드는 캐릭터요. 레이가 이상하고 독특한 사고에 빠진 인물이라는 건 여러 대사를 통해 드러나요. '난 너와 연관된 모든 인간을 죽일거야', '모두 네가 자초한 거야' 같은 대사들이 레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죠. 사람을 죽이면서 이상한 이유를 갖다 붙이고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이 레이 그 자체였어요."

이정재는 의상부터 말투, 걸음걸이, 눈빛, 스타일 하나까지 모든 부분을 치열하게 분석해 한국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캐릭터를 만들어내고자 했다. 목을 뒤덮은 타투, 화려한 실크 셔츠, 무심하게 들고 다니는 커피 등 이정재의 아이디어를 반영한 섬세한 설정들은 독특한 악역의 탄생을 알렸다. 특히 형의 장례식장에 흰색 롱코트를 입고 나타난 레이의 첫 등장신은 '관상' 수양대군의 등장을 뛰어넘는 임팩트를 자랑한다.

사진=CJ엔터테인먼트
"장례식장 장면은 굉장히 중요했어요. 레이를 설명하는 장면이 없기 때문에 첫인상만으로 '저런 놈이라면 뭔가 일을 내겠구나' 싶은 느낌을 심어줘야 했거든요. 레이는 형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 사냥감을 지목할 명분을 찾으러 장례식에 간 게 아닐까 싶어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인물이니까 검은색 상복 대신 평소에 즐겨 입는 옷을 입었을 것 같았고요, 장례식장에서도 그냥 터벅터벅 걸어가서 '죽었구나'하는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나오는 게 가장 레이와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소품도 중요했어요. 레이가 계속 들고 다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연출부에 직접 요청했어요. 모든 게 일상인 것처럼 보이고 싶었거든요. 그런 설정에서 레이의 독특한 세계관을 읽는다면 그가 인남을 집요하게 쫓는 이유도 자연스럽게 이해되지 않을까 생각했죠."

특히 '신세계'(2013) 이후 7년 만에 재회한 황정민과의 호흡은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으기에 충분했다. 작품 전체를 압도하는 두 캐릭터의 혈투와 현실감 넘치는 액션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가 띄운 승부수다. 이정재는 "반백살 씩 먹은 사람들끼리 할 일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완벽한 합이었다"며 웃어보였다.

"'신세계' 때부터 호흡이 잘 맞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걱정은 없었어요. 서로 직접 타격하는 것처럼 찍어보자고 했어요. '직접 타격'이 영화의 콘셉트가 돼도 좋을 것 같았거든요. 촬영할 때는 여러 대의 카메라를 활용해 한 테이크로 처음부터 끝까지 찍어서 리얼함을 살렸어요. (황정민과) 첫 결투 장면은 합이 많아서 2주를 연습했죠. 너무 더워서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줄줄 흘렀어요. 부상도 있었어요. 촬영하다 왼쪽 어깨가 파열돼 태국 현지 병원에 갔는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다 찍고 수술하려고 나머지 분량은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촬영했는데 지금은 또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촬영 중이라 수술을 좀 더 미룬 상태에요. 나이 먹어도 효과적으로 액션을 찍을 수 있는 방법이 나오면 좋을텐데(웃음)"

이정재, 황정민의 완벽한 시너지가 영화의 맥을 이끌었다면, 제작진은 뛰어난 연출 내공으로 이들의 호흡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추격 장르에 특화된 홍원찬 감독을 필두로 '기생충', '곡성', '설국열차' 등 걸출한 작품에 참여했던 홍경표 촬영감독이 태국, 일본 등 이국적인 풍광을 배경으로 색다른 이미지를 구현했다. 스크린을 뚫고 나오는 방콕 시내의 열기 속 시가지 폭발, 카체이싱 등 분위기에 규모감까지 더한 장면들이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만의 독창적인 색깔을 만들어냈다.

"감독님들이 정말 천재적인 감각이 있으신 분들이라 놀랄 때가 많았어요. 영화를 보면 레이와 인남의 싸움을 관조적으로 지켜보는듯하다가 갑자기 막 핏방울이 나한테 튈 것처럼 생동감이 느껴지기도 하잖아요. 인물이 아닌 호흡을 찍는 듯한 샷들을 보면서 정말 귀신같다고 느꼈어요. 그 덕에 레이와 인남 캐릭터도 더 강렬하게 돋보일 수 있었고요."

사진=CJ엔터테인먼트
올해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로 다시 한번 건재함을 과시한 이정재는 '신과 함께' 시리즈, '암살', '도둑들' 등 4번의 천만 관객을 동원한 작품부터 '사바하', '신세계' 등 완성도 높은 장르 영화까지 탄탄한 연기력으로 흥행을 이끌며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갖춘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그런 그가 최근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데뷔 28년 만에 첫 연출작인 영화 ‘헌트’(가제)를 선보이는 것이다.

'헌트'(가제)는 안기부 에이스 요원 박평호와 김정도가 남파 간첩 총책임자를 쫓으며 거대한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 첩보 액션 드라마로, 4년 간 시나리오를 집필한 이정재가 연출과 출연을 맡아 2021년 촬영을 앞두고 있다. 연출자로서 그가 보여줄 또 다른 저력에 영화계의 기대가 쏠려 있다. 이정재는 “영화인으로서 욕심이 생겼다”며 남다른 열정을 드러냈다.

“예전에 ‘도둑들’ 촬영 때 홍콩에서 임달화 선배님, 영화 ‘소년시절의 너’를 만든 증국상 감독님과 가끔 맥주 한잔씩 하곤 했어요. 그때 임달화 선배님이 ‘지난달엔 친구 영화를 프로듀싱했고, 이번엔 내 영화를 연출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뭔가에 세게 맞은 기분이었어요. ‘이 분들은 배우, 감독, 제작자 이런 타이틀을 넘어 그냥 영화인이구나!’ 싶었거든요. 사실 저희 세대에는 다른 영역까지 하면 ‘네 본업이나 잘하라’면서 비판적으로 보는 시선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좀 주저했는데 임달화 선배님을 보면서 ‘좋은 영화가 있다면 어떤 파트에서 일을 하든 참여하면 되는 것 아닌가’ 싶었어요. 그 이후로 아이디어가 생기면 적기 시작했고 꾸준히 시나리오를 써보다가 연출을 결심한 작품이 ‘헌트’입니다. 배우가 연출하면서 크게 성공한 케이스가 흔하진 않지만 열정을 갖고 준비 중이에요.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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