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인생 33년차에 '사라진 시간'으로 감독 데뷔

묘하고 이상한 스토리, 주연 조진웅에 감사

50세 넘어 이룬 연출 꿈, 도전하는 예술가 되고파

정진영 감독이 스포츠한국과 만났다.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스포츠한국 조은애 기자] "누군가 '사라진 시간'의 장르를 물어보면 슬픈 코미디로 얘기하고 싶어요. 이건 미스터리일 수는 없어요. 미스터리는 마지막에 답이 다 맞아야 하는데 그런 걸 의도하진 않았거든요. 우리 영화는 답을 안 주는 얘기입니다. 형구의 시간이 왜 바뀌었는지를 찾는 게 아니라 그걸 수사하려다가 화를 내다가 점차 적응하는 얘기죠. 어딘가에 적응하는 약한 인간의 슬픔과 외로움이요. 그런 면에서 '사라진 시간'은 오히려 슬픈 코미디라고 보는 게 나을 겁니다."

33년차의 배우 정진영이 신인감독으로 돌아왔다. 그의 감독 데뷔작 '사라진 시간'은 의문의 화재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가 자신이 믿었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충격적인 상황과 마주하면서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선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삶의 정체성'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의식을 독특한 화법으로 풀어내 장르를 규정할 수 없는 마성의 작품, 기존 상업영화의 문법을 탈피한 대작이라는 호평을 받고 있다.

"이 영화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에요. 타인이 바라보는 나, 그 속에 벌어지는 갈등, 그건 계속되는 질문인 것 같아요. 나를 향해 다가가고, 내가 가장 행복한 길을 찾는 것, 진짜 나를 위해 선택하는 삶. 근데 실제로 그게 잘 안 되죠. 저도 평생 생각하는 것들이에요. '나는 뭐지?' 그런 질문들이요. 영화 속엔 제 직·간접적인 경험들이 다 섞여있어요."

'사라진 시간'은 주인공 형구(조진웅)가 자신의 삶을 추적하는 예측불허의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내며 영화적인 재미를 전하는 한편, 각자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깊이 있는 주제 의식을 통해 신선한 충격을 안긴다. 무엇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배경과 공간, 소품들은 상당히 상징적인데 그 중에서도 오프닝부터 시선을 사로잡는 외지인 부부의 집은 독특한 분위기로 묘한 감상을 안긴다. 정 감독은 "제작부에서 한 100군데 알아본 뒤에 선택한 집"이라며 남다른 애착을 드러냈다.

"상징적으로 보자면 집은 우주 같은 거예요. 우리 영화엔 복잡한 공간이 없어요. 집, 학교가 끝이죠. 집 안에서 주요 인물들이 반복해서 살고요. 중요한 공간이라 헌팅이 중요했어요. 심지어 우리 예산으로는 집 뒤 나무, 산을 세팅할 수가 없었거든요. 이미 그런 배경이 갖춰진 집을 찾아야했어요. 다행히 여러 집을 돌아본 뒤에 가장 처음으로 봤던 집을 선택하게 됐어요. 사실 실제로 보면 좋은 집인데 일부러 아름답게 찍지 않았어요. 그럼 전원드라마가 되거든요. 처음엔 인물 중심으로 앵글도 좀 답답하게 가다가 조금씩 넓어지도록 촬영했습니다."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배우들의 열연은 '사라진 시간'의 큰 축이다. 극의 시작을 여는 배우 배수빈, 차수연부터 조진웅, 정해균, 장원영, 신동미, 이선빈 등이 빈틈 없는 연기력으로 '사라진 시간'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완성했다. 영화 초반 기묘한 분위기에서 코미디와 스릴러로 변주하는 스토리라인은 배우들의 탄탄한 호연이 받쳐준 덕분에 신선한 화법으로 관객에게 닿을 수 있었다.

"앞에 외지인 부부의 시간과 형구의 시간은 다르게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뒤에서 형구가 활약하면 부부를 까먹을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이들의 대사는 연극적으로 좀 낯설게, 멜로 대사도 약간 옛날 영화처럼 썼어요. 반면에 마을 주민들의 톤은 코미디죠. 재밌게 이야기를 타고 가다가 마지막에 주제를 주기로 작정해서 아주 재밌게 하고 싶었어요. 연극배우들을 캐스팅했어요. 실제로 촬영지에 사는 베트남 이주여성도 나와요. 주민들은 굉장히 낯설어야 하니까 몇몇 배우 빼고는 다 처음 보는 배우들을 섭외했죠."

특히 조진웅은 정 감독이 시나리오 구상을 시작할 때부터 주인공으로 상상했을만큼 형구 캐릭터에 최적화된 0순위 배우였다. 초고를 읽자마자 출연을 결정한 조진웅의 지지는 정 감독에게 큰 힘이 됐다.

"3달 간 시나리오를 썼는데 얘기가 워낙 황당하고 이상해서 상업적 승산은 없다고 봤어요. 그럼 제가 책임져야죠. 그래서 영화사 등록하고 제작자에 제 이름을 올렸어요. 주변인들한테 보여주지도 않았어요. 충무로 선수들한테 보여주면 계속 수정하라고 할 테니까(웃음) 나는 모난 돌을 하고 싶은데 둥그런 돌이 되면 그건 제가 아니니까 안 보여줬어요. 그리고 초고 끝내자마자 (조)진웅이한테 보냈고 빨리 주고 빨리 거절당하자는 마음이었어요. 근데 바로 다음날 하겠다고 하길래 '내가 선배라서 억지로 하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그런 부분은 굉장히 철저하다, 진짜 하고 싶다' 하더군요. 그러다 어느 날 지인들과 함께한 모임에서 진웅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정진영 선배 감독 데뷔하십니다! 제가 출연합니다!' 이러는 거예요. 그 자리에 있던 BA엔터테인먼트 장원석 대표가 대본 보고 제작하고 싶다고 했고요. 너무 고맙죠. 다만 예산을 얼마 이상 올리지 말자고 했어요. 이건 예산이 커질수록 제가 하려는 얘길 할 수가 없거든요. 그게 가능했던 게 배우들이 차비만 받고 해줬어요. 시나리오를 좋아해줬고요. 너무나 고마운 일이죠."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정진영은 1988년 연극 '대결'로 데뷔한 이후 연극, 영화, 드라마는 물론 시사교양 프로그램 SBS '그것이 알고싶다'의 진행까지 다방면으로 활약했다. 천만 흥행에 성공한 '왕의 남자', '7번방의 선물', '국제시장', '택시운전사'부터 '클레어의 카메라',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등 예술성과 사회적 메시지를 갖춘 영화까지 출연하며 데뷔 후 33년을 채워왔다. 영화 연출은 어린 시절부터 막연하게 동경한 일이었다. 능력 밖의 일이라는 생각에 도전할 엄두조차 못냈지만, 50대에 접어든 어느 날 불현듯 용기를 냈다.

"꿈을 꼭 이뤄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저는 대학 때 동아리하면서 배우를 했고 연출부 경험도 있지만 대부분은 배우로 살았어요. 연출할 능력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어마어마한 자본과 책임, 모든 걸 갖춘 대단한 감독님들이 많잖아요. 근데 어느 날 '내가 원래 뭘 하고 싶었지?' 질문하다보니 예술가였더라고요. 새로운 창조를 위해 도전하고 외로움을 돌파하는 예술가를 원했는데 어느새 안전한 시스템 안에 들어와있는 겁니다. 제가 대단히 스타덤에 오른 건 아니지만 꾸준히 일해왔거든요. 나도 이제 다른 방식으로 해봐야 하지 않나 싶었어요. 그래서 작은 영화들에 관심이 생겼고 독립영화를 하나 준비했는데 그게 엎어지면서 공백이 생겼어요. 그때 '내가 한번 써보자' 한 게 연출의 시작이었죠. 사실 그렇게 썼던 첫 시나리오는 너무 관습적이라 결국 버렸고 그 이후에 쓴 게 '사라진 시간'이에요. 만일 계속 스케줄이 있었다면 시나리오 쓸 생각을 못했을 텐데. 인생이란 게 묘해서 어떤 큰 결정을 예상치 못한 순간에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고보면 인생의 플롯은 참 희한해요. 그래서 앞으로가 궁금하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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