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병헌이 스포츠한국과 만났다. 사진=쇼박스
[스포츠한국 조은애 기자] “각하,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1979년 10월 26일 밤 7시 40분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중앙정보부 부장이 대통령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18년간 지속된 독재정권의 종말을 알린 이 사건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으로 꼽힌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감독 우민호)은 대통령 암살사건 40일 전,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육군본부에 몸담았던 이들의 관계와 심리를 면밀히 따라가는 이야기로 1990년부터 동아일보에 2년 2개월간 연재됐던 동명의 논픽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했다.

“영화에 몇 달을 매달리다보면 정말 재밌는지 아닌지 객관적인 시선이 없어져요. 근데 이 영화는 기술시사회 때 처음 보고 감독님한테 ‘와 너무 잘 만들었어요’라고 했어요. 이유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잘 만든 영화라는 느낌이 강했죠.”

이병헌이 연기한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은 헌법보다 위에 있는 권력의 2인자로 언제나 ‘박통’의 곁을 지키는 인물이다. 그는 옛 동료이자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곽도원)이 ‘박통’ 정권의 실체를 세계에 알리고 관련 회고록을 집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이를 중단시키기 위해 워싱턴으로 향한다. 이 가운데 ‘박통’이 제3의 인물을 진짜 2인자로 곁에 두고 있다는 새로운 정보를 얻은 김규평은 한국에서 예전과 다른 권력의 움직임을 느끼게 된다.

“김규평의 기본은 존경과 충성이라고 생각했어요. 김규평뿐만 아니라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 모든 상황들은 실제 자료와 증언을 바탕을 철저한 고증을 거친 거예요. 옛날 뉴스, 다큐멘터리, 실존인물들과 직간접적으로 함께 일했던 분들의 증언 등을 참고했죠. 그래서 아마 익숙한 대사들이 많이 나올 겁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철저하게 고증에 따랐죠. 애드리브는 아예 없었어요. 근데 이런 실존인물을 연기하는 건 참 어려워요. 제 개인적인 생각을 집어넣을 수 없으니까요. 온전히 시나리오에 나온 심리 상태, 대사를 제가 이해해야만 입 밖으로 나와요. 그게 제일 힘들었던 부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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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부장들'엔 개봉 후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명장면들이 다수 등장한다. 배우들의 혼신을 다한 열연, 우민호 감독의 감각적인 연출, 세련된 질감의 배경 등 다양한 요소들이 완벽하게 맞물린 결과다. 이번에도 이병헌은 대사 한 줄, 지문 한 줄마저 놓치지 않은 연기로 러닝타임 내내 숨죽이게 만든다. 특히 무표정한 얼굴로 다양한 감정을 전달하는 클로즈업샷에서는 어떤 액션보다 더한 긴장감마저 들 정도. 앞서 인터내셔널 예고편에도 등장했던 이병헌이 도청 자료를 곱씹으며 듣는 장면에서는 섬세한 감정 연기의 정점을 찍는다. 여기서 미세하게 떨리는 이병헌의 눈가를 포착한 이들이 ‘마그네슘 결핍 연기’라는 별칭까지 붙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병헌은 “사실 안구건조증이 있다”며 유쾌한 농담으로 말을 이었다.

“마그네슘 얘긴 어디서 나온 건지 그런 화학적인 접근은 처음이네요(웃음) 칭찬이니까 좋죠. ‘내부자들’ 때인가, 언제부터 그런 게 생겼는지 모르겠는데 엄청 긴장되고 심각한 상황 속에 들어가다보면 나도 모르게 움직이는 근육들이 생겨요. 약간 근육이 직업병에 걸린 것 같아요. 특히 도청하는 장면은 저도 묘했어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가 혼자 슥 ‘황성옛터’를 부르잖아요. 노래가 흘러나오는 순간 되게 고독해보이죠. 나중에 보니까 안경 끝에 빗물이 맺혀 있더라고요. 그런 게 감성적이고 고독한 분위기를 더한 것 같아요. 무엇보다 다른 신들과 대비되는 느낌이 좋았어요. 감독님도 굉장히 만족하셨던 장면이에요.”

‘남산의 부장들’은 총 65회차 중 국내 51회차, 미국 4회차, 프랑스 10회차로 3개국 대규모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했다. 우민호 감독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링컨 메모리얼 파크, 워싱턴 기념탑, 파리 방돔 광장 등을 배경으로 담아 이국적인 질감을 전달한다. 드론 촬영으로 진행된 프랑스 외곽 지역 풍광은 인물들의 감정을 대변하듯 쓸쓸하고 외로운 느낌이 묘한 여운마저 남긴다.

“김규평과 데보라심(김소진)이 만나는 워싱턴 호텔이 되게 유명한 호텔이에요. 점심시간에 가보면 다 정치인들, 의원들로 가득해요. 데보라심이랑 김규평 사이에 보이는 게 실제 백악관이고요. 그런 호텔 꼭대기층을 빌려서 촬영했죠. 근데 그렇게 유명한 곳은 촬영 시간 제약이 심해요. 그 신도 하루에 못 끝내서 다시 허락받아 하루를 더 찍었어요. 개인적으로도 신기했던 촬영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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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탄탄한 필모그래피, 화려한 수상 경력을 갖고 있지만 그런 이병헌에게도 실존인물을 재구성한 ‘남산의 부장들’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특히 어느 때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한 클로즈업샷에서 그의 진가는 선명하게 빛난다. 이병헌의 눈빛, 걸음걸이, 몸짓 하나하나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어느새 김규평과 가까이 마주한 듯한 느낌에 전율하게 된다.

“미묘한 감정들을 전달해야 하니까 극단적인 클로즈업이 많았어요. 그런 클로즈업은 배우가 맞닥뜨리는 고비이자 한편으론 마법 같은 순간이기도 해요. 뭔가 보여주려고 의도하면 거부감이 생길 수도 있어서 감정만 충만하게 갖고 있다면 고스란히 전달된다고 생각했어요. 분명 관객도 느낄 거라는 그런 믿음으로 연기했고요. 꼭 클로즈업샷 때문이 아니더라도 ‘남산의 부장들’은 전체적으로 정말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해요. 근현대사의 가장 드라마틱하고 중요한 실화를 다루면서 장르적인 느낌도 잘 살린 것 같고, 저도 처음 보자마자 ‘웰메이드’라는 단어가 딱 떠올랐거든요. 아마 ‘달콤한 인생’을 좋아한 분들이라면 이 영화도 좋아하시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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