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한국 모신정 기자] 영화 '생일'(감독 이종언)은 관객들에게 수수께끼를 던지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비행기를 타고 내려 어딘가를 찾아가는 한 남자, 외국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인지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인지 알 수 없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안정한 모습으로 커다란 짐가방을 들고 택시를 타고 이동한다. 남자는 낯선 동네에 도착해 한 아파트의 벨을 누르지만 집에 있는 듯한 한 여자와 아이는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이 남자는 왜 자신의 집으로 보이는 곳에 도착해 이렇게 어색하고 불편해 하는 걸까. 여자와 아이는 왜 남편(아빠)를 외면하려고 하는 걸까.

'생일'에서 설경구가 연기한 아빠 정일은 아들 수호를 세월호 사건으로 잃게 되지만 베트남에서 벌여 놓은 사업 때문에 아들의 비보를 듣고도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에야 가족들의 품을 찾는 인물이다.

영화의 전반부는 슬퍼도 내색할 수 없고 아파도 드러내지 못하는 정일의 시선을 통해 관객들이 극을 향해 서서히 마음의 빗장을 풀어가도록 구성돼 있다. 그리고 영화의 엔딩에 이르면 왜 정일이 그토록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큰 비극을 겪은 가족들 옆에서 머뭇거릴 수 밖에 진실이 드러난다.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정일 역을 연기한 설경구를 만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대표작들 속 에너지 넘치는 인물들의 격정적 모습과 달리 평소 인터뷰 현장에서는 감정을 그다지 드러내지 않는 그이지만 이날 인터뷰에서는 유독 정일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단어 하나를 고르는 것부터 신중했고 대화의 화제가 '연기' 혹은 '연기력'에 이르는 것을 경계했다. 인터뷰 중의 언행 하나가 영화를 향한 정치적 비판 공세의 빌미로 작용할까봐 조심스러워 하는 모습이었고 화제가 온전히 영화 자체에만 집중되기를 원했다.

그의 안절부절해 하는 태도에서 신생아를 키우는 부모의 심경이 느껴졌다. 어렵게 얻은 소중한 아이를 세상에 내놓기 두려워하는 부모의 심경 같아 보였달까.

- 정일은 영화 내내 안착하지 못하고 불안해 보인다. 결국 극의 종반 지점에 가서야 속내가 드러나는 인물인데.

▲ 감독님이 정일을 일부러 관찰자로 설정하셨다. 관객들이 정일의 감정을 서서히 확대해서 순남(전도연)을 만나게 하려는 의도 같았다. 정일이 극으로 확 들어가면 관객도 그래야 하잖나. 그래서 피치 못할 사정을 집어넣었다. 아들을 잃고 3년이나 지난 뒤에야 한국에 와보니 아내는 이혼 서류를 내민다. 그런데 정일은 이제 와서 감정을 드러내는게 너무 염치가 없고 딸 예솔이를 만난 순간에도 감정을 터뜨릴 수가 없다. 가슴과 머리가 따로 놀아야 했다.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분리 시켜 놓은 상황이다.

- 정일의 진짜 마음이 드러나는 장면이 후반부에 딱 두 번 나온다. 그 중 하나가 출입국 사무소 장면이다.

▲ 출입국 장면은 정말 '어떻게 해야 하나' 꾸역꾸역 고민을 미뤄둔 신이다. 절대 울지 말자고 생각했는데 감정이 팍 삐져 나오더라. 정말 너무 힘들었다. 죄스러움을 표현할 방법이 없지 않나. 순남으로서는 상황을 다 알지만 미워하고 원망할 수 밖에 없다. 자신은 더 처절했으니까. 정일은 관객들이 순남을 곧 바로 만나는 걸 피하게 하는 장치 같았달까. 마음에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순남을 딱 맞닥뜨리는 것을 늦추는 존재 같았다.

- 후반부 면접신에서 정일의 그간 행적에 대한 수수께끼가 한 번에 풀리더라.

▲ 정일이 계속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꿈뻑꿈뻑 하잖나. 생일 모임을 제안하는 사람들이 수호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해달라고 해도 눈만 깜박 거리고 말을 못한다. 면접 때도 면접관이 '왜 몇 년동안 그 곳에 있었나'라고 묻는데 대답을 못한다. 정일도 너무 아픈 사람인 거다. 하지만 순남과는 다르다. 누구 하나는 버티고 있어야 하는데 극복되는 고통도 아니지 않나. 아빠의 입장이 또 그렇기도 하고.

-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사회가 있었다던데.

▲ 영화를 함께 보지는 못했고 상영이 끝나고 무대인사가 있었다. 전도연 씨는 굉장히 힘들어 하고 많이 울었다. 유가족분들이 우리에게 '고맙다'고 이야기를 해주셨다. '왜 우리가 고맙다는 말을 들어야 하나' 생각이 되서 마음이 아팠다. 아마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는 뜻 같다. 꼭 유가족분들을 위로하겠다는 이유로만 만든 영화는 아닌데 고맙다는 인사를 듣는 것조차 죄스럽더라.

- 유가족 분들이나 관련된 분들 입장에서 전도연, 설경구 두 배우가 이 영화에 참여한 것이 작은 위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 이 영화에 대해 연기 이야기가 나오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연기 잘 한다' 같은 소리는 나오면 안된다. 이 영화처럼 그 말이 끔찍하게 들릴 수 있는 영화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찍었다. 배우로서 어떤 연기를 한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냥 그 감정들이 느껴지더라. 이종언 감독이 쉽게 쓴 책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진정성을 믿었다. 이 감독님은 '밀양'때 스크립터였고 나와는 '여행자' 연출부로 일할 때 본 사이인데 감독이 됐다고 달라 보인건 아니고 이 책을 보니 달라 보였다. 책에 단단함이 있었다. 책에 대한 예의, 이야기에 대한 예의를 다 하며 촬영했다.

- '생일'에는 세월호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 뿐만 아니라 그 이웃들의 일상도 세밀하게 묘사가 돼있다.

▲ 순남이 오열하자 옆집 딸이 자신의 엄마에게 '언제까지 저 아줌마 편 들어줄거야. 나는 저 울음소리 때문에 입시도 떨어졌다'고 말하지 않나. 그렇게 이웃의 이야기까지 다 담더라. 나는 그 장면이 좋았다. 엄마나 아빠가 그 딸을 혼을 못낸다. 그런 장면이 이해가 됐다. 마트에서 엄마들이 보상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대학 등록금을 받은 것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이 영화는 나와 우리에 대해 일방 통행적으로 이야기만 하는게 아니고 어떤 한 가지 주장만 펴지도 않는다.

- 이종언 감독이 몇 년 동안을 유가족을 위한 봉사활동을 나가던 중 영화화할 생각을 했다던데.

▲ 아마 감독님이 그렇게 그 분들을 긴 시간동안 곁에서 봐왔고 그 모습을 담았기에 그렇게 세세한 모습이 나왔을 거다. 시나리오 자체가 단단했다. 저는 촬영 중에는 유가족들을 따로 뵙지는 못했다. 너무 그 인상이 강렬할 것 같았다. 대신 감독님께 자주 물어봤다. 그러면 '어 그건 어느 집 이야기이고, 또 누구네 집 이야기다' 툭하고 답이 나온다. 출입국 사무소에서 아들의 여권에 도장을 받는 사연도 실제 있었던 이야기더라. 센서등 사연도 마찬가지다. 마치 극 중 정일이 순남에게 못다가서는 것처럼 감독님도 처음 안산에 갔을 때 가족들에게 선뜻 못다가갔다더라. 가족 분들이 먼저 말을 시켜주고 하셨다고 들었다.

- 영화 '우상'과 촬영 시기가 겹쳐 '생일' 출연을 위해 스케줄을 조정해가면서까지 출연했다고 들었다.

▲ 처음 제안받았을 때 출연할 수 있는 스케줄이 안됐다. 책을 읽고 생각을 고쳐 먹은게 스케줄을 조정해서라도 해야 될 것 같았다. 이 참사가 있은 후 시인은 시를 쓰고 소설가는 소설을 쓰고 가수는 노래를 만드는데 왜 이 영화가 없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출연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주일 정도 고민하고 '우상' 측에 양해를 구하고 참여하게 됐다.

- 제작에 나선 이동하 대표를 비롯해 이창동 감독과 나우필름 이준동 대표의 존재도 출연에 영향을 미쳤나.

▲ 책도 너무 좋았지만 거부할 수 없었던게 그 분들 이름이다. 이창동 감독, 이준동 대표는 마치 큰형과 작은형 느낌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 이야기하는거다. '여행자'때는 얼굴도 안나오는데 출연했다. 이 분들의 이름 앞에서는 거부할 수가 없다.

- 전도연과 18년 만에 호흡을 이뤘다. 오랜만에 만난 소감은.

▲ 딱 한마디로 말할 수 있다. "말해 뭐 해"라고. 처음 도연씨가 두 번을 거절했다더라. 그러면서도 이준동 대표 사무실에 찾아오고 커피도 달라 하면서 계속 '생일' 이야기를 하더란다. 그리고 며칠 안되서 전도연이 한다고 했다기에 마음이 딱 놓였다. 같이 해보니 나이도 전혀 안먹은 것 같고 똑같다. 둘이 따로 연습을 맞추거나 그러지 않았는데 그냥 툭툭 던지고 포인트만 딱딱 집어내는 게 정말 도사님 같더라. 생긴 건 똑같은데 마음이 엄청 깊어졌다.

- 자신의 아픔은 가슴 한켠에 묻어두고 생일 준비를 진행하는 정일의 마음에 어떻게 다가갔나.

▲ 유가족들이 세상을 떠난 아이들을 위해 생일 잔치 해주는 걸 유튜브로 찾아봤다. 유가족들의 얼굴을 직접 뵐 용기는 없었고 비겁하게 유큐브로 봤다. 트렁크와 유품들도 놓여있었는데 나는 아버지들의 얼굴을 보게 되더라. 아버지들이 안무너지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들은 구슬피 우시는데 아버지들은 꾸역꾸역 참고 있었다. 저도 '울컥'하고 눈물이 나더라. 연기할 때는 꾹꾹 누르려 애쓰며 연기했다. 여러 장면에서 분노를 누르려 애를 썼다. 그런데 오히려 '컷'하고 종료되는 순간 더 깊이 많이 울게 됐다.

- 관객들께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평범한 우리 이웃에 관한 이야기이고 휘둘리고 싶지 않은 영화다. 나와 우리의 이야기다. 영화속 인물들의 마음을 살펴봐주시고 이야기를 들어주시면 좋겠다. 관객들이 순남을 설득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엔딩부 촬영 당시 20년을 연기하며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20여명 가까이 되는 배우들 특히 아이들도 있었는데 단지 롱테이크여서가 아니고 특별했다. 힘든 경험이 아니고 위안을 받은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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