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설경구가 스포츠한국과 만났다. 사진=CGV아트하우스
[스포츠한국 조은애 기자] 노랗게 탈색한 머리, 아무렇게나 눌러쓴 허름한 모자, 절뚝거리는 걸음, 정신지체를 앓고 있는 아들. 영화 ‘우상’에서 배우 설경구가 연기한 유중식은 언뜻 봐도 쉽지 않은 삶을 사는 인물이다. 사는 건 팍팍해도 아들 부남을 향한 사랑만큼은 끔찍했던 아버지다. 부남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그는 마지막 남은 자신의 핏줄(이라 믿고 싶은)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한다.

“처음 시나리오 속 유중식을 보면서 답답했어요. 대체 이 사람은 왜 이런 행동을 할까. 그게 궁금해서 이 작품을 하게 됐어요. 유중식은 아들과 견고한 성을 쌓고 살아요. 거기엔 아무도 못 들어와요. 그게 아들이 죽으면서 깨져버렸고 중식은 두려웠을 겁니다. 그러다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걸 알고 다시 그 성을 쌓고 싶어하죠. 그래서 구명회에게, 련화에게 잔인한 조건에 시달리면서도 끌려다니는 거예요. 중식의 생활도 정상은 아니었고 이들 부자지간도 남들이 보기엔 좀 고립됐겠죠. 뭔가 하나 깨졌을 때 채워넣어야 하는 절박함이 있었을 거예요. 사실 산모도 아이가 부남이 아이인줄 아는데 중식이만 진짜 핏줄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내가 나만 속이면 되는 거니까. 중식이가 극단으로 달려가게 돼요.”

중식은 사고로 아들을 잃고 그 가운데 얽힌 석연치 않은 비밀을 밝히려 애쓰는 아버지다. 설경구는 노란 머리, 거칠게 그을린 피부, 절뚝거리는 걸음걸이 등 외양부터 불안한 눈빛, 상기돼 갈라지는 목소리까지 캐릭터의 세밀한 면을 섬세하게 가공했다.

“절뚝거리는 걸 잊지 않으려고 한쪽 신발에 병뚜껑을 넣고 다녔어요. 혹시라도 까먹을까봐. 머리는 탈색하라고 해서 좋아했어요. 안 해봤던 거라. 얼굴 태닝도 받았어요. 고단한 걸 표현하려고 했죠. 머리색은 아들이랑 동질감을 보여주려고 한 거예요. 혹시라도 애를 잃어버리면 머리색이라도 보고 금방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중식이가 감당한 거죠. 이름도 중식, 점심이에요. 아침 건너뛰고 허겁지겁 먹는 점심, 그런 의미에요. 계속 헐떡이는 거죠. 실제로 중식이는 첫 등장부터 전사도 없이 그냥 쳐들어가요. 아들이 죽었단 말에 이미 독이 올라서 등장하죠. 트럭몰고 병원에 도착하는 신은 20 테이크 넘게 갔어요. 호흡이 길기도 했고 이수진 감독님의 강렬함, 집요함을 확 느낀 신이었죠. 그 외에도 촬영장에 가면 제 신은 거의 숨이 찼어요. 빨리 찍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사진='우상' 스틸
‘우상’은 144분 간의 러닝타임 내내 허를 찌르는 전개, 충격적인 엔딩으로 내달린다. 저마다 다른 우상을 가진 이들의 맹목적인 돌진, 믿음의 허상과 배신에 대해 찌르는 이 영화에는 충격적인 장면들이 다수 등장한다. 특히 광화문 한복판 이순신 동상의 머리를 날리는 장면은 영화의 메시지를 담은 상징적인 장면이다.

“중식이 무당을 찾아갔을 때 ‘가장 큰 인물의 목을 따야 진실을 알 수 있다’고 하잖아요. 모든 게 끝난 상황에서 무당 말이라도 믿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짓을 해버린거죠. 그 순간 구명회 선거운동 옷을 입고 있던 건 영화적인 장치라고 생각해요. 구명회에게 상처주려고 그것까지 계산했을까? 그건 잘 모르겠어요. 중식이는 가장 뜨겁게 시작해서 가장 차갑게 끝나는 인물이에요. 그나마 세 사람 중에 뭔가 하나라도 건진 건 중식인 것 같아요. 그래도 스스로 ‘몹쓸 병’에 걸렸다고 인정하니까. 셋 다 몹쓸 병에 걸렸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니까 세상 사람 모두 병에 걸린 것 같더라고요. 다들 그걸 모르고 사는 것 같아요.”

사진=CGV아트하우스
지난 2017년 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으로 배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설경구는 ‘지천명 아이돌’이라는 애칭까지 얻으며 최고의 시간을 보냈다. 관객들의 애정 어린 부름에 올 한 해 ‘우상’에 이어 올해도 다작 행보를 이어간다. 오는 4월 개봉하는 ‘생일’부터 ‘퍼펙트맨’, ‘킹메이커’까지 당분간 스크린에서 계속 그의 얼굴을 만나볼 수 있을 예정이다.

“관객들, 팬들 사랑 덕분에 감동은 제가 제일 많이 받아요. 생각하면 눈물겹고 피부에 와닿을 만큼 감동적이에요. 내 편 이 돼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좋은 친구들을 만난 것 같아서 항상 좋아요. 그런 면에서 ‘불한당’은 어마어마한 영화죠. 강남역에 아이돌들만 한다는 광고까지 하고 상상도 못했던 일이 너무 많이 벌어졌어요. 저는 구겨진 아이돌이지만(웃음) ‘우상’도 사랑받았으면 좋겠어요. 어둡고 어려운 영화라고 볼 수도 있지만 쉽게 접근했으면 해요. 눈이 가는 대로 인물을 쫓아가다가 나중에 복기하면서 ‘그게 뭐였지?’하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이야깃거리가 남는 영화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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