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증인'의 초반부 장면에서 음료가 든 비닐 봉투를 들고 광화문 사거리에 서있는 순호(정우성)를 보며 연예인 중의 연예인인 그에게도 평범한 우리네 같은 모습이 있었음을 깨닫고 무척 반가웠다.

데뷔작 '구미호'에 이어 '비트'의 민으로 청춘의 대명사로 방점을 찍으며 대중들에게 눈도장을 찍은 이후 그가 연기해 온 인물들은 현실에는 존재하기 어려운 이상적 캐릭터가 다수였다. 친구를 위해서라면 목숨 내놓는 일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닌 청춘이거나, 한 여자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순정남이거나, 달리는 말 위에서 고삐를 놓은 채 총을 쏘는 매력남이었다. 대부분 강렬한 남성적 에너지를 강조한 역할들이었다.

그의 말을 그대로 빌자면 그가 입고 싶은 옷과 어울리는 옷에 차이가 커서 대중들로서는 무릅나온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고 쭈그리고 앉아 김치를 담그는 모습(영화 '똥개')의 정우성은 전혀 보고싶어할 마음의 준비가 안되있던 시절도 있었다.

정확한 기점일지는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작품 속에서 사람 정우성의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한 건 '감시자들'에서 제임스를 연기했을 때 부터다. 제임스를 비롯해 '아수라'의 한도경이나 '더킹'의 한강식, '강철비'의 엄철우, '인랑'의 장진태까지 자신이 속한 사회와 조직이 부여한 임무로 폭주하거나 혹은 개인의 가치관과의 갈등으로 혼돈스러워 하는 모습에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행태와 고민이 투영돼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증인'(감독 이한)은 민변 출신 속물 변호사와 자폐를 지닌 소녀의 특별한 만남을 그린 영화다. 정우성은 변호사 순호 역을 맡아 멋짐과 잘생김을 내려놓고 사건의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좋은' 혹은 '좋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한 남자를 연기했다.

극 중 순호는 민변 출신이지만 대형 로펌으로 이직해 개인의 안일을 위해 살겠다 결심했지만 자폐 소녀 지우의 증언에 신빙성이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 순간 진실을 찾는 쪽으로 삶의 방향을 다시 한 번 바꾼다.

데뷔 이래 톱스타의 자리에서 한 번도 내려 온 적 없는 그가 최근 몇 년 사회적 문제들과 관련해 꾸준히 목소리를 내오고 있다. 환호가 따른 시기도 있었던 반면 그의 진정성까지 호도하려는 비판의 목소리도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정우성과 한 번이라도 영화에서 호흡을 맞춘 적이 있는 동료, 선후배 배우, 스태프들이라면 자신보다 함께 호흡한 이들을 먼저 배려하고 사려 깊은 태도를 보이는 그에 대해 칭찬의 말을 아낌 없이 쏟아놓는다.

시사 뉴스에 출연하지 않아도, 노조의 파업 현장에 방문해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아도, 해외 약자들을 지지하고 그들을 돕기 위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배우로서의 현재 위치를 유지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는데 왜 그는 끊임 없이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두고 목소리를 내오는 걸까.

'증인'의 순호에게서 그 답이 어렴풋이 보인다. 개인의 성공이나 영달에는 마이너스가 되더라도 진실을 찾기 위해 기득권조차 내려 놓는 순호에게서 정우성의 본심이 느껴졌다면 너무 앞선 해석일까.

- 출연 결심을 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 시나리오가 담고 있는 교감과 따뜻한 여운이 좋았다. '증인'의 순호는 편하다는 걸 넘어 자유롭게 연기했다. 내 리액션이 정해져 있지 않기에 캐릭터 상황 안에서 재미있게 연기했고 항상 다음 촬영에 빨리 가고 싶더라. 제가 입고 싶은 옷과 어울리는 옷은 다른 것 같다. 입고 싶은 옷을 입으면 멋있기는 하다. 외형적 이미지가 캐릭터를 받아들이는 첫 번째 요소이기도 하고. 하지만 어떨 땐 외형적 이미지가 허들이 되고 배우는 그걸 깨고 본질을 관객에게 전달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 넥타이를 풀어헤친채 빵이 든 검정 봉투를 들고 대로에 서있는 정우성이 그렇게 편해보일 줄 몰랐다. 발렌타인 21년산이 든 글라스를 든 모습을 더 상상하게 되는게 사실이다.

▲ 일상성의 표현에 대한 큰 가치를 충분히 알고 있고 또 추구하고 싶었다. 그 안에 담겨있고 싶은 사람이다. 그런데 관객들이 그런 일상 속 모습의 나와 소통할 준비가 돼 있느냐 생각해보면 영화 '똥개'(감독 곽경택)의 정우성을 바라지 않았다. 무릎이 튀어나온 트레이닝복을 입고 김치 담그고 아버지에게 징징거리는 정우성을 볼 준비가 안돼 있었다. 일상의 찬란함을 표현하는 것에 대한 갈증이 있었고 일상에서 생활하는 것에 대한 교감에 대한 결핍도 있었다. 그걸 더 갈구하고 소중하게 느끼게 되더라. 그래서 캐릭터로 이런 역할이 주어지니 어린아이처럼 신나는 기분이 들었다.

- '아수라'나 '더 킹', '인랑' 등에서 악역에 가까운 인물을 연기했다. 정우성이 연기하는 악한들은 본성이 악해서라기보다 조직이나 처해 있는 환경이 인물을 악해지도록 만드는 공통점이 느껴진다. 무척 안간힘을 써서 악한 행동을 하고 있달까. '증인'은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이기도 한다.

▲ 그렇게 보였나. 악역에 대한 반작용도 있었겠지만 개인적으로 자연스럽게 선택했다. 전작들은 그 시기에 그런 시나리오들이 중심되게 돌아다녔다. 배우는 선택받는 입장이잖나. 주어진 시나리오 안에서 선택될 수 밖에 없다. 영화계가 가장 시류에 민감한 곳이고 시대가 요구하는 감정과 이야기를 담아야 하는 매체가 또 영화니까.

- 극중 송윤아에 연정을 품은 설정도 재미있더라.

▲ 송윤아 배우와 처음 만났는데 형수님이시니(설경구의 아내여서) 쑥스럽기도 했다. 레디 액션 전 서로 대화를 나눌 때 설경구 형님이야기 말고는 별로 나눌게 없었다. 그러다 (영화 속에서)오랜동안 마음에 품고 있는 연정의 여인으로 대하려니 스위치를 온오프 빨리 해야했다.

- 사건의 키를 쥐고 있는 가사 도우미 역의 엄혜란은 연기도 좋고 에너지도 상당하던데.

▲ 매컷 매셋업마다 에너지가 대단한 분 같다. 격렬한 감정을 표현했다. '억울하다. 죄가 없다'고 말할 때와 지우를 대할 때 정반대 감정이잖나.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을 거다. 특히 본인의 얼굴 안나오는 장면에서도 그리 열심히 하는 걸 보니 '이 분도 열정이 대단하구나' 싶더라.

- 김향기와의 호흡은 어떻게 풀어갔나.

▲ 김향기가 10대 배우라고 해서 후배로만 바라본 건 아니다. 동료 배우로 봤다. 가장 중요한 나의 파트너였다. 그래서 향기씨가 어떤 사람인지 묻지 않고 오히려 바라 봤다. 김향기라는 사람 자체가 말수도 적어서 말을 안하고 바라보는 것만으로 큰 소통이 됐다. 향기도 나를 느끼는 부분이 있었을 거다. 내가 현장에서 어떻게 임하느냐 하는 부분은 대화보다 그냥 서로 봐주는 것이 더 좋은 소통이었다. 순호가 지우에게 다가가듯 저 또한 '향만 향기가 표현하는 지우가 어떤 지우일까. 그 지우를 온전히 받아서 순호를 연기하려 했다. 현장에 갈 때 어떤 상상도 하지 않고 갔다. 상상으로 그려지는 지우를 다 버리고 김향기가표현하는 지우에게 리액션을 했다. 이 영화의 모든 리액션은 준비하지 않은 리액션이었다.

- '증언'은 마음 속에 잠재워둔 감정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도록 만드는 영화다. 촬영하며 인상 깊었던 순간들은.

▲ 아버지가 써 준 편지를 읽을 때도 그랬고 지우가 '아저씨도 나를 이용할 겁니까' '아저씨는 좋은 사람입니까'라고 물을 때도 감정이 울컥 하고 올라왔다. 내가 당당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어른으로서 긴 세월을 산 사람으로서 스스로 다시 묻게 되는 그런 말을 해준다. 이 귀엽고 순수한 아이가 '아저씨는 좋은 사람입니다'라고 평가해주지만 순호는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노력해볼게'가 그렇게 해서 나오는 답인 것 같다.

- 검사 역의 이규형도 또 다른 좋은 사람의 한 명으로 표현됐다.

▲ 이규형 배우는 현장에서 나를 선배로 대하지 않고 동료배우로 대할수 있도록 관계를 맺었다. 타고난 순발력이 좋은 배우였다. 동물적 순발력을 타고난건지 아니면 그렇게 연기 공부하면서 만든건지 모르겠지만 능구렁이처럼 표현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 지난 몇 년간 사회적 관심 사안에 대한 생각들을 뉴스나 라디오에 출연해 이야기하는 일이 꽤 있었다. 사회적 이슈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는 특별한 이유가 궁금하다.

▲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데 있어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은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당한 일이고 또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기에 하는 것이다. 나를 지탄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 분들은 이해의 관점 또는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가 있는 것 뿐이다. 나에 대한 반대급부의 이야기가 커진다 해도 도망가지 않는 것이 정당성을 지키려는 노력이라 본다. 어떤 일의 좋고 나쁨은 관계 안에서 또는 조직 내에서 만들어지는 거다. 조직과 나, 사회와 나 등 직업이나 직책 또는 신분 또는 관계 안에서 어떤 판단이 만들어 진다고 본다.

- '증인'을 선택한 것도 그런 일환인가.

▲ 그런 이유로 이 영화를 선택한 건 아니다. 이 영화는 어떤 이야기를 강요하거나 설득하지 않는다. 담담히 관조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거리감과 여유를 가지고 스스로를 대입할 수 있는 관계를 설정하려는 영화다. 어떤 결핍적 존재가 있다고 할 때 그 존재가 문제가 아니고 결핍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나 태도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 기득권을 깨고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순호에게 인간 정우성이 자연스럽게 대입된다.

▲ 대중들이 정우성에게 요구하는 이미지에 맞춰 가려한 적도 있고 또 반대로 긴 시간동안 생긴 편견을 온전한 나로 바꾸려는 노력도 계속 해왔다. 작품 경력이 쌓이며 생긴 이미지도 있을 거고, '런닝맨'이나 '무한도전' 등에 출연해 프로그램에 맞는 홍보를 하며 쌓인 모습도 있을 거다. 불현듯 어떤 자신감이 생긴 것도 아니다. 그저 정우성 안의 여러 모습을, 나를 온전히 보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노력했다. 어떤 대상에 대해 선입견 혹은 그에 대한 정보들을 모아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라고 설정을 하는 건 다 편견이 아닐까. 제 직업 자체가 다른 사람들이 저를 편견으로 볼 여지도 큰 것 같다. 편견이 속상하거나 슬플 때도 있지만 타인의 시각을 극복해서 이겨내고 싶다.

- 변호사 캐릭터의 어떤 특성에 집중했나.

▲ 순호는 바람직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성품 가진 사람이고 직업이 재미있다. 변호사는 개인의 직업이기도 하지만 사회가 요구하는 공공성도 있고, 정의도 요구되는 직업이다. 룰이 존중되야 하는 직업이기도 하다. 이런 직업이 어떤 순기능을 하느냐 질문도 해보는 기회가 됐다. 변호사는 의뢰인이 말하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직업인지 숨겨진 진실을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딜레마도 존재하는 것 같다. 범죄를 다루는데 있어서 어떤 정당한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법률을 다뤄야 하는가도 중요한 일이다. 의뢰인이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정당한 변호를 받을수 있는가의 문제도 놓여 있고 정말 많은 질문이 떠오르는 직업인 점을 고려했다.

- 동료, 선후배를 막론하고 정우성과 함께 해 본 사람은 늘 인품을 칭찬하더라. 그런데 때론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는 것이 부담되기도 할 것 같다.

▲ 스트레스는 아니지만 부담은 된다. 그것도 선입견으로 작용할 때가 있다. '너는 좋은 사람이지'라고 모르는 사람들이 강요하는 느낌이 들면 부담된다. 내가 현장에서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게 아니라 다른 스태프들이 궁금했고 또 내가 즐겁게 임하는 만큼 다른 배우들이나 스태프들도 각자 자신의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그래서 현장에서는 늘 그 곳의 사람들과 소통하려 한다. 배우로서가 아니라 동료로서 임한다. 그런 자세는 배우 초반부터 나왔언 것 같다. 현장에서 동료로서 그 곳의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의 컨디션에 관심이 간다. '오늘 괜찮아?' '잘 잤어?' '밥 먹었니?'하고 묻는 것에서 소통은 시작된다.

- 그렇게 사람들과 소통하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따로 있나.

▲ 제가 어릴 적 가난한 철거촌에서 자라며 세상에 대한 동경과 부러움을 가지고 산 시절이 있다. 학교도 빨리 그만두고 늘 혼자 있었다. 내가 소외됐던 사람이어서인지 현장에서 내가 그런 행동을 하며 교감할 때 안정적으로 임하게 된다. 삶에서의 깨우침이라는 게 불현듯 나타날 수도 있지만 일상 속 작은 교감과 사건들, 관계 속에서의 사소한 일들이 내가 세상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 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준다. '이 세상 안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지'라는 질문을 청소년기부터 계속 일상화하게 됐다.

- 데뷔 초부터 하루 아침에 별이 된 경우다. 그 때 당시 오늘의 정우성을 상상한 적 있나.

▲ '비트' 당시는 정말 값지고 소중한 시절이다. 저에게 많은 걸 준 시간이고 영화인으로서 많은 걸 깨우치게 해 줬다. 그 때 당시 '내가 스타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즐겼다면 어땠을까' 상상도 해보지만 그 때는 자각을 못했다. 그렇지 않았기에 지금의 정우성이 됐고 나다운 행보를 이어온 것 같다. '비트' 민에 만족하고 그런 캐릭터만 재반복했다면 자가당착에 빠졌겠지.

- 전도연, 배성우, 윤여정과 함께 한 차기작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도 관심이 높다.

▲ 차기작에서는 지질함의 극치를 보여주게 될 것 같다. '증인'과는 또 다른 종류의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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