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가부도의 날'서 한국은행 정책팀장 한시현 역

"조우진과 호흡 압도적… 다각도로 준비 철저히 하는 배우"

"유아인, 안일한 선택 피하는 태도 응원해"

영화 '국가부도의 날'의 주인공 김혜수 /사진=호두앤유앤터테인먼트 제공
배우 김혜수가 근래 보기 드물었던 전무후무한 캐릭터로 돌아왔다.

1997년 국가부도를 일주일 앞두고 협상에 나선 이들과 위기의 격변기를 살아가는 이들, 운명의 갈림길에 선 다양한 인물들을 그린 영화 '국가부도의 날'(감독 최국희)에서 경제 위기를 예측하고 서민과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국은행 통화정책팀 팀장 한시현 역을 맡았다.

멀티 캐스팅의 흥행 영화('도둑들', '관상')와 원톱 여주인공의 영화('차이나타운', '미옥'), 인기 드라마 ('시그널', '직장의 신') 등 장르와 영화의 사이즈를 가리지 않고 종횡 무진 활약하며 누구보다 최일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40대 여배우의 모범답안이자 후배 여배우들의 최상의 롤모델인 김혜수지만 '국가부도의 날'에서의 한시현은 보다 더 특별해 보인다.

할리우드에서도 쉽게 제작되기 힘든 경제 위기를 다룬 영화에서, 그것도 유독 여자가 메인 주인공인 영화는 가뭄에 콩 나듯 제작되는 한국 영화계 현실에서 영화의 내러티브와 흥행 모두에 가장 책임이 높은 첫 번재 타이틀 롤을 맡아 그 역할을 멋지게 수행해 냈다. 마치 극 중 한시현이 입술이 부르트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며 경제 관료들과 IMF 협상팀에게 국민을 위한 협상을 하라고 설득하는 것처럼 김혜수도 촬영 전 4개월여의 프리프로덕션 기간부터 1997년 IMF 당시 경제내외적 상황에 대한 기본 학습은 물론이고 영어 대사를 포함한 모든 대사를 달달 외우며 철두철미하게 한시현으로 살기 위한 준비를 갖춰 나갔다.

'국가부도의 날'의 개봉 직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김혜수와 만났다. 매체와의 인터뷰가 영화와 캐릭터에 대한 진심을 전하는 자리인만큼 시상식의 메인 MC를 맡을때처럼 화려한 옷차림이나 풀메이크업은 지양했지만, 자신이 얼마나 진심으로 이 영화를 대했는가를 설명하는 그의 눈빛과 진정성 넘치는 언변은 어떤 화려한 현장보다 눈부시게 빛 났다.

10대 때부터 한국에서 제일 가는 미녀로 대중들에게 각인된 후 언제나 톱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법이 없었던 그는 지천명을 눈 앞에 둔 지금 진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고 있다. 위험이 따르기 마련인 새로운 선택에 늘 주저함이 없는 김혜수의 다음 선택 또한 궁금해진다.

- '국가부도의 날'을 택한 계기가 궁금하다.

▲ 시나리오를 받을 때 들은 영화의 한줄 요약이 "외환 위기 당시 비공개로 운영된 대책팀을 중심으로 IMF 직전 일주일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였다. 보통 시나리오를 누워서 보는데 이 시나리오는 누워서 보다가 벌떡 일어나 앉아서 보게 되더라. 계속 검색해가며 보게 되더라. 저도 IMF를 겪은 세대인데 한보 사태로 출발해 구제 금융을 받았고 금리가 올랐고 힘든 사람도 많았던 게 기억 나더라. 부도가 난 사람들도 많고 주위 유학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거나 지인들 중에서도 해외 이민을 투자 이민이 아닌 비참하게 떠나야 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단편적이었다. 내가 IMF에 대해 정말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 번도 영화에서 다뤄지지 않은 소재이기에 꼭 영화화 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출연하는 여부보다 '이런 영화는 반드시 만들어져야 한다', '유쾌한 재미와는 다른 의미의 재미가 느껴질수 있도록 만들어져서 많은 분들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촬영 전 프리프로덕션 기간 중 경제 공부를 상당히 열심히 했다고 들었다.

▲ 보통이 아닌 작품이었고 한시현이 하는 말은 전부 다 내가 모르는 말들이었다. 내게 시간이 필요했다. 극 중 단어들에 대해 알아야 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한시현이 경제 전문가여서 잘 알야 하는 점도 있었지만, 한 대사를 알아서 유려하게 말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당시 상황이 어떻게 발생해서 진행됐는가를 알아야 해서 따로 공부를 했다. 영어 대사 또한 반드시 익숙하게 해내야만 했다. 협상 장면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연기를 떠나 대사에 대한 부담이 없어야 했기에 실제 촬영이 시작되는 전날까지 프리프로덕션 5개월 기간 중 4개월 2주 가량 공부하고 연습했다. 제 경제 상식이나 지식의 미미함을 없앨 수 있도록 강의 해줄 분들이나 영어 대사에 도움을 받았다. 경제 용어에 대해 페이퍼웍도 했고 강의도 듣고 영어 용어 훈련도 했다. 한시현의 감정을 진심으로 드러내기 위해 그 과정은 필수불가결했다.

- 완성된 영화를 보고 어떤 느낌이었나.

▲ 저는 객관적일 수 없다. 좋게 봤다. 아쉬움은 있지만 얘기하지는 않겠다. 다만 이 영화를 왜 만들려고 했는지 목적성 잊지 않은 것 같아서 참여한 모든 분께 감사하다. 내 스스로도 쓰다듬어 주고 싶다. "너 잘 했어"가 아니라 끝까지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잡으려 노력한 것에 대해. 이 영화에 참여한 사람으로 칭찬해주고 싶다.

- IMF 협상 장면은 한시현의 카리스마가 폭발하는 장면이다. 다만 직책상 한계가 있고 고위급 관료들이 IMF 측 의견을 있는 그대로수용하려는 의견이다 보니 IMF 총재를 설득하는데 한계도 느껴진다. 연기하기에 어려움은 없었나.

▲ 한시현은 나라를 구해보겠다는 생각으로 그랬던 건 아닌 것 같다. 자기가 맡은 소임을 다 하다 보니 거기까지 고군분투하게 된 게 아닐까. 한시현은 당시 경제 상황의 정황을 수집해 보고서를 작성했고 묵살당하다가 어느 순간 한은 총장에게 읽히면서 비상에 놓이게 된다. 이 사람은 할 일을 한 것 뿐이다. 계속해서 정보를 수집해 나가는 동안 경제 관련 인사나 기업들이 자기 자리에 앉아서 무능한 모습을 드러낼 때 경멸에 가까운 감정도 느꼈을 거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인 협상신에서 한시현은 실무진이기에 직책상 그렇게 강한 발언을 할 수는 없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 여자의 신념은 자신의 직무를 다 하는 것이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최악의 상황을 막아야 했다. 그러다 결국 좌절하게 된다. 엄청난 좌절감과 죄책감, 무게감을 느꼈을 거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협상 기록을 남기지 않나. 사표를 던지면서 말이다. 아, 사표를 내는게 아니라 잘렸을 거다. 그런 과정을 표현해내고 싶었다.

- 가족 관계의 반전이 꽤 인상적이다.

▲ 한시현에게도 가족이 있잖나. 내가 막아내지 못한 어마어마한 국가의 위기 사태로 결국 직격탄을 맞는 사람이 피붙이라니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그 때 그 인물이 총체적 감정을 느끼게 된다. 내 본분을 지키려다가 내 분신과도 같은 가족에게 닥친 위기는 대응을 못한 거다. 그 장면에서 한시현의 눈물은 당시 그 일을 겪은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한게 아닐까. IMF 협상팀에 이기지 못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좌절감보다 훨씬 더 복잡한 눈물이었을 것 같다.

- 배우들의 호흡이 부딪히며 느껴지는 에너지가 굉장하다. 조우진과의 장면들에서는 소름이 몇 번 돋던데.

▲ 차관과 호흡할 때는 정말 압도적이었다. 조우진은 좋은 배우다. 테이크마다 연기가 미묘하게 다르다. 본인도 많이 시도하고 준비도 많이 하고, 직관도 굉장히 좋다. 끊임없이 그렇게 호흡을 주고 받았다. 배우로서 너무 좋은 상대다. 자극도 되고 흥분도 되고 희열도 느꼈다. 함꼐 시너지 얻는 느낌이었다.

- 뱅상 카셀의 출연은 제작 당시부터 큰 화제였다.

▲ 뱅상 카셀 또한 시나리오에 흥미를 느껴 특별 출연을 수락했다더라.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었는데 이걸 선뜻 해준다고 하니 너무 흥분됐다. 뱅상 카셀과 촬영하기 전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우리의 태도를 그가 어떻게 볼까 긴장되더라. 리허설은 어떻게 해야 하나, 대사를 맞춰봐야 할까 고민됐다. 막상 인물대 인물로 만나보니 크게 다르지 않더라. 시나리오를 보고 많은 생각을 해도 현장에 가면 다시 세팅해야 한다. 뱅상 카셀이 우리 현장에 오고 3일 지난 후에 협상 장면을 촬영했다. 뱅상 카셀이 움직이면서 동선도 달라지고 또 그의 표정 연기도 보고 싶었는데 제가 눈이 너무 나빠서 렌즈를 끼지 않으면 잘 안 보인다. 그런데 총재 자리는 너무 멀어서 잘 안 보이더라. 굉장히 공식적이고 경직된 대사들이 오갔지만 행간을 채워 넣더라. 프로페셔널하고 또 젠틀하고 긴장감이 함께 있는 현장이었다. 앞으로 뱅상 카셀과 그런 현장에서 다시 할 수 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기에 순간순간이 소중했고 배우로서도 한시현으로서도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다. 영화로 그 장면을 보니 현장에서 못본 게 보였다. 아무리 좋은 배우라도 남의 언어로 남들이 주도하는 판에서 연기를 하는데 대사가 없는 몽타주 신에서도 이질감이 없었다. 갖춰진 배우는 정말 다르다는 걸 느꼈다. 그 시대를 산 사람의 에너지를 응축해서 표현하더라.

- 뱅상 카셀과 촬영 외에 사적인 이야기도 나눈게 있나.

▲ 워낙 젠틀한 분이더라. 스태프나 배우들의 이야기를 다 받아준다. 본인도 영어를 잘 못해서 대사가 어렵다며 대본을 계속 들고 있었다. 협상 장면이 너무 중요한 장면이기에 숨이 막힐 정도로 찍었다. 다들 안 그러는 척 했을 뿐이다. 뱅상 카셀이 케이팝이나 케이컬처에 관심이 많더라. 케이뷰티에도 관심이 많아서 여자친구에게 선물해주고 싶은 코스메틱을 묻기에 제가 사용하고 있고 광고하고 있는 제품을 추천해줬다. 매우 스윗하더라.

- 유아인과는 아쉽게도 함께 출연하는 장면이 없다. 관객들에게 두 사람의 호흡도 꽤 기대를 모으는 요소였는데 아쉽다.

▲ 촬영하는 현장이나 일정 자체가 다 달랐다. 유아인이나 허준호 선배 다 달랐다. 모니터를 통해 유아인의 연기를 봤다. 스태프들에게도 '정학은 어때요?' '갑수는 어때요?'하며 많이 물었다. 개인적으로 유아인이라는 배우를 좋아한다. 그 또래 중 그렇게 확실한 아이덴티티를 가진 배우는 없다. 강점이기도 하다. 성장하고자 하는 욕구가 엄청난 것이 느껴지고 안일한 선택을 하지 않더라. 그러니 '국가부도의 날'도 선택했겠지. '버닝'이라는 엄청난 작품도 해냈다. 남자 배우들이 폼내고 멋있게 할 수 있는 작품이 꽤 많은데 이 작품은 어떻게 보면 위기를 이용한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인물로 보일 수 있는데 그럼에도 이 작품을 택했다. 그래서 유아인이라는 배우가 더 좋아졌다. 안전한 길을 두고 도전을 택한 것 아닌가.

- 협상 장면에서 유려한 영어 발음 때문에 칭찬하는 반응이 많다. 훈련이나 연습의 결과라기보다 영어로 소통을 꽤 한 느낌이던데.

▲ 외국인 친구들도 좀 있고 우리 시절에는 영어는 문법 공부를 중점적으로 하고 그러지 않았나. 저는 문법이 틀려도 막 이야기 하는 편이다. 완벽하게 하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소통하는게 중요하니까. 제가 잘 모르는 건 막 물어봐가며 일상 언어로 소통을 계속 해왔다.

- 할리우드나 외국 작품에도 욕심을 부릴만한데.

▲ 전혀 욕심이 없다. 여기서 잘 하기도 힘들다. 외국에서 누가 나를 원하나. 이번 영화처럼 매혹을 느끼고 도전할 만한 근거가 있다면 모를까 외국 진출 이유를 모르겠다. 여기서 하는 것도 벅차다.

- 작품을 대할 때 매번 완벽에 가깝도록 연구하고 연기하는 것이 느껴진다.

▲ 절대 완벽주의자가 아니다. 그나마 일을 할 때는 예민하게 한다. 한시현이야 강박증도 있고 그래서 한국은행 팀장도 했겠지만 저는 완벽주의자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힘든 성격이다. 배역이 그렇기에 그렇게 표현했을 뿐이다. 사실 배우를 하기에 참 부적합한 성격이다. 허술한 사람인데 이 일을 하다 보니 예민해야 한다. 배우라는 일은 또 그렇게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하지 않을 때는 그렇지 않다.

- 작품 활동 외에 어떤 일에서 행복을 느끼나.

▲ 삶의 목적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아닌 것 같다. 사실 뭐가 진짜 행복인지도 잘 모르겠다. 일을 할 때 불행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즐겁기만 하거나 행복하기만 하지는 않다. 일은 힘들고 어렵다. 정신 차리고 나서부터 이 일은 그렇게 해야만 최소한의 것을 해내고 버틸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가진게 별로 없나 보다. 나는 스스로를 좋아하지만 연기하고 있는 어느 순간 내가 싫어질 때가 있다. 그것 때문에 정말 그만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다. 나를 싫어하거나 미워하기 싫은데 일을 할 때 자책하거나 싫어지는 순간이 었더라. 누구나 그런 감정은 느끼기가 싫지 않나. 한 때 연기를 잘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궁금해서 매니저나 지인들에게 물어 본 적도 있다. 전도연은 평소에 뭘 하는지, 송강호 오빠는 평소 뭘 하는지 물어봤다.(웃음) 나는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했는데 같은 방식으로 한 게 문제가 됐나 싶어서 다른 방식으로 (연기를)하기도 하고 또 누가 새로운 과정을 제안하면 시도해보기도 하고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하면서 오늘 여기까지 왔다.

- 대중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나.

▲ 어릴 때는 연기 잘 하는 배우로 기억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제 스스로 가지는 막연한 감정이었는데 언젠가부터 그런 마음이 없어졌다. 제가 열심히 해도 관심이 없는 분들도 계시고 또 반면 제가 한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해주는 분들도 계신다. 관객과 대중이 그저 기억하고 싶은대로 해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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