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이 17일 개봉한다. 사진=CGV아트하우스
[스포츠한국 조은애 기자] 누구에게나 그런지는 모르겠다. 가끔은 이상하리만큼 바로 어제, 무슨 일을 했는지 무얼 먹었는지 까맣게 기억나지 않는 때가 있다. 조금 더 먼 과거의 기억은 방금 겪은 것처럼 생생한데 말이다. ‘버닝’의 세 남녀가 처음 만난 그 날도 어쩌면 기억하지도 못할 일상에 그칠 수도 있었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평범한 일상 속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낀 순간 시작된다.

이창동 감독의 8년 만의 신작 ‘버닝’은 친구 해미를 통해 미스터리한 남자 벤을 알게 된 종수가 인간의 본질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제71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다.

유통회사에서 배달 일을 하는 종수(유아인)에게 일상은 특별할 것 없다. 그러다 우연히 어릴 적 친구 해미(전종서)를 만나고, 종수는 해미가 여행을 간 사이 그녀의 고양이를 돌봐주기도 하고 벤과 어울리며 익숙지 않은 것들을 경험한다. 어느 날 해미와 함께 종수의 집을 찾은 벤은 자신의 비밀스러운 취미에 대해 고백하고 종수는 섬뜩한 예감에 사로잡혀 혼란을 느낀다. 영화는 갑갑한 일상을 살아내는 종수의 이야기로 시작해 해미, 벤의 시점을 옮겨가면서 인간의 욕망, 본능, 청춘 등에 대해 성찰하는 내용을 담았다.

말하자면 ‘버닝’은 비닐하우스의 의미가 무엇일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누구나의 마음 속엔 비닐하우스가 있고 저마다 다른 의미일 것이다. 종수가 희뿌연 비닐하우스 안을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건 누구나 갖고 있는 금지된 욕망, 혹은 본능을 들춰보는 것과 같다. 어느 날 해미가 사라진 이후, 종수는 취미로 헛간을 태운다는 벤의 말에 두려움을 느낀다. 진짜 있었을지 모를 우물처럼 실체도 없고 상황을 바꿀 능력은 더더욱 없지만, 종수는 시간이 갈수록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비닐하우스에 집착한다.

종수는 “재미있는 건 뭐든 다 한다”며 가끔 남의 헛간을 태운다는 기묘한 남자 벤을 경계하고 의심한다. 하지만 그가 태웠다는 비닐하우스를 찾아다니던 도중 바람에 나풀거리는 비닐 조각에 슬쩍 불을 붙이기도 한다. 순식간에 불길이 번지자 황급히 불을 꺼버리지만 내면의 무언가를 들키기라도 한 듯 종수의 얼굴은 더욱 불안해진다.

사진='버닝' 스틸컷
앞서 이창동 감독이 출국 전 기자회견을 통해 밝힌 “현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힌트에 집중해본다면 더욱 흥미롭게 볼 만한 요소들이 많다. ‘버닝’이 말하는 젊음은 쓸쓸하고 심지어 우중충하다. 마치 종수가 벤이 태운 비닐하우스를 찾아 달리는 새벽녘 안개처럼, 해미의 작은 방 창문 너머로 보이는 번듯한 남산타워처럼, 닿지 못하는 이상향 앞에서 끝없이 좌절하고 마는 게 젊음이다.

‘버닝’이 주는 재미는 크게 두 가지다. 곳곳에 널린 메시지와 메타포를 하나하나 해석하는 재미, 배우들의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을 보는 재미다. 관객들의 감정을 가장 먼저 이입시키는 종수 역의 유아인은 자신없고 먹먹한 청춘을 그만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뜨다 만 듯한 눈, 초점이 흐린 눈동자, 후줄근한 차림으로 무기력한 젊음의 한때를 그려내는가 하면 실체가 없는 대상에 대한 집착을 무섭도록 흡인력 있는 연기로 그려내기도 했다. 한국계 배우 스티븐연의 활약도 돋보인다. ‘워킹데드’, ‘옥자’ 등으로 국내 팬들에게도 친근한 스티븐연은 속을 알 수 없는 캐릭터로 ‘버닝’ 특유의 불안한 정서를 끝까지 이끌었다. 베일에 싸여있던 신예 전종서의 연기 역시 기대 이상이다. 그는 높은 수위의 노출신을 소화한 것은 물론 서글프고도 순수한 눈빛으로 갑자기 나타나 홀연히 사라져버린 해미를 그려냈다. 오묘한 매력의 이목구비와 신선한 장악력을 보여준 만큼 영화가 개봉한 후 더욱 크게 주목받을 것이란 추측도 무리는 없다.

원작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읽었더라도, 혹은 읽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만족할 만큼 짜임새는 좋다. 극 초반 느슨하게 당기던 줄을 점점 잡아 끌어 이야기의 골짜기로 힘껏 밀어 넣는다. 소설 특유의 흡입력을 잘 살려낸 것이다. 물론 중심 사건에 대해 모호하게 짚을 뿐이지만 지금껏 이창동 감독이 선보인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이다. 짧고도 강력한 결말도 인상적이다. 덕분에 ‘버닝’이 말하려는 미지의 진실이 자꾸만 궁금하고 극장을 나설 때까지 머릿속을 맴돈다. 영화는 17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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