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한산성'서 김상헌 역 열연

"이병헌·박해일 집중하며 뿜어내던 현장 공기 잊지 못해"

"향후 다시 나오기 힘든 퀄리티의 영화"

"비극적인 시대를 치열하게 산 어른들을 기억했으면"

사진제공=화이브라더스
[스포츠한국 모신정 기자]

말하기 힘든 묵직함이 인다. 러닝타임 내내 '남한산성'에 집중하고 있다가 놓여 난 뒤에는 가슴 속에 나라와 민족을 향한 고귀한 심성들이 술렁인다. 무려 381년 전 이야기이지만 여전히 열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전쟁 위기에 놓여있는 분단 상태의 한국 사회의 현재를 되돌아보게 된다.

김윤석, 이병헌, 박해일 등이 주연을 맡고 황동혁 감독이 연출한 영화 '남한산성'은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 당시 청 대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숨어든 임금과 조정 대신들, 그리고 백성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적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숨어든 조선 왕실과 조정 대신들은 추위와 굶주림, 절대적인 군사적 열세 속 청군에 완전히 포위된 상황. 고립무원 상태 속에서 대신들은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과 청의 치욕스런 공격에 끝까지 맞서 싸워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으로 나뉘어 철저히 대립한다. 청의 무리한 요구와 압박은 거세지고 인조(박해일)는 대신들의 대립 속에서 갈등하는 스토리를 그렸다.

연기에 있어서 그 누구 하나 부러울 것 없는 배우 김윤석(49)이 배우 데뷔 29년 만에 처음으로 정통 사극에 도전했다. 인기 작가 김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남한산성'인 만큼 원작 팬 층이 두텁다는 점과, 승리의 역사가 아닌 굴욕의 역사를 다뤘다는 점, 상상이 가미될 수 없는 실화가 바탕이라는 점 등에서 여러 가지 위험요소를 안고 있었지만 말과 말이 마치 칼과 창, 방패처럼 부딪히는 2시간은 손에 땀을 쥐고 남한산성의 고립무원 속에 함께 놓인 긴장감을 가지게 한다. "역시 김윤석"이라는 말이 절로 흘러나온다.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윤석은 '남한산성'에 대해 "흥행 영화에 들어가야 한다고 흔히 일컬어지는 양념과 조미료를 전부 배제한 영화다. 향후 몇 년 동안 이런 퀄리티의 영화는 나오기 힘들지 않겠나. 캐릭터와 이야기의 힘을 끝까지 밀어 붙인 이런 귀한 영화를 했다는 게 뿌듯하다. 황동혁 감독에 대한 믿음으로 선택했고 황 감독은 그 믿음을 확인시켜 줬다"고 말했다.

- '남한산성'을 선택한 이유는.

▲ 황동혁 감독에 대한 믿음이 컸다. '수상한 그녀'도 좋지만 '마이파더'도 좋게 봤다. '도가니'도 좋았었다. 황동혁 감독을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남한산성'은 황 감독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했다. 원작 소설을 시나리오로 각색도 직접 자기가 다 했다. 그를 한 번 보라. 정말 "바짝 말랐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처음 시사회에서 배우들이 함께 영화를 보고 나서 10분 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정말 영화의 마침표까지 끝까지 밀어 붙였다. '제대로 한 판 밀어 붙였구나' 싶더라. '결국 메이드 시켰구나' 싶었다. 나는 정말 좋았다. 근래 보기 힘든 영화적 완성도가 나왔다. 시나리오를 봤을 때부터 느낀 건데 정말 도도하게 갔다. 웬만한 사람이면 하기 힘들다. 황동혁 감독의 절개가 정말 김상헌스럽더라.(웃음) 내가 본 감독 중 가장 오케이 사인을 시원하게 하는 감독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장 잘 알고 있기도 하다.

- 생애 첫 사극인데 전혀 아무 의심이 안 갈 정도로 당시 김상헌에 잘 어울린다.

▲ 처음부터 김상헌, 최명길 두 역할을 놓고 이야기가 있었는데 결국 내가 김상헌을, 이병헌이 최명길을 맡게 됐다. 역할을 놓고 다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영화와 소설이 다른 부분이 있다. 영화 속 김상헌은 흠도 있지만 자기가 한 일을 끝까지 책임지는 인물이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고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영화에서는 청에 굴복하고 삼전도로 갈 때 할복을 시도하지 않나. 실제로는 일주일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목을 매달았다가 관량사가 극적으로 봐서 살려내고 다시는 관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고향으로 내려가서 지냈다. 이 집안의 핏줄이 특이한 게 김상헌의 형 또한 강화도에서 적군이 공격해 올 때 화약고에서 자폭한 인물이다. 김상헌은 고향으로 내려가 지낼 당시 형의 유해를 수습하러 간 일이 있다. 피가 굉장히 강한 자질의 형제였던 것 같다.

- 김상헌과 최명길의 대사가 칼과 방패처럼 부딪힌다. 격렬한 액션 장면을 보는 이상의 카타르시스가 생기더라.

▲ 그 부분이 이 영화의 귀한 장면 중 하나다. 두 인물의 대결은 나라를 두고 생각하는 마음은 같은데 결과적으로 행동은 너무 상반되지 않나. 사극으로서의 묘미가 상대를 마주 보고 대화하는 게 아니라 인조를 꼭짓점에 놓고 삼각형으로 대화하잖나. 아주 클래식하다. 마주 보면 주먹이 날아갔지. 임금에게 자기의 주장을 펼친다. 끝까지 감정이 이성을 넘지 않도록 자기주장을 펴는 게 독특하고 품격 있었다. 김상헌의 대사 중에 "전하 명길은 전하를 앞세우고 적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려는 자이옵니다. 죽음에도 아름다운 자리가 있을진대 하필 적의 아가리 속이겠나이까"하는 부분이 있다. 내가 인조였다면 "결론만 말해" 또는 "페이퍼로 해" 하지 않았을까.(웃음)

- 인조 또한 엄청난 갈등을 겪는 인물이다. 박해일이 세밀하게 잘 표현했더라.

▲ 김상헌 다음으로 인조가 매력적이더라. 인조는 굉장히 표현하기 힘든 역이다. 역사상 조선 최악의 임금이라는 평가부터 무능한 인물의 대표 격으로 평가 받고 있지 않나. 설마 그런 모습뿐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우리는 굉장히 결과론적으로 역사를 평가하지 않나. 남한산성에서 청에 무릎을 꿇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인조 자신도 왕이 되고 싶어 됐는지 살펴봐야 한다. 광해를 버리고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일등 공신이 최명길이다. 광해가 청과 명의 중립 외교를 펼쳤다면 인조를 왕으로 즉위시키고 친명 정책을 쓴 일등공신은 최명길이다. 그런데 청이 들어오니 다시 화친하자고 주장을 편다. 역사를 살펴보면 단순히 이원론적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것이 많다. 박해일이 그렇게 어려운 인조를 잘 표현했다. 섬세한 표정이 너무 좋았다. 박해일과는 늘 한밤중 술자리에서나 보던 사이인데 촬영현장에선 처음 만났다. 왕의 신분이지만 워낙 절박한 상황이고 백성들이 먹을 게 없어 말고기나 뜯어 먹어야 하는 상황인데 얼마나 가시 방석이었겠나. 또 김상헌, 최명길 두 신하가 좀 까칠했나.

- 김상헌과 최명길이 인조 앞에서는 극한의 대립각을 이루지만 둘만 있을 때는 서로 존중하고 예의를 갖추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현실 정치에서는 보기 드문 모습 아닌가.

▲ 행궁 밖에서는 서로 존경을 표하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지 않나. 산성 안에서 자기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두 사람 뿐이다. 나머지 대신들은 그저 처세에 능한 사람들이다. 김상헌과 최명길이 대쪽 같이 자기주장 펼친다. 그리고 서로의 결정이나 입장을 이해한다. 중간 중간 서로 지원 사격을 해주기도 한다. 김상헌이 인조에게 검단산에 봉화가 오르면 기습 작전을 펼치겠다는 내용의 격서를 도원수 진영에 보내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인조와 장수 이시백 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말이다. 날쇠에게 다녀오는 길에 최명길에게 그 내용을 넌지시 말해준다. 서로 나라를 원하는 마음은 똑같다는 걸 드러내는 장면이다.

- 영화의 도입부 눈밭을 걸으며 길 안내를 해 준 노인을 칼로 내리치는 장면이 꽤 인상적이다. 칼을 쓰는 자세도 매우 결연했고 이 영화는 시대극이라는 명제를 인식시켜 준다고 할까.

▲ 지난밤에 어가 행렬에 길안내를 해 준 노인이 쌀 한 톨 못 얻어먹었다며 내일 청군이 길 안내를 원한다면 그러겠다고 한다. 김상헌은 노인과의 대화에서 '이것이 백성이구나'를 깨닫는다. '먹고 자는 것만 해결 되면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백성이구나.'하고. 이들을 이 시련 속에 놔두어야 하는가, 이 사람을 그대로 놔두면 청의 군사들에게 길 안내를 해주겠다는 생각에 결국 죽이고 만다. 또 노인을 죽인 것이 김상헌에게 원죄 의식이 되고 결국 그 칼로 큰 결단을 내리게 된다.

- 조선 시대 속 강직한 사대부 역할을 표현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나.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연기력이어도 첫 사극 도전은 부담도 됐을 텐데.

▲ 연극을 워낙 오래 했다. 셰익스피어 작품이나 그리스 비극들도 많이 해봤고 오이디푸스도 했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사극이 그렇게 낯설지 않다. 현대극처럼 말은 줄이고 감정을 담는 것보다 정확한 논리로 마침표를 찍으면서 말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연극에서는 필요하다. '오랜만에 연극 연습 하듯 해볼까'하는 느낌이었다.

- 가장 어려운 대사는 무엇이었나.

▲ 사극에서 흔히 쓰이는 '아무도 없느냐'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였다. 이 대사가 내 입에서 나와야 하는데 너무 많이 들어 본 매너리즘에 빠진 대사여서 그렇게 똑같이 하고 싶지는 않았다. 듣거나 보는 입장에서는 잘 모르겠지만 말하는 사람에게는 독특한 포인트가 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에 진심의 마음을 담기 위해 다양한 톤으로 수백 번 내 말로 뱉어 봤다.

- 이병헌과 호흡은 어땠나.

▲ 그의 진중하고 진지했던 태도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또한 그런 태도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이병헌뿐만 아니라 박해일, 고수, 박희순 등 모든 배우들이 진지하게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배우들의 집중이 만들어내는 공기가 있었다. 나라의 위기가 목 끝까지 차있는 극단적인 상황을 연기해야 하잖나. 누구 하나 흐트러짐 없이 집중해서 연기하는 현장이었다.

- 승리의 역사가 아닌 패배의 역사를 영화의 소재로 한다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은데.

▲ 남한산성의 삼전도 굴욕에 대해 무능한 인간들의 역사로 치부해 버리는데 그 안에서 살아 보려고 노력했던 의로운 사람들에 대해, 목숨까지 내놓고 움직인 사람들에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김상헌, 최명길뿐만 아니라 극 중 대장장이 서날쇠도 실존 인물이고 이시백, 김유 모두 실존 인물이다. 어떻게 하면 이 나라를 최선을 다 해서 살릴 수 있을까 고민하는 어른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현대에서는 이런 어른들의 가치를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 흥행이 된 영화만이 잘 만든 영화로 평가 받는 시대다. 흥행을 해야만 좋은 영화인가 간혹 물음이 든다. 흥행 측면만 놓고 보자면 '남한산성'은 불리한 점이 많은 영화인데.

▲ 대작 영화들이 히어로물이거나 신파나 혹은 흔히 말하는 국뽕, 스펙타클한 액션, 각종 양념과 조미료를 많이 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캐릭터와 이야기의 힘만으로 밀어 붙이는 영화를 기획하고 또 투자를 받아서 완성했다는 게 정말 대단하다. 황동혁 감독도 대단하지만 투자사나 이런 분들도 대단하다. 갖은 조건을 붙이거나 요구가 따를 법도 한데 그런 것에 아랑곳없이 만들었다. 향후 10년 동안 이런 퀄리티의 영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여러 조건에서 가능할지 모르겠다. 우리끼리는 굉장히 귀한 결과물이 나왔다고 이야기한다. 관객의 호응이 참 중요한 게 그래야 이런 영화들이 또 만들어질 수 있다

- 올 겨울 하정우, 강동원과 함께 한 장준환 감독의 '1987'도 개봉 예정에 있다. 올 하반기 영화계를 책임지고 있는데 어깨가 무겁게 느껴질 것 같다.

▲ 그런 부담이나 짐은 '남한산성'은 이병헌과 박해일에게 '1987'은 하정우와 강동원에게 나눠주면 된다. 나는 괜찮다. (웃음)

- 영화 '남한산성'의 상황에 실제로 부딪히게 된다면 김상헌 쪽인가, 최명길 쪽인가.

▲ 나는 현실에서 철저히 반전주의자이다. 다만 지혜롭게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어른이 됐잖나. 그리고 나는 오래오래 살 거다. 손주도 꼭 볼 거고.(웃음)

- 그 많은 문어체 대사를 어떻게 외웠나.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 대본을 외우는 게 우리 직업의 일환이다. 대사 속 말을 외우는 게 아니라 상황과 감정을 외우는 것이다. 본인의 주장과 의지, 상황과 감정을 쭉 연결시키면 그 단어들이 얹어지는 것 같다. 그게 외워지는 거다. 현대극과는 또 다르더라. 어려운 한자어가 많다. 예를 들면 '참람한' 같은 단어들 말이다. 그런 단어들은 수시로 한자 사전을 찾아보며 공부했다. 소리 내어 읽을 때는 재미있더라.

- 병자호란 당시에 대한 공부를 했나.

▲ 역사서를 원래 좋아한다. 고전 읽는 것도 좋아하고. '남한산성'을 앞두고 임진왜란과 선조 당시부터 공부했다.

- '타짜'의 아귀나 '황해'의 면가처럼 캐릭터의 특성을 극대화시킨 역할들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었다. 어떤 캐릭터가 더 매력적인가.

▲ 아귀는 몇 번 나올 수 없는 패셔너블한 인물이다. 드라마와 관계없이 춤추듯 노는 인물이라면 김상헌은 드라마를 완전히 책임져 나가는 인물이다. 아귀는 내가 젊었을 때 연기했으니 임팩트도 있고 야한 면도 있었다. 캐릭터 자체가 책임질 게 없는 인물이다. 자기만 살면 되는 사람이다. 지금 그런 인물을 다시 연기하라면 쉽지 않을 거다. 역할의 측면에서 역사와 사실에 기인한 인물 쪽도 매력이 있다. 두 가지 캐릭터 모두 재미있다.

- 차기작 촬영에 한창인 걸로 아는데.

▲ 김태균 감독이 연출하는 '암수살인' 촬영을 하고 있다. 주요 촬영지가 부산이라 여름 내내 부산에 있었다. 감옥에 갇힌 살인범이 숨겨왔던 추가 살인을 자백하며 시작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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