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리틀빅픽쳐스
[스포츠한국 최재욱 기자] 직설적으로 내리 꽂는 화법보다 돌려서 우회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감독의 메시지를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주입하는 영화보다 가랑비에 속옷이 젖듯이 서서히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가 울림이 클 때도 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감독 김현석, 제작 영화사 시선, 공동제작 명필름)는 후자의 경우다. 전반부 정감 넘치는 소시민들의 일상으로 훈훈한 웃음을 주다가 후반부 강력한 반전으로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안겨준다. 세대와 계급에 따라 소통이 불가능해진 ‘불통의 시대’를 사는 우리 사회에 수줍게 “아이 캔 스피크(나는 말할 수 있다)”라는 소박한 말 한마디로 소통을 시도한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가 관객에게 건네는 진심어린 영어 세 마디를 살펴봤다.

#How are you?(잘 지내나요?)

이웃과도 안부 인사를 건네기 힘든 게 요즘 우리네 삶이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괴팍한 성격의 노인 옥분(나문희)과 융통성 없는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가 영어 수업을 매개체로 소통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삶 속에 교집합이 전혀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이 영어수업을 둘러싸고 티격태격하다 정을 나누게 되는 과정과 시장 재개발을 둘러싼 공방전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면서 아기자기한 웃음과 재미를 선사한다. 그러는 가운데 옥분이 굳이 왜 저렇게 힘들게 영어를 배우려고 하는지, 옥분이 민원 건수만 무려 8,000건으로 구청의 블랙리스트 1호가 돼가며 시장 모든 일에 관여하려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한 궁금증이 커간다.

옥분과 민재의 케미가 무르익는 순간 모두의 가슴을 먹먹하게 할 진실이 드러난다. 옥분이 위안부 출신이었고 미국 의회에서 위안부의 실상을 고발하는 연설을 하기 위해 영어를 배웠던 것. 가족의 외면을 받고 평생 홀로 살아와 사람과 소통하는 법을 잘 몰랐던 옥분이 민재에게 영어를 배우면서 피하려던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게 되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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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are really good-hearted(넌 참 착해)

독한 영화가 판을 치는 최근 충무로에서 ‘아이 캔 스피크’는 오랜만에 선한 기운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정화시켜준다. ‘광식이 동생 광태’, ‘시라노:연애 조작단’, ‘쎄시봉’ 등에서 특유의 낭만적인 유머 감각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김현석 감독은 기존 위안부 소재 영화와 다른 따듯한 시선으로 민감한 소재를 다룬다. 위안부의 실상을 강렬하게 고발하기보다 아픈 과거를 지닌 할머니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삶에 지쳐 이를 외면하고 싶어 하는 우리의 양심을 건드린다. 유머와 비극을 오가며 깊은 감동을 이끌어내는 성숙해진 김 감독의 연출력이 빛을 발한다.

극을 이끌어가는 나문희와 이제훈의 연기 케미는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함이 없다. 나문희는 겉모습은 괴팍한 노인이지만 속마음은 상처투성이 소녀인 옥분을 소름 끼치게 완벽히 형상화하며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미 의회에서 피 맺힌 사연을 털어놓는 장면에서 나문희의 절절한 연기는‘대배우’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준다.

이제훈의 절제된 연기도 빛을 발한다. 올 상반기 개봉된 ‘박열’에서 보여준 넘치는 에너지는 없다. 대신 ‘대선배’ 나문희를 받쳐주는 임무로 영화의 중심축을 제대로 잡아주며 한층 더 성숙된 연기력을 과시한다. 러닝타임 내내 서로 밀어주고 이끌어주는 두 배우의 연기 케미가 관객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덥힌다.

#You must speak about it(너는 그것에 관해 말해야 한다)‘아이 캔 스피크’의 조미료가 전혀 없는 선한 미덕은 빠르고 독한 요즘 영화 트렌드와는 거리가 분명히 있다. 극중에 등장하는 갈등과 난관도 영화 속을 흐르는 ‘선한 의지’를 절대 이길 수 없다. 이런 부분이 현실성이 없어 보일 수 있지만 도무지 반성할 줄 모르는 이들의 태도에 상처받는 국민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또한 만든 이들의 용기와 따뜻한 마음이 관객들의 마음에 전이되며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올바른 미래를 위해서는 위안부 문제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걸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과거가 양국 관계 발전의 발목을 잡는 게 아니라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고 치유해야 진정한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알려준다.

큰 목소리를 내야 일이 해결된다는 인식이 팽배한 요즘 시대에 조용히 상냥하게 말하는 것이 더 효과적임을 알게 해주는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올 추석 온 가족이 함께 큰 감동을 나눌 수 있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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