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이아이피'서 국정원 요원 박재혁으로 변신

멋스러운 느낌 덜고 김명민·이종석과 균형 맞춰

나이들어도 현장에 남아 롱런하는게 꿈

배우 장동건이 스포츠한국과 만났다.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스포츠한국 조은애 기자] “세기의 미남이요? 예전만큼 자주 못 들어서 요즘은 반가워요. 잘생겼다는 말, 전 지금도 좋아요.”

장동건의 이미지는 그랬다. ‘연예인들의 연예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큼 잘생겼지만 어딘지 다가가기엔 좀 멀게 느껴지곤 했다. 최근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장동건은 입을 열 때마다 예상을 깨는 인물이었다. “잘생긴 게 진리”라는 능청스러운 자화자찬으로 분위기를 풀고 친근하게 소통하는 그를 보며 어쩐지 의외의 면을 발견할 것만 같은 기대가 생겼다.

장동건이 주연을 맡은 영화 ‘브이아이피’(감독 박훈정)는 국정원과 CIA의 기획으로 북에서 온 VIP 김광일(이종석)이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면서 그를 은폐하려는 자, 잡으려는자, 복수하려는자 등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네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신세계’ 박훈정 감독의 신작이자, 장동건에게는 ‘우는 남자’ 이후 3년 만의 복귀작이다. 그가 맡은 국정원 요원 박재혁은 어지러운 남북관계 속에서 국가권력의 딜레마를 상징하는 인물로, 그의 임무는 북에서 온 VIP 김광일(이종석)을 비호하는 것. 이에 김광일을 쫓는 형사 채이도(김명민)와 북한 공작원 리대범(박희순)을 막아서지만, 사건의 진실에 다가갈수록 내적인 혼란을 겪게 된다.

“박재혁은 네 명의 주인공 중 유일하게 변화하는 인물이에요. 야비하지만 정의로운 면도 있어서 쉽진 않았어요. 그래도 감정의 진폭이 크고 다채로워서 연기할 맛은 났죠. 주력했던 건 멋을 덜어내는 작업이었어요. 멋있고자 하는 욕심은 좀 덜고, 다른 배우들과 톤을 맞추는 게 목표였죠. 저는 특히 현장 요원일 때와 사무직일 때, 두 가지를 연기해야 해서 눈에 띄는 변화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사무직일 땐 안경을 쓴 건데, 제가 안경이 진짜 안 어울리거든요. 그나마 자연스러운 걸 고르느라 100개 정도 써본 것 같아요.”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장동건이 연기한 박재혁은 극중 유일하게 딜레마를 겪는 인물이다. 그는 언뜻 평범한 캐릭터처럼 보이지만 목적과 의지가 뚜렷한 다른 인물들에 비해 몸과 마음이 계속 따로 논다. 일견 답답하거나 찌질하다는 인상을 줄 만큼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뜸들이고 고민한다. 이에 통쾌한 맛이 떨어진다는 평도 있지만, 장동건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박재혁은 그렇게 쫓던 상대를 눈앞에 두고도 쉽게 총을 못 쏴요. 긴박한 순간에도 감정을 누르고 가장 유리한 처신을 고민하는 현실적인 사람인 거예요. 보통 사람들이 자꾸 캐릭터를 선악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편견에서 조금만 벗어나보면 답이 나와요. 박재혁은 회사입장에선 능력 있는 좋은 직원일 수도 있거든요.”

‘우는 남자’, ‘태풍’, ‘태극기 휘날리며’, ‘해안선’, ‘아나키스트’ 등 주로 전작에서 총을 들고 피를 뒤집어 쓴 탓인지, 무채색 수트에 넥타이를 매고 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눈빛을 반짝이는 장동건은 낯설고도 신선하다. “아무래도 홍콩에서 촬영한 액션신이 대중에게 익숙한 제 모습일거예요. 총으로 하는 액션은 편해요. 예전에 ‘우는 남자’를 촬영하면서 미국 FBI 훈련소에서 3박 4일간 훈련을 받은 적도 있고요. 이번엔 총을 들되 너무 멋지지 않게, 첩보원보다는 고된 업무에 찌든 회사원의 느낌을 주려고 노력했어요.”

현장에서 뛰던 박재혁은 기획 귀순 건을 처리하면서 사무직으로 올라간 인물이다. ‘승진’이라는 현실적인 욕망을 가진 박재혁을 연기하며 장동건은 스스로 욕망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됐다. 잘생긴 외모와 커리어, 아름다운 아내와 예쁜 아이들까지 남자로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듯 보이는 그는 “확실히 예전보다 욕심은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보통 사람의 욕망이란 게 결핍에서 나오고 그게 성장의 바탕이 되죠. 근데 과거의 전 욕심이 너무 과해서 부자연스러웠던 것 같아요. 언젠가부터 힘을 좀 빼고, 멋도 좀 덜어내고 연기를 즐기는 것에 집중하다보니 편해졌어요. 항상심은 가지되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늘 가져야 하는 것 같아요.”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착하게 생겼다’는 말에 반항 심리가 발동한 그는 한때 일부러 거친 캐릭터만 택할 만큼 고정적인 이미지를 깨고자 몸부림쳤다. 타고난 외모를 마치 극복해야 하는 숙명처럼 느낀 시간들은, 이제보니 배우로서 한계점을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외모가 주는 역할의 한계는 누구에게나 공평해요. 바꿔 말하면 못생긴 배우에게도 한계니까요. 배우로서의 가치는 재능이나 노력에 달렸다고 생각하니 조바심이 줄어들었죠.”

올해로 데뷔 25년차에 들어선 장동건은 이제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생겼다. 최근엔 10년 만에 드라마로 복귀한 아내 고소영의 연기를 보며 크게 놀랐던 그다. “그렇게 잘할 줄 몰랐어요. 10년 만에 하는 건데 얼마나 부담이 컸겠어요. 근데 즐거워하는 걸 보니까 어떻게 저걸 참고 살았나 싶더라고요.” 예상치 못한 순간에 흘러나온 아내 자랑에 인터뷰 현장은 웃음바다가 됐다. 하지만 장동건은 자상한 남편이자 다정한 아빠가 되는 길을 고민하는 가정적인 남자였다. “이제 아이들이 좀 커서 부모가 뭘 하는 사람인지 대충 알아요. 신경을 많이 써야 할 때인 것 같아요. 얼마 전엔 아들한테 ‘연풍연가’를 보여줬어요. ‘엄마아빠가 나온거야’라면서 자신있게 보여줬는데 아들은 오글거린다고 눈을 가리더라고요. 애들이 볼 수 있는 작품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이들을 이야기하는 그는 편안해보였다. ‘시대를 풍미한 톱스타’라는 스포트라이트에서 한 발짝 비껴선 그의 행복은 소박했다. “하루 24시간 중 기분 좋은 시간을 늘리는 게 행복이래요. 그래서 취미로 3년째 사진을 찍고 있어요. 애들을 사진으로 찍을 때 참 좋아요. 몸으로 놀아주는 건 30분 지나면 도망가고 싶거든요. 그럴 때 사진 찍고, 그 사진을 나중에 들여다보면 또 행복한 거죠.”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40대 중반이 된 그에겐 여느 중년과 다름없는 삶의 무게가 생겼다. 집에서, 또 일터에서 지나온 시간만큼 책임져야 할 것들이 늘었다. 그런 가운데 ‘브이아이피’에서 만난 후배 이종석은 장동건에게 불안하고 열정적이었던 20대를 떠올리게 했다. 과감히 연기 조언을 구하는 이종석이 기특했지만, 장동건은 “어쭙잖게 충고하는 선배가 되긴 싫다”고 강조했다.

“종석이가 ‘브이아이피’를 선택한 이유가 심정적으로 이해가 가요. 저도 ‘해안선’ 때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 친구가 지금 변화의 욕구가 있구나’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죠. 종석이는 현장에서 본인의 약점을 다 드러내고 ‘도와주세요’라고 스스럼없이 말할 줄 알더라고요. 선배로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 만큼 예뻤어요. 하지만 충고나 조언은 늘 조심스러워요. 제가 선배라고 섣불리 충고하다간 실수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충고란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게 먼저니까요. 후배들에게 말 대신 몸으로 보여주는 선배로 남고 싶어요.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오래 보여주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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