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간 냉전의 기운이 한창이던 1960년대 전 세계 팬들의 열화와 같은 인기를 누렸던 스파이액션 TV시리즈 ‘맨 프롬 U.N.C.L.E.'(The Man form U.N.C.L.E.)의 미국 스파이 나폴레옹 솔로로 나왔던 로버트 본이 지난 11일 백혈병으로 83 세로 타계했다.

그는 생애 70여 편의 영화와 여러 TV작품에 나왔지만 로버트 본 하면 본명보다 더 유명한 것이 나폴레옹 솔로다. NBC-TV가 지난 1964-68년까지 방영한 이 시리즈는 국제적 스파이들로 구성된 첩보기구 U.N.C.L.E.(‘법과 집행을 위한 연합 네트웍 사령부’의 머리글자)에 소속된 솔로와 그의 동료인 소련 스파이 일리아 쿠리아킨(데이빗 매컬럼 83)의 활약을 그린 것.

시리즈가 방영되자 인기가 천정부지로 치솟아 두 배우에게 한 달에 70,000여 통의 팬레터가 날아들었고 1965년 비틀즈가 LA를 방문했을 때 본과 매컬럼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시리즈가 성공을 한 배경에는 ‘제임스 본드’시리즈의 히트가 놓여있다. 냉전 분위기에 걸 맞는 ‘007’시리즈가 히트하면서 이 시리즈를 본 따거나 풍자한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솔로’시리즈도 그 중 하나다.

이 때 나와 인기를 얻은 또 다른 TV시리즈로는 흑백 2인조 스파이 빌 코스비와 로버트 컬프가 나온 ‘아이 스파이’와 단 애담스가 실수연발의 스파이 맥스웰 스마트로 나온 ‘겟 스마트’ 등이 있다. 그리고 본드영화를 모방한 다른 영화들로는 딘 마틴 주연의 ‘맷 헬름’시리즈와 제임스 코번이 나온 ‘플린트’시리즈 등이 있다.

‘본드’시리즈가 어른들을 위한 첩보물이라면 ‘솔로’시리즈는 아이들 장난처럼 가볍고 경쾌하고 코믹한데 시리즈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자 TV판을 확대한 영화를 무려 8편이나 제작, 개봉해 이 역시 히트했다. 나도 대학생 때 단성사에서 시리즈 중 하나인 ‘내 얼굴을 한 스파이’를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난다.

매력적이었던 것은 나폴레옹 솔로라는 이름과 본드역의 션 코너리를 연상시키는 세련되고 멋진 모습의 본 그리고 본과 노랑머리의 똑똑하고 야무지게 생긴 앳된 얼굴의 매컬럼의 찰떡콤비 및 냉전시대 적지간인 미국과 소련의 스파이가 동지가 돼 세계를 말아먹으려는 악인들을 처치한다는 얘기도 흥미 거리였다.

솔로와 쿠리아킨의 뉴욕본부는 위장한 양복점으로 둘의 상관은 영국인 웨이벌리. 웨이벌리는 본드의 상관인 M이요 솔로의 적 ‘스러시’는 본드의 적 ‘스펙터’이며 웨이벌리의 비서 겸 교환수는 M의 비서 모니페니인 셈이다. 이 밖에도 솔로가 플레이보이라는 점과 솔로가 쓰는 펜라디오와 단추폭탄을 비롯해 메인타이틀 전의 액션 시퀀스와 제리 골드스미스의 박력 있는 음악 등 ‘솔로’시리즈는 철저히 ‘본드’시리즈를 모방하고 있다. ‘본드’소설을 쓴 이안 플레밍이 TV시리즈 시작에 관여했으니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내가 로버트 본을 처음 보고 매력을 느꼈던 것은 ‘솔로’영화가 아니고 율 브린너가 주연한 ‘황야의 7인’(1960)이었다. 그는 여기서 일곱 명의 건맨 중 한 명인 리로 나온다. 말끔한 차림의 리는 술에 취한 채 맨 손으로 테이블 위의 파리 세 마리를 잡으려다 두 마리만 잡는다. 그는 이에 “옛 날엔 세 마리 다 잡았다”고 자신의 무디어진 손놀림을 자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또 영화에서 멕시칸 산적들의 총을 맞고 죽을 때도 매우 극적으로 죽는다.

본은 이 역으로 골든 글로브 신인상 후보에 올랐었다. 본은 이 밖에도 ‘솔로’시리즈로 두 차례 TV시리즈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폴 뉴만이 주연한 영화 ‘젊은 필라델피아인’으로 남우조연상 후보(오스카 조연상 후보작이기도 하다)에 오르는 등 영화와 TV를 합해 총 네 차례 골든 글로브상 후보에 올랐었다. 본의 영화로 잘 알려진 것은 ‘황야의 7인’ 외에 스티브 매퀸이 나온 ‘불릿’과 역시 매퀸이 나온 올스타 캐스트의 ‘타워링’ 등이 있다.

뉴욕에서 모두 배우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본은 어렸을 때부터 연기에 소질이 있었다. 5세 때 어머니가 가르쳐 준대로 ‘햄릿’의 독백 “투 비 오어 낫 투 비”를 극적으로 외웠다. 본이 6세 때 시카고에서 이 독백을 외웠을 때 참석자 중 한 사람이 브로드웨이에서 햄릿 역을 한 유명한 연극과 영화배우 존 배리모어. 배리모어는 본의 독백을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더 해, 아이야, 더 해”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본은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 맹렬한 반전논자로 린든 존슨대통령을 강력히 비판, 살해위협과 FBI의 뒷조사를 받기도 했다. ‘맨 프롬 U.N.C.L.E.'은 작년에 솔로로 헨리 캐빌 그리고 쿠리아킨으로 아미 해머가 각기 주연한 동명영화로 만들어졌으나 평과 흥행이 모두 안 좋은 졸작이었다. 온갖 위험과 음모 그리고 빗발치듯하는 총알을 피해 동부서주 하던 수퍼 스파이 솔로도 세월의 힘 앞엔 무기력하구나. 굿 바이 나폴레옹 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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