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킹 잠시 내려 놓고 영화 '스플릿'서 절대 악역

유지태 몰아붙이는 두꺼비 역 열연

"이경영-유지태 덕분에 배우들의 곧은 연기 노력 배워"

[스포츠한국 이동건 기자] '스플릿' 개봉 후 일주일이 지난 시점, 조금은 늦은 시기 정성화를 만났다. 이제 막 '킹키부츠' 공연을 마친 정성화에게 끊이지 않는 스케줄은 그의 묵직한 존재감을 증명해주는 지표다.

'올 슉 업', '맨 오브 라만차', '영웅', '레미제라블' 등 뮤지컬 팬이라면 정성화의 이름 석자만 떠올려도 온몸에 기분 좋은 닭살이 돋을 테지만 스크린의 중심에서 주목 받은 적은 손에 꼽히는 그다. 그래서 '스플릿'은 발판이 될 듯하다. 여러 단역을 거쳐 뮤지컬계 신으로 거듭난 정성화는 '스플릿'을 통해 아귀에 버금가는 악역을 탄생시키며 주연으로서의 무게감을 여실히 증명했다.

영화 '스플릿'의 배우 정성화가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장동규 기자 jk31@hankooki.com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성화는 8시간 연이어 진행된 인터뷰에도 피곤한 기색 없이 싱글벙글이었다. 팬들과도 가깝게 지내는 그의 소탈함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처음 만난 기자에게 감자칩을 권하는 모습은 더없이 정겹고 푸근했다. 사람 좋은 웃음과 호탕한 목청이 매력인 그와 인사만 나눴을 뿐인데 친한 동네 형 같은 온기가 전해졌다. 뒤숭숭한 시국 탓에 영화에 대한 관심도 적어지는 요즘 주연 배우로서 아쉬움이 있지 않냐고 운을 떼자 그는 "흥행은 하늘에 맡기는 것"이라며 영화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흥행성이 보장될 만한 영화도 흥행이 안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개봉한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아직은 흥행의 신이 내게 손을 뻗치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해요. 정상적인 경우라면 지금쯤 관객분들이 많이 왔어야 하는데… 잘됐으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정성화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에 대해서 어느 정도 증명했다고 생각해요."

악역 캐릭터에 대한 그의 만족이 맥없이 나온 말은 아니었다. 불운의 사고를 겪은 볼링계 전설 철종(유지태)과 볼링 천재 영훈(이다윗)이 힘을 합쳐 벌이는 도박판 승부를 그린 영화 '스플릿'(감독 최국희)에서 정성화는 입체적인 악역 두꺼비를 연기, 극의 긴장감을 밀도 있게 쌓아 올렸다.

특히 음모를 꾸미는 듯 싸늘한 미소로 시작해 유지태를 괴롭히는 억척스러움까지 그는 기존의 선한 이미지를 싹 지워버렸다. 섬뜩할 정도로 완벽한 비열함은 이미지 변신을 향한 갈증에서 비롯된 것 같기도 하다.

"배우들은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기 마련이에요. 고착화된 캐릭터를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있죠. 저 역시 다양한 캐릭터를 보여드리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크게 유명한 사람이 아니다 보니 무(無)의 상황인 거예요. 그래서 악역도 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거죠. 너무 좋아요. 특히 팬들이 '오빠, 왜 악역을 하셨어요'라고 얘기해주는 게 고맙고 좋더라고요. 댓글에서 '한대 때려주고 싶었다, 패주고 싶었다'는 이야기도요. '내가 원하는 대로 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웃음)"

1994년 SBS 3기 공채 코미디언으로 데뷔한 정성화에게 연기는 첫술에 배불렀던 작업이었을 수도 있겠다. 1999년 드라마 '카이스트'를 통해 선보인 연기력에는 갖은 호평이 잇따랐고 이후에도 좀처럼 태클이 걸려오지 않았다.

"차라리 뭐 하나가 엎어져서 '넌 쓰레기야, 진짜 못해'라는 소리를 들었다면 조금 더 빨리 발전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뭘 해도 고만고만하다는 게 제일 문제였어요. 스스로 만족스러운 적이 거의 없었고, 뭐가 만족스러운 건지도 몰랐어요. 어떻게 해야 배우적으로 완성되는 건지 자각이 없다 보니 발전할 계기도 없었고요. 그러다 보니 선배들로부터 '아예 밑도 아니고 되게 애매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게 굉장히 상처가 되더라고요. 그러던 중 뮤지컬을 만나면서 자신감을 찾게 됐죠. 또 그 자신감이 열정을 불사르게 했고요. 그런 점에서 뮤지컬을 만난 건 제 인생의 전환점인 것 같아요."

뮤지컬을 만난 뒤 연기에 대한 열정이 살아났다면, 연기의 깨달음과 재미를 준 건 현장에서 함께 호흡한 선배들이었다.

"첫 영화 '황산벌'을 찍을 땐 연기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죠. 그런데 '서부전선'이라는 영화에서 이경영 선배의 연기를 지켜보면서 이 장르를 사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것도 안 하는' 연기가 있다는 걸 느꼈죠. 개그맨 생활과 뮤지컬 활동을 해오면서 그런 게 있다는 생각을 못 했거든요. 뭐라도 표현해야 했죠. 그런데 이경영 선배의 연기를 보니 아무것도 안 하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어요. '이렇게 세밀하고 정직한 연기가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 뒤 영화가 부쩍 재밌어졌어요."

이번 작품의 상대역 유지태에게도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 만족할 만한 컷에도 재촬영을 요구하는 등 허투루 넘어가지 않는 유지태에게 그는 "처음에는 이해가 안 갔다"고 털어놓았다.

"유지태는 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내 마음에 동해서 연기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더라고요. 꼭두각시처럼 나오는 건 싫다는 거예요. 그동안 전 슥 넘어가곤 했는데 '그럼 안 되겠구나' 확실히 느꼈죠.(웃음) 폭력이 나오는 신에서도 유지태가 '형, 걱정하지 마. 때리는 척만 하면 거짓말인 게 들통나니까 빡 소리 나게 때려줘. 정말 부탁이야'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더라고요. '진짜 때린다'고 했더니 '형이 살살 치면 내가 오히려 형을 미워할 것 같아'라는 거예요. 그래서 '빡' 때리고 OK 커트가 나왔죠. 액션은 이렇게 해야 하는 거구나 깨달았어요. 저도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진짜 정직하게 해야 하더라고요. 송강호 선배가 예기치 않게 애드리브로 상대역을 때린 적이 있다는 이야기도 유지태에게 전해 들었어요. '이런 것들이 결과물로 봤을 땐 대단한 리얼리티로 다가와서 좋은 점도 있더라'라면서요. 영화배우가 정직하게 연기하기 위해 정말 많이 노력하는구나 느꼈어요."

인생 철학부터 연기, 집안 이야기까지 공유한 유지태를 비롯해 '스플릿' 촬영 현장은 배우들·감독과의 원활한 소통으로 화기애애했다. 출연진이 많은 탓에 서로간의 앙상블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즐거운 술자리로 나날이 돈독해졌다고. 상당한 수의 출연진 덕에 생긴 재밌는 에피소드도 있다.

"춘천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첫날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닭갈비 먹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그래서 철판닭갈비를 열심히 먹었는데, 다음 날 권해효 선배님이 첫 촬영을 하러 오신 거예요. 그래서 닭갈비를 또 한 번 먹었죠. 그랬더니 다음 날 이정현이 내려와서 '오빠, 나 닭갈비 먹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렇게 일주일간 매일 저녁 닭갈비를 먹었죠. 물릴 때까지요. 그런데 닭갈비가 다행히 덜 질리더라고요. 오늘 철판이었다면 내일은 숯불로, 모레는 카레 가루가 들어간 닭갈비를 먹는 식이었죠. 그리고 전체 회식에 돈을 낸다는 건 큰 부담인데, 유지태가 몇 번씩 계산하더라고요. '저 친구 대단하다. 와이프가 뭐라고 안 할까… 전 와이프에게 용돈 받아 쓰는데, 꿈도 못 꿀 일인데'라는 생각이 들었죠.(웃음) 그런데 어느 날 유지태가 '형 한 번 내야 하지 않겠어요?'라고 하더라고요. 와이프에게 결제받느라고 힘들었어요."

이에 "전체 회식은 보통 얼마씩 드냐"고 묻자 정성화는 혀를 내두르며 또 한 번 너스레를 떨었다.

"꽤 들더라고요. 사람이 되게 많아요. 그리고 꼭 산다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하나둘씩 모여요. 7~80명 정도였는데, 냉면도 먹어야 하고 2~3인분씩은 먹어야 하니 2~300만원은 족히 깨지더라고요. 그래도 앞으로도 회식비를 내야겠다 싶더라고요. 전후 대접이 달라졌어요.(웃음)"

영화 '스플릿'의 배우 정성화가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장동규 기자 jk31@hankooki.com

차근차근 관객 스코어를 더해가고 있는 '스플릿'은 입소문을 통한 흥행만이 남았고, 세상에 싸늘한 새 얼굴을 내놓은 정성화는 오는 1월 16일부터 공연하는 뮤지컬 '영웅' 준비로 바쁜 스케줄을 이어간다. 개그맨에서 배우로 배우에서 뮤지컬 스타로, 또 우직한 사내에서 지독한 악역으로… 그야말로 매 순간이 무한도전인 그에겐 공연 준비 외에도 고민 중인 것들이 많다.

"제가 멀리 보고 있는 작업 중 하나는 제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에요. 제가 가진 장점을 살려서 아주 조그맣게 쇼를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음반 작업도 생각하고 있고, 그와 걸맞은 소극장 콘서트를 운용해보고 싶어요. 저만의 쇼를 지속적으로 개발해서 '정성화만 할 수 있는 것'을 오랫동안 해봤으면 좋겠어요. 전 5년 안에 완성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부지런히 하면 왜 못 만들겠어요. 지금이라도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휘뚜루마뚜루 하는 것보단 정성을 들이고 싶어요. 또, 먼 미래에는 백윤식 선생님처럼 관객들에게 믿음을 주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도 있어요. 나이가 들수록 조금씩 세상과 타협하고 나이와 타협하려 하면서 그게 어려워지거든요. 계속 발전하고 노력하는 훌륭한 원로배우분들이 많은데, 그게 제 모습이었으면 좋겠어요. 쇼도 하고, 뮤지컬도 하고… 오랫동안 사랑받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특히 뮤지컬계에 애정이 가득한 정성화는 뮤지컬 영화의 성공 가능성에도 낙관적인 시선을 드러내며 참여 의사를 밝혔다.

"윤제균 감독님과 얘기하던 중 국내 영화가 소재 고갈에 부딪히면 갈 수 있는 길이 몇 가지 없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윤 감독님은 SF영화와 뮤지컬영화가 길이 아닐까 싶다고 얘기하시더라고요. 그런 시대가 온다면 정성화 씨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다고요. 저도 그런 작품이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독립영화 또는 단편영화를 통해 많은 시도가 이뤄졌으면 좋겠고, 그런 상황이 오면 저도 참여하고 싶어요. 영화 연기에 뮤지컬을 접목할 수 있는 방법이 뭔지도 찾아보고 싶고요. 해외에도 쇼(show)적인 뮤지컬은 많은데, '레미제라블'처럼 쇼적인 부분을 배제한 극적인 뮤지컬 영화는 많이 없거든요. 이제 우리나라도 그런 부분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뮤지컬과 영화에 대한 노하우를 잘 쌓아왔으니까요. 둘을 잘 접목해 콜라보레이션하면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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