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플릿'서 볼링도박판 전전하는 볼링계 전설 철종 역 맡아

"서민의 애환 다룬 영화에 관심… 치열한 몸부림 흥미로웠죠"

[스포츠한국 이동건 기자] "저는 한 이미지에 갇히는 게 싫어요. 어떤 배우를 생각하면 멜로 영화에서의 웃는 모습밖에 생각나지 않잖아요."

배우에게 이미지 변신은 영원한 숙제다. 데뷔 20년을 바라보는 유지태 역시 충무로의 여느 거목들처럼 이 과업의 무게감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증명해왔다. 하지만 좋은 배우가 되고 싶다는 그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단다.

영화 '스플릿'의 배우 유지태가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장동규 기자 jk31@hankooki.com

4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배우 유지태를 만났다. 1998년 영화 '바이 준'으로 데뷔, '주유소 습격사건', '동감', '봄날은 간다', '올드보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심야의 FM' 등의 작품을 통해 역대급 캐릭터를 탄생시켜온 그가 이번에는 뒷골목을 전전하는 볼링도박판 선수로 관객을 찾는다.

들뜬 목소리로 기자를 맞은 유지태는 오는 9일 개봉하는 영화 '스플릿'(감독 최국희)이 개봉 예정일이었던 10일보다 하루 앞당겨진 것에 상쾌한 예감을 드러냈다. 아내 김효진도 적극 응원하고 있다고.

"아내가 시사회에서 '스플릿'을 보고 되게 재밌다고 하더라고요. '스플릿'은 제가 기존에 해왔던 영화들과 진행 방식이 조금 달랐어요. 감독님이 뚝심과 박력이 있어서 현장을 빠르게 진행하는 편이었거든요. 그래서 결과물도 허술하면 어떡하나 걱정 했는데 그 우려가 기대감으로 변하더라고요. 흥행 영화이면서도 색깔 있는 영화를 찍기가 어려운데, '스플릿'은 여러가지 요소가 적절하게 보이는 것 같아서 좋아요. 흥행만 남은 것 같아요. 목표 관객요? 천만 들었으면 좋겠죠.(웃음)"

'스플릿'은 불운의 사고를 겪은 뒤 도박판을 전전하던 볼링계의 전설 철종(유지태)이 자폐증을 앓지만 볼링 실력만큼은 천재적인 영훈(이다윗)을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 유지태는 최근 드라마 '굿 와이프'를 통해 '쓰랑꾼'이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키고 당당히 스크린에 컴백했다. 이쯤 되면 배우로서의 파급력은 웬만큼 보여준 것 같은데, 또 한 번의 캐릭터 변신을 노리며 다지는 각오가 심상찮다. 후줄근한 더벅머리에 꾀죄죄한 수염, 거기에 막걸리 병나발까지 분 유지태는 망가지는 자신의 모습에 왠지 모를 희열감까지 느꼈다.

"홍상수 감독님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찍으면서 망가지는 희열감을 느껴봤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망가지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완전 껄렁한 아저씨로 나오잖아요. 재밌기도 했고 즐기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사실 철종은 암울한 캐릭터인데 제가 희화화시킨 부분도 있어요. 그게 조금 더 유리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철종이 '사랑해요, 밀키스'라는 대사를 날리는 것만 봐도 참 허술하고, 껄렁하고, 실 없는 농담을 잘하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계속 폼 잡고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으면 영화 초반이 굉장히 지루했을 거예요."

경쾌한 볼링도박판으로 시작된 영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폐 성향을 가진 영훈과의 우정을 그리며 가슴 한 켠에 먹먹함을 남긴다. 촬영 종료 후에도 감정의 여운이 따라다녔을 것이 분명하다.

"전 작품 촬영 후 (후폭풍이) 세지 않은 편이에요. 인생의 방향이 뚜렷하고 제가 하고 있는 게 어떤 건지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요. 작품이 끝나면 바로 제 생활로 돌아와요. 공백을 안 두죠. 그렇게 힘들지도 않아요. 공부하고 운동하고 평소 밸런스를 잡는 저만의 루틴한 삶이 있거든요."

영화 '스플릿'의 배우 유지태가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장동규 기자 jk31@hankooki.com

강인한 정신력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볼링과 연기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마인드 컨트롤은 물론 외부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심지가 필요하다.

"영화 작업은 멘탈을 강하게 하는 최고의 일이에요. 주연배우로서도 감독으로서도 영화를 운용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기 센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는 곳이잖아요. 그 안에서 좋은 영화를 뽑아내고 앙상블을 이뤄내는 것이 쉽진 않죠. 모두 경험치가 있는 프로들이라서 누가 맞니 틀리니 하고 기 싸움을 하기도 해요. 하지만 전 자기 소신이 있더라도 소통할 줄 아는 게 배우의 덕목이라고 생각해요. 배우는 감독의 소신을 따라주는 게 중요하고, 감독은 수많은 부정적인 얘기가 나오더라도 중심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0년간 치열한 현장을 지켜본 유지태는 "전 어지간해선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필모그래피를 쌓아 올릴 때마다 배우에게 찾아온다는 속물근성도 부정적인 생각도, 그에겐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다. 이에는 어떤 교과서보다도 좋은 가르침을 준 영화의 역할이 컸다.

"세상을 보는 눈이 영화를 통해 더 명확해졌어요. 사실 도덕책이나 종교책들을 보면 고지식하고 현실과는 괴리감 있는 문구들이 많잖아요. 반면 영화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담기고, 제작자의 의도도 읽을 수 있어요. '가치관을 위해 만든 영화구나', '이런 철학을 담았구나'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죠. 그래서 영화만큼 좋은 지침서가 없어요. 물론 폭력과 성교 장면이 난무하는 안 좋은 영화도 있지만, 관객분들은 분명 분별력이 있어서 좋은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고 생각해요."

영화를 향한 그의 열정과 감사하는 마음은 곧 모범적인 행보로 이어지기도 했다. 첫 장편영화 연출작 '마이 라띠마'로 제15회 도빌아시아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는 등 감독으로서도 뛰어난 성과를 낸 유지태는 작품을 연출할 당시 제작비 3분의 1 이상을 스태프 인건비로 지출하고 제작사 지분을 나누는 등 합리적 제작 시스템으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전 그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았고, 연기가 절 이렇게 만들었고, 영화가 절 이렇게 바로잡아줬으니까 그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요즘은 신문고도 있어서 (제작 관행이) 많이 바로 잡혔는데요. 당시 희생을 요구하는 현장 분위기를 개선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그래서 어떤 게 가장 바람직한 방법인지에 대해 고민해보고, 잠시 대학원에 다니기도 했죠. 대학원에 다니면서 시선이 넓어진 것도 사실이에요. 처음에는 불합리함을 겪는 한국 스태프를 봤다가, 그다음 전체 비정규직 노동자분들을 보게 됐어요. 논문을 쓰겠다는 목표도 있었는데 너무 일이 많아서요. 우선 배우와 감독의 역할을 다하고 차후에 이쪽으로 공부를 해보는 것도 바람직하겠다 싶어요."

'마이 라띠마'에서도 드러났듯 그의 시선을 뺏는 키워드는 서민의 애환이다. 소설가 정도상의 작품부터 영화 '박치기'(감독 이즈츠 카즈유키), '증오'(감독 마티유 카소비츠), '이지 라이더'(감독 데니스 호퍼)까지 자유로운 영혼들의 몸부림에 흡입력을 느낀다는 그는 평범한 이들의 시선을 따라가고 싶다.

"제가 만들고 싶은 것도 서민의 애환을 그린 영화에요. 그들의 치열한 몸부림에 관심 있고, 그려내고 싶어요. 그런데 그게 꼭 우울한 것만은 아니에요. 그들만의 희노애락이 있거든요. 구둣발에 밟혀도 꿈틀대는 지렁이의 몸짓들이 저에겐 정말 흥미로워요."

영화 '스플릿'의 배우 유지태가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장동규 기자 jk31@hankooki.com

청춘의 아이콘에서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멜로보이로, 우울함의 극을 달리는 악역에서 속물근성 넘치는 교수로, 광기 어린 살인마에 테너 가수까지 돼 봤다. 소시민적 삶의 생동감을 옮기는 감독을 꿈꾸면서도 스펙트럼 넓은 배우에 대한 열망이 아직 가득하다는 유지태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문득 그의 첫인상이 스쳐 갔다.

맹물인 줄 알았지만 뚜껑을 따니 잔뜩 흔들어놓은 탄산수처럼 폭발하던 청년. 무색무취의 맑고 선한 인상이라고 치부했던 얼굴은 수없이 일그러지고 변형되며 관객들을 놀래켜왔다. "여러 경험과 이미지가 쌓였지만 계속해서 스펙트럼을 넓히며 좋은 배우의 면모를 가져가고 싶다"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연기의 원천을 묻자 후배들을 위한 현실적인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전 영화의 소재와 관련한 모든 작품을 참고해요. 각본을 받았을 때도 감독님이 어떤 레퍼런스를 보고 이 시나리오를 썼을지 생각하면 감이 생겨요. 막연하게 연기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라요. 신인 배우분들이 연기를 할 때 자신이 하고 싶은 영화에서 봐왔던 그림을 뽑아내려고 노력하거든요. 그런데 그러면 어색할 수밖에 없어요. 생경함이 생기죠. 그 생경함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려면 감독이 어떤 영화를 보고 그림을 그려냈는지 파악하는 것도 방법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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