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걷기왕'서 선천성 멀미 증후군 여고생 만복 역 맡아

개봉 소감 "긴장보단 설렘… '걷기왕' 통해 힘든 시기 이겨냈어요"

"연상호 감독 뮤즈? 차기작 '염력'으로 한 번 더 호흡… 감사해요"

[스포츠한국 이동건 기자] 공백 없는 활동도 모자라 파죽지세다. '써니', '수상한 그녀들'에 이어 '부산행'까지 심은경은 20대 여배우 중 관객수로는 탑을 달리며 최연소 흥행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화려한 수식과 높아지는 부담감은 그를 늘 주저앉고 싶게 했다. 그래서 즐기지 못했다. 세상을 알아가는 재미보다 성적표를 의식해야 했던 학생은 때론 무대에서 내려오고 싶었다. 겨우 사회초년생 나이에 여러 번의 대히트를 거두고 나니 아틀라스보다도 어깨가 무거웠다.

'걷기왕'은 심은경에게 쉼표 같은 작품이다. 자신이 쓴 일기에, 목청껏 부른 노래에 가슴이 아릿하면서 작은 위안을 받듯 가장 힘든 시기 영화가 그를 다독였다.

흥행퀸 심은경이 선택한 저예산 독립영화로 주목받은 '걷기왕'(감독 백승화)은 무조건 빨리, 무조건 열심히를 강요하는 세상에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는 선천적 멀미 증후군 여고생 만복(심은경)이 자신의 삶에 울린 경보를 통해 고군분투하며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애어른 같다'는 말에는 13년 차 경력으로 빚어진 이미지가 한몫했겠지만 밝고 똑 부러진 모습에서도 깊은 수심이 느껴졌기 때문일 거다. 그래서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운 감정이 컸다. 최근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심은경은 반갑게도 부담감은 많이 내려놓고 설레는 표정으로 기자를 맞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긴장되고 걱정을 많이 했을 텐데 이번에는 많이 설레요. 영화 자체에 감동을 받고 즐길 수 있었던 작품이 참 오랜만이거든요. 여러 가지로 많이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는데, 이 작품을 통해 고민을 많이 이겨냈고 극복했어요. 굉장히 즐겁게 촬영했거든요. 제 연기를 관객분들이 어떻게 봐주실지 기대돼요. 감독님의 디테일한 아이디어와 신선하게 꾸며낸 장면들도 너무 재밌게 봤고요. 빨리 많은 분에게 선보이고 싶어요."

듣는 이를 기분 좋게 만드는 상쾌한 에너지가 여전했다. 그간 어떤 고민이 그를 힘들게 했을지 이번 기회에 의젓한 발랄함보다 속시원히 칭얼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연기에 대한 고민은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것 같긴 하지만 '수상한 그녀' 이후 특히 고민에 많이 빠졌던 것 같아요. 큰 사랑을 받았고 흥행이라는 것도 느껴보고… 행복함과 동시에 많이 혼란스러웠어요. 연기를 할 땐 즐기면서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점이 가장 큰 것 같아요. 그로 인해 틀어진 부분도, 착오도 많이 있었고요. '연기라는 게 뭘까?' 답은 없는 거지만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죠. 심지어 어떤 순간에는 포기하고 싶었어요. 연기가 나의 길이 맞나 심각하게 고민했던 시간이 있었어요. 그러던 중에 '걷기왕' 시나리오를 받게 되고 촬영하면서 많이 힐링하게 됐죠. 연기에 대한 욕심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버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자신을 내려놓는 데 많이 도움이 됐고 그런 점에서 애정이 많이 가는 작품이에요."

2011년 미국으로 떠나 지낸 2년간의 유학생활에 대해서도 물었다. 연기든 배움이든 자신과의 싸움이 많았던 그에게 외로움도 컸을 것 같다.

"외로움이요? 당연히 있었죠. 유학생활을 하며 좋은 것들도 많이 얻고 연기하는 데 있어서 자양분을 많이 쌓아온 것 같아요. 하지만 타지에서 생활하다 보니까 저의 속내를 공감해줄 친구도 많이 없었고 학교생활을 적응하는 데 있어서도 어려움이 있었어요. 워낙 낯도 많이 가리고 영어도 서툴렀고… 공부하던 중이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들었던 때가 있었어요. '나는 뭘 잘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 빠지면서 사춘기가 시작됐죠. 지금 생각해보면 유학을 잘 다녀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좋은 것들도 많이 경험하고 힘들어도 봤잖아요. 감정적으로 많은 걸 쌓을 수 있었던 점이 연기에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연기적인 것뿐만 아니라 앞으로 견뎌내야 하는 고통들, 시련들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돼주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가 이번 캐릭터에 더 빠지고 쉽게 공감하면서 연기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또 만복을 연기하면서 새롭게 느낀 건 '10대 때 10대 연기를 하는 것과 20대 때 10대 연기를 하는 것의 차이가 분명히 있구나'라는 거예요. 10대의 경험을 되살려서 연기하니 더 여유가 생기고 캐릭터의 속내를 더 잘 들여다볼 수 있다고 해야 하나요. 고민도 덜하게 되고 비교적 마음 편하게 촬영을 했던 것 같아요. '경험이라는 게 연기에서 중요한 거구나' 다시 한 번 느꼈어요."

극 중 천진난만한 여고생 만복을 연기한 심은경은 칠칠찮게 사랑스러움을 흘리고 다니며 관객을 웃음 짓게 한다. 미워할 수 없는 빈틈투성이 캐릭터는 심은경의 일상 모습과도 똑 닮았다고.

"멀미하는 부분을 빼면 대부분이 일상생활에서 많이 녹여낸 모습들이에요. 친구들과 떡볶이 먹는 모습도 그렇고, 친구들과 대화하는 모습도 똑같아요. 만복 친구가 '어유, 바보 냄새'라고 하는 것처럼 제 친구들이 '너도 참 바보 같다'고 할 때가 많아요.(웃음) 만복 특유의 맹함이 저와 닮아있는 것 같아요."

꿈을 강요하는 사회에 치여 이리저리 헤매는 만복과는 또 다른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심은경은 한때 영화감독을 꿈꿨을 정도로 하고픈 것도 많고, 강한 집중력을 갖고 있다. 박주희는 "제가 맡은 수지 역은 자신의 꿈을 확고하게 밀어붙이는 인물인데 심은경이 그런 타입 같다. 끝까지 파고드는 모습에 '저렇게까지 노력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관심 있는 분야에선 집요한 것 같아요. 관심 없는 분야는 무신경할 정도로 너무 잘 몰라서 오해를 받을 때도 있어요. 하나에 빠지면 그것만 파고드는 스타일이거든요. 어릴 때 영화를 좋아하고 저만의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어서 감독의 꿈도 키웠었는데요. 쉬운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연기에 매진하고 있어요. 옛날에는 제 미래와 꿈, 이상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현실주의자가 된 건 아니지만 최근에는 제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이 들어요. 자꾸 제 미래를 꿈꾸다 보니 남들과 비교를 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자신감도 잃어가고, 잘하는 게 없는 것 같고… 한동안 잘할 수 있는 게 뭘까 많이 고민도 했었어요. 연기를 하고 있지만 연기가 부족한 것 같기도 하고 난 진짜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 이상적이고 꿈을 꾸는 것도 좋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의 일에 만족하고 할 일을 충실히 하면서 나에 대해 현실적으로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냉철하게 자신을 바라보니 배우로서의 이미지 브랜딩도 대담해졌다. 여기에 '걷기왕'은 작품 선택의 기준을 더 확고히 할 수 있게 했다.

"예전엔 학생 역할을 일부러 안 하려고 했어요. 아역 때부터 해왔고 어린 이미지가 고착되지 않을까 걱정돼서 일부러라도 아역, 학생 역은 잘 안 했는데 '걷기왕'이 그런 편견을 깨뜨린 것 같아요. '내가 학생 연기를 한다고 해서 아역배우 이미지가 남는 게 아니구나'라고요. 지금 나이에서 학생 연기를 하니 제 안에서 더 다양한 감정을 뽑아낼 수 있고 연기하기도 한결 더 수월해진 것 같아요. 지금도 학생 역할들이 종종 들어오는데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좋은 작품이라면 얼마든지요."

이번 영화에서 입덕 포인트로 꼽히는 수컷 소 캐릭터에 직접 안재홍을 추천하기도 했다. '로봇, 소리'에서 로봇으로 열연했던 심은경은 사석에서 만난 안재홍에게 "신드롬이 일어날 것 같다"며 목소리 연기 바통을 넘겼다.

"감독님은 소순이 역을 원래 중년 남자의 목소리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배우를 캐스팅할지 성우를 할지 아니면 아예 관객분들이 잘 모르는 목소리로 할지 고민을 많이 했죠. 감독님이 직접 연기하는 게 어떠냐는 말도 나오고 다 같이 고민을 많이 하던 중이었는데요. 갑자기 안재홍 오빠가 생각나서 넌지시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감독님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인물이라 괜찮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안재홍 오빠는 시나리오를 읽고 얘기해준다고 하더니 읽고 난 다음 날 바로 오케이해줬어요. 너무 흔쾌히 제의를 받아주기도 했고 저희 영화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요. 얼마 전에도 언론시사회가 끝나고 너무 고맙다는 문자를 했거든요. 오빠 덕분에 영화도 재밌게 나오고 소순이의 모습에서 오빠의 모습이 아른거린다고요. 그랬더니 '나는 그냥 담백하게 했는걸'이라고 답장이 왔더라고요.(웃음) 이 기회를 빌려서 안재홍 오빠에게 감사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밀정'의 이병헌 선배를 보고 송강호 선배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라고 했는데, 저희 영화는 안재홍 덕분에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에요.

좋다고 생각하면 열정적으로 팔 걷어부치고 나서는 모습이 좋다. 이런 기질 덕에 근 1년간 '로봇, 소리'의 무생물부터 '부산행'의 좀비, '서울역'의 애니메이션 연기까지 무대 한편에서 작품을 서포트한 작품이 많았다. 잠깐의 출연에도 심은경이 선사한 강렬함은 '부산행'에서 특히 빛을 발했다.

"'부산행'이 천만 관객을 돌파했을 때 '은경아, 천만 넘은 거 축하해라'고 문자가 오더라고요. '네? 전 잠깐 나왔는데'라며 당황했는데, 생각 외로 제 역할에 대한 관심과 좋게 봐주셔서 그때 좀 많이 감사함을 느꼈어요. '걷기왕'을 촬영할 때와 느낀 바가 일맥상통하는 것 같기도 해요. 제가 재밌게 즐기면서 촬영하니까 많은 분들이 알아봐 주시고 좋아해 주시는구나. 내가 이렇게 연기를 해야해나 보다. '즐기면서, 좋아하면서 해야 하나 보다'라고요. 그렇게 뜨거운 반응일지 예상을 못했어요. 절 못 알아보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워낙 머리카락이 쏟아지고 분장도 기괴하게 해서… 그런데 많이들 알아봐주시고, 깜짝 놀라주시고, 저 때문에 영화가 무섭다는 말도 나오고요. 심지어 그런 말도 있었어요. '심은경, 너만 안 탔어도 공유 오빠가 죽진 않았어. 너만 안 탔어도 그 많은 분들이 기차에서 죽지 않았어!'(웃음) 그런 댓글이 달릴 정도로 제 역할을 임팩트 있게 봐주시고 사랑해주셔서 감사하더라고요. '부산행'에선 잠깐 나왔지만 뭔가 제 영화 같은 느낌이 들고 연상호 감독님께도 감사하다는 말씀 전해드리고 싶어요."

연상호 감독의 차기작 '염력'에도 캐스팅을 확정 지으며 세 번째로 호흡을 맞추게 됐다. 연 감독의 뮤즈로 거듭난 소감을 묻자 그는 겸손하게 손사래를 치며 차기작 일정을 전했다.

"제가 뮤즈라기엔 정유미 언니도, 김수안 양도, 안소희 배우도 있으니까요. '염력'에선 감독님이 생각하는 캐릭터가 제가 맞아떨어져서 캐스팅해주신 것 같아요. 감사한 기회죠. 연상호 감독님의 개인적인 팬이거든요. '부산행' 때 감독님의 연출력에 놀랐던 부분도 많고요. 장면 장면을 굉장히 빨리 찍으면서도 배우의 연기를 캐치하는 능력이 뛰어난 분이라는 걸 느꼈어요. 다음 작품도 같이 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이렇게 또 좋은 작품으로 만나게 돼서 너무 좋아요. '염력'은 내년 상반기쯤 준비를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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