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 다룬 영화 '그물'로 국내 극장가 복귀 "청소년들 꼭 봤으면"

"영화산업의 상업성? 이젠 인정해야… 창작 원칙은 저버리고 싶지 않아"

"'봄여름가을겨울그리고봄'·'빈집'처럼 인간의 비밀 파헤치고 싶어요"

[스포츠한국 이동건 기자] 인간의 내면을 치밀하게 파고든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시선을 필름으로 옮길 땐 거침없이 칼을 휘두르는 베테랑 셰프처럼 과감하고 절도 있다. 그렇게 완성된 영화는 막 손질해 올린 생선이 여전히 살아 숨 쉬어 손님을 놀라게 하듯 생동감을 넘어 섬뜩함까지 느끼게 한다.

날것의 영혼이 깃든 음식이 올려질 줄 예상치 못한 손님들은 '왜 이런 불편함을 줬냐'며 유능한 요리사를 도마 위에 올리기도 했다. '악어', '나쁜 남자', '피에타' 등 수많은 작품을 통해 문제적 남자 꼬리표를 얻은 김기덕 감독은 그럼에도 20년간 묵묵히 칼을 갈고 할 일을 했다.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 '그물' 개봉을 앞둔 김기덕 감독을 만났다. 그간 필모그래피에서 신랄하게 드러난 감독의 날 선 시선이 자신마저 덮쳐버릴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베니스 거장의 생각은 한 사람을 미지의 세계로 인도할 것 같은 막연한 기대도 갖게 했다. 그리고 그 기대감에 걸맞은 이야기들을 김 감독은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김 감독은 오는 6일 개봉하는 영화 '그물'을 통해 남북관계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물'은 배의 원동기에 그물이 걸려 어쩔 수 없이 남북의 경계선을 넘게 된 북한 어부 철우(류승범)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 견뎌야만 했던 치열한 일주일을 담은 작품. 그의 작품 대부분이 청소년 관람 불가였던 데 반해 '그물'은 15세 관람가 판정을 받았다. 의외라는 반응이 많다. 호랑이 감독이 양처럼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학생들도 부모님의 손을 잡고 보라며 적극 권장하는 김기덕 감독, 더 많은 관객들과 소통하고 싶은 걸까.

"15세 관람가가 나올 거라고 상상을 안 했어요. 당연히 18세고, 더 나아가 제한상영영화가 나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죠. 왜냐하면 정말 무서운 건 폭력 자체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정말 무서운 건 체제에 대한 도전이죠. 부정적인 태도요. 이런 것들이 중국에서는 가장 불법으로 여겨져요.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완전히 관용적 태도를 보인 거예요. 이 영화를 보면 (남북) 둘 다 나빠. 나쁜 정도가 아니야. 한 인간을 완전히 갖고 놀잖아요. 사람을 서서히 잔인하게 죽이는 과정이잖아요. 이 얼마나 충격적인 내용이에요. 그럼에도 (청소년들에게) 이 영화를 보라고 한 이유는 다음 세대가 살 세상이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들의 숙제라는 걸 알려줄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수준 높은 생각으로 했다고 믿고 싶어요. 김기덕이 섹스라는 문제에는 브레이크를 걸어봤지만, 남북문제는 오히려 그분들 스스로의 문제죠. 그래서 청소년들이 보면 유해한 장면도 있지만, 그것이 결국 기성세대 다음으로 그들이 살아야 할 장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에 봐야 한다고 말한 거예요."

감독 스스로는 청소년에게 '유해'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말하지만 시사회 관객들 사이에서는 '많이 유해졌다'는 말로 되받아치고 있다. 시각적 테러로 여겨질 정도의 잔혹성을 보여줬던 그가 국정원 조사 중 재떨이로 맞는 철우의 모습은 커텐으로 가리고, 소소한 해프닝으로 웃음을 안기며 드라마를 조율하는 감각까지 선보였기 때문이다.

"전 그렇게 말씀하시는 자체를 사실 이해를 못 해요. 이 영화는 어느 영화보다 잔인한 영화에요. '피에타'에서 기계로 린치하는 장면처럼 폭력이나 피를 보여준다고 (잔인한 게 아니에요). 그런 게 잔인할 수도 있지만 전 '그물'처럼 한 사람의 영혼까지 몰아가는 과정이 더 잔인하다고 생각해요. 육체적인 기능을 죽일 순 있지만 영혼까지 죽이는 건 얼마나 잔인합니까. 다른 영화에서 폭력과 섹스는 스킨(skin)을 괴롭히는 정도지만 이 영화는 혼을 가장 가혹하게 괴롭히는 영화에요. 전 이것이야말로 잔인하다고 생각해요."

감독은 눈으로 마주하는 가학보다 인물의 내면 변화에 아린 느낌을 받는다. 철우의 생명력으로 표현됐던 섹스가 비통하게 변질되는 장면도 그렇고, 철우를 간첩으로 만드는 데 실패한 열혈 조사관(김영민)이 광적으로 애국가를 열창하는 압권 장면도 그렇다. 영화는 이데올로기 무대 위에서 파괴되는 개인과 그 주변 인물을 다각도로 살피며 주제의식을 강조한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애국가가 없었어요. 튈 수도 있는 장면이잖아요. 전 조사관이 잘못했다고 보진 않아요. 부장, 조사관 모두 자신의 입장과 관념적 트라우마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걸로 무장된 사람들이겠죠. 관객이 볼 땐 심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조사관의 입장에선 충분히 애국가를 비명처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야'라는 마음이잖아요. 이쪽에선 (간첩을) 잡으라고 하고, 억지로 잡다 보면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시계 안의 부속품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엽의 용수철 심 때문에 움직이고 있는 거잖아요. 부정할 수 없죠. 그런 것처럼 영화에 나오는 부장, 조사관, 진우가 각기 다른 시선으로 철우를 대해줘야 철우의 고통스러운 과정이 관객들에게 전달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결국 누가 나쁘고 좋다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이런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거죠. 분단으로 인해 생긴 의심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거잖아요. 우린 그것에 잡혀 꼼짝 못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전 관객분들이 철우를 자신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봐요. 그렇지 않고 보위부 요원의 시선으로 보거나 남한 조사관의 시선으로 이 영화를 보는 순간 왜곡되기 쉽다는 생각을 해요."

이토록 김기덕 감독이 남북문제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북문제를 다룬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풍산개', '붉은 가족'의 연장선상에서 '그물'을 만든 김 감독은 안전이 해결돼야 자신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전 두 가지가 두려워요. 하나는 지진에 의한 원전 문제, 또 하나는 전쟁. 이 두 가지는 제가 아무리 영화감독으로 개폼잡고 살아도 두려운 일이에요. 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 안전이 가장 중요하잖아요. 그다음에 뭘 지지고 볶고 할 수 있는 거지, 외세 강적들의 이해관계 안에서 우리가 희생되거나 자연재해로 재앙을 맞이한다면 너무 억울한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제가 쓴 시놉시스가 하나 있어요. '한반도 전쟁 방지단'이라는 비밀 팀이 있는 거예요. 아주 이전의 정권이 남북 합의 하에 만든 팀인데, 이 팀은 보이지 않는 팀이야. 물론 상상으로 만들어낸 거지만. 이들이 전쟁을 방지했다는 이야기를 한번 해보고 싶어요. 상업적인 영화가 될 것 같은데.(웃음) 제가 프로듀서로 나서고 감독을 선임할 수도 있겠네요. 어쨌든 위기감이 있어서 이런 소재를 생각하는 것 같아요."

늘 그랬듯 '그물'도 기획·촬영·연출 모두 혼자서 도맡았고, 자본력에 힘이 부쳐 촬영은 열흘 만에 진행됐다. 타이트한 촬영 일정을 따라와 준 모든 배우들에겐 미안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다.

"제작비가 없으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오랫동안 그렇게 해왔고요. 저에게는 다른 방법들이 아직 없어요. 그래서 제가 영화를 오래 못 찍는 거에요. 열흘 동안 바짝 해서 찍어야만 나와요. 한 달 하면 전 아마 말라 죽을 거에요. 단기간 촬영은 너무 힘들지만 어쩔 수 없죠."

이번에는 류승완 감독의 추천으로 인연이 닿은 류승범을 주연으로 내세울 수 있었지만, 원래 배우들을 캐스팅하는 데 있어서 큰 욕심을 내지 않는 김 감독이다. 과거 조재현과 다작을 한 이유 역시 다른 이유가 아니라 싼 개런티에도 그가 응해줬기 때문이었다.

"미국도 그렇고 한국영화도 배우 중심이잖아요. 배우들이 '당신 영화에 출연할게'가 우선원칙인 경우가 많아요. 그럼 자본이 들어오고 감독이 역할을 주는데. 전 오히려 반대인 것 같아요. 전 시나리오를 먼저 쓰고 스케줄이 되는 배우가 있으면 그 배우를 스토리에 맞추는 거지, 누굴 넣고 이야기를 쓰거나 누가 한다고 해서 영화를 만들진 않아요. 배우는 제 영화에서 물감의 역할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그 물감이 튀어나오지 않을 정도. 배우는 그림 안에서 자신의 역할이 있지만 그것이 너무 도드라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영화는 안 그렇잖아요. 배우가 징그럽게 연기를 잘해서 어떻게 보면 한 장면으로도 큰 점수를 줄 수도 있고, 관객도 만족하고… 하지만 전 얼굴이 알려져서 브랜드가 된 배우보다는 그렇지 않은, 현실에 정말 있을 것 같은 배우들이 더 좋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리고 유명 배우라도 그렇게 변신시킬 수 있다면 좋고요. 예전에 장동건이 '해안선'에 나왔을 때처럼요. 제 영화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운명적으로."

김 감독이 소위 '브랜드 배우'를 찾지 않는 건 제작환경이 받쳐주지 않더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겠다는 원칙을 세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은 너무 좋은 배우들이 많잖아요. 그런데 배우들이 하나의 기업이야. 하자고 해서 하는 게 아니라 복잡한 계약서를 써야 하고, 스케줄을 맞추기도 어렵고… 그러다 보면 거의 자연스럽게 합작이 되죠. 그것이 부담돼서 그렇게 못하는 거고. 어쨌든 영화를 하려면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게 맞는지, 아니면 메이저 기업과 협상해야 하는지 선택해야 해요. 좋은 배우들을 캐스팅하려면 메이저의 안을 수용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되면 제 의도 자체가 바뀔 수도 있는거고. 이건 제 고집 때문이 아니라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스크린 독과점 문제에 핏대를 세우며 '한국 개봉은 안 할 것'이라고 못 박았던 김 감독이 어느덧 영화시장의 현실, 상업성 문제에 대해 인정하고 있었다. '국제시장', '암살', '인천상륙작전', '덕혜옹주'까지 애국 코드와 맞닿은 상업영화들의 흥행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던지진 않았다.

"철학이 바뀐 거죠. 인정해야 하는 것 같아요. 나에게 적용할지 말지는 고민이지만, 영화가 그런 주제로 만들어지고 있고 또 어느 때보다 한국 영화가 예전의 사건을 끌어오기 시작해요. 그것들이 애국주의와 합쳐지며 엄청난 성과를 내고 있고요. 관객도 제공자들도 풍요로워지고 있죠. 다만 전 그런 영화는 못 하는 거죠. 제 영화의 태도는 그런 쪽이 아니어서. 전 어쨌든 창작이라는 기본 원칙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고민하고 싶어요. 이미 있는 이야기나 인물, 토대를 끌어와서 답습하는 게 제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요."

20년째 고수하고 있는 원칙처럼 바뀌지 않는 게 또 하나 있다. 바로 묶음 머리 헤어스타일과 고행(?)으로 완성된 빈티지 패션. 감독도 맛있게 수다를 떨 줄 안다. 가벼운 주제거리로 이야기를 옮기자 그는 어느 때보다 수더분한 얼굴로 비주얼 역사를 털어놓았다.

"헤어스타일이요? 난 몰랐는데 이게 멋있대요. 괜찮아요? 깎을까요? 어느 순간 제 몸에 신경을 못 쓰게 될 때가 있었어요. 몸을 만지는 것도 귀찮고. 폼 잡는 것도 다 의미 없고. 그래서 그냥 방치했어요. 머리카락이 길어서 묶다 보니까 이렇게 됐는데… 장단점이 있어요. 흰 머리가 너무 많이 노출돼서 늙어 보이기도 하고, 도사처럼 보인다는 말도 있고.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어울린다고 하니까. 전봉준 장군 닮았다는 얘기 듣냐고요? 그런 소리도 들어요. 그럼 나도 운동을 해야 하나?(웃음) 그런데 분명 좋은 점이 있어요. 언제 다시 이렇게 길러보나 하는 생각도 하고요. 자를 계기를 아직 못 찾았어요."

헤어스타일 소재 하나로 웬만한 방송인 못지않게 술술 풀어낸 감독은 기자가 "모자 썼을 때보다 훨씬 낫다"고 거들자 이야기보따리를 또 한 번 풀어놓았다.

"아, 그건 좋아요. 모자를 썼을 땐 뒷통수 살이 세 번 잡혀서 내천(川)자가 생겼어요. 모자를 쓰는 건 또 저한텐 공포스러운 일이죠. 그런데 제가 한번은 충격을 받은 적이 있어요. 술집이었는데요. 집에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가게 주인이 '야, 할아버지 가신다' 그러는 거에요. 쇼크를 먹어서 그 가게 다신 안 가요. 그리고 제가 영화를 보러 가면 '경로증 있으세요?' 하고 물어보더라고요. 내가 이렇게 보이는구나. 내가 짧은 캡모자를 썼으면 이런 얘기를 들었을까.(웃음) 물론 늙었다는 건 인정해야죠. 늙었으니까. 쩝."

차차 마음이 옮아가는 것을 느끼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부쩍 흘렀다. 영화 흥행도 메이저에도, 돈에도 관심 없다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감독으로서의 욕심을 묻자 그는 "욕심은… 너무 멋있게 말하는 것 같은데"라며 능숙하게 너스레를 떤다.

"영화를 통해 인간의 비밀을 보여주고 싶어요. 추상적인 말이지만 감독으로서 아직 보지 못했던 것들, 인간의 어떤 면들을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무엇을 통해 비밀을 풀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전 아직 그런 욕심이 있어요. 인간의 비밀이 아직 많다고 생각해요. 고고학에서 발굴해내는 것 같은 비밀은 아니고요. 인간이 가진 사고의 방향일 수도 있고, 인류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 어떻게 흘러가는지… 인간의 원형질에 대한 비밀일 수도 있어요. 이게 뭔진 모르지만 흥미로운 것 같아요. 그런 접근을 위해 고민하고 싶은 거죠. '봄여름가을겨울그리고봄'도 그렇고 '빈집'도 그렇고. 제 영화 한 편 한 편이 모두 그런 식의 접근이었던 것 같아요. 전 아직 인간의 비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물론 없을 수도 있고. 다 풀었을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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