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한국 이동건 기자] 김기덕 감독이 달라졌다. 쉽고 강렬하다. 김기덕 감독의 그물이 일반 관객을 끌어올리는 데 실패할 거란 선입견은 단숨에 무너졌다.

영화 개봉 소식이 들려오면 감독의 성향으로 미루어 작품에 대해 속단하기도, 무성의하게 "안될 거야" 하고 흥행스코어를 점치기도 한다. '그물'의 경우도 앞서 제7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제41회 토론토 국제영화제에 초청돼 현지에서 호평을 받았지만, 국내 흥행은 비관적으로 느껴졌던 게 사실이다. 김기덕 감독이 그간 필모그래피에서 보여준 잔혹성에 대한 관객들의 거부감, 난해하다는 반응, 외면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는 모조리 휩쓸면서도 자신의 이야기에만 몰두한 덕에 김기덕 감독은 돈 되는 영화를 좇는 극장가에선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피부에 와닿는 현실로 명확한 화두를 던지는 이번 작품에는 꽤 많은 관객이 반응할 것 같다.

오는 6일 개봉하는 영화 '그물'은 배의 원동기에 그물이 걸려 할 수 없이 남북의 경계선을 넘게 된 북한 어부 철우(류승범)의 치열한 일주일을 그린 작품. 철우는 10년을 꼬박 일해 장만한 배를 버릴 수 없어 남한에 흘러들어 가게 되고, 간첩이 아니냐는 국정원의 의심으로 일주일에 걸친 조사를 받는다.

만들어서라도 간첩을 색출해내려는 조사관(김영민)의 직업정신과 끝없는 압박에 철우는 지쳐만 간다. 철우는 북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그는 간첩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경위서를 몇 번씩 새로 쓰고, 이와 함께 귀순을 제안하는 갖은 오지랖에도 시달린다.

제 가족과 보금자리가 좋다며 돌려보내 달라고 울부짖어도 그를 불쌍한 인민 취급하는 사람들. 이들은 철우를 공화국에 세뇌당한 빨갱이 취급하며, 동정심만 있고 이해는 없는 폭력을 가한다. 그렇게 갖은 역경을 이겨내고 돌아간 고향에는 또 다른 시련이 철우를 기다린다.

'그물'의 가장 큰 장점은 남북관계를 솔직하게 직시하는 감독의 시선이다. 남북 주제 작품의 필수 요소인 동족상잔과 눈물을 걷어내고, 이데올로기 무대 위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개인의 모습을 가만히 따라간다. 한 줄기 가느다란 탯줄에 의지한 아기처럼 샤워실에 홀로 웅크린 철우의 모습, 자본주의에 기웃거렸다는 북측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명동 한복판을 헤매는 그의 모습은 한없이 쓸쓸하고 위태롭다.

영화는 이데올로기의 폭력에 내몰린 철우를 끈질기게 따라가며 마음을 뒤숭숭하게 한다. 그러면서도 블랙코미디처럼 간간한 웃음을 발생시키는데, 이에는 북한 어부로 완벽하게 변신한 류승범이 한몫 한다. 그는 슬픔 속에 웃음을 조화롭게 녹여낸다. 조사관에게는 "경위서를 또 쓰라고요?"라며 울상짓고, "아버지가 좋아하는 시였나 봐요?"라며 자신이 첩보를 전하는지도 모른 채 사건에 휘말린다. 기술이 완벽하면 예술이 된다는 말을 체감하게 하는 류승범의 연기력은 웃픈 상황을 자유자재로 그려내며 영화의 감정선을 조율한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불같은 성격이면서 한편으로 소시민적이고 친근한 모습은 남자들에겐 없는 모성 본능마저 만들어낸다.

교차점이라곤 없어 보이는 김기덕 감독과 류승범의 조합은 그렇게 태엽이 맞물려 돌아가듯 열흘 만에 '그물'을 탄생시켰다. 늘 마니아층의 것이었던 김 감독의 작품은 분명한 주제의식과 함께 즐길 만한 식감을 두루 갖추고 세상에 나왔다.

그간 김기덕 감독은 수십 편의 영화를 통해 강한 냄새를 풍겼다. 진한 비린내와 악취도, 과실이 열리는 듯 향긋한 냄새도, 등골 오싹한 피 냄새도…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고 나면 이 같은 냄새에 취해 늘 이상하게 무기력과 피곤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보편적인 정서로 짜인 이번 작품을 관객들도 조금 더 편하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고착된 분단의 역사를 짚어내기에 속이 쓰리지만, 대중이 걱정하는 소위 '문제적 작법'은 없다.

김기덕 감독은 국가 간 문제가 해결돼야 자신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가 그린 슬픈 자화상의 끝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빙긋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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