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서 지도꾼 김정호 역 맡아

"김정호의 민주화? 거창해… 단순한 지점에서 시작해야"

'삼시세끼' 출연 "우리만의 세상, 방송임을 잊게 돼"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의 배우 차승원이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 앞서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스포츠한국 이동건 기자] 내년이면 데뷔 30년 차다. 첫 런웨이에 선 고교 3학년 시절, 광택이 도는 워커 대신 낡아빠진 짚신을 신고 위인의 일대기를 그리게 될 줄 꿈에라도 알았을까. 이번 작품을 통해 지리학자 김정호의 발길을 좇은 차승원의 눈빛은 한층 더 농익은 모습이었다.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감독 강우석) 개봉을 앞두고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차승원을 만났다.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시대와 권력에 맞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 대동여지도를 탄생시킨 지도꾼 김정호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그린 작품.

코미디, 액션, 드라마 등 모든 장르를 거치며 천의 얼굴로 거듭난 차승원이지만 이번 작품은 유독 부담감이 컸다. 그도 그럴 것이 역사 속 인물을 연기하는 것은 배우에게 득보다 실이 많기 때문. 그럼에도 그가 이번 작품을 택한 것은 배우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배우로서 한 사람의 일대기를 따라가는 영화를 과연 몇 편이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위인이지만, 사람 김정호는 헐렁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도전해봄직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돌이켜보면 이번 작품을 찍으면서 나 자신도 내려놓게 되고, 많이 안정된 것 같아요. 마음도 편해지고 여러모로 생각도 많이 하게 되고… 이후에 몇 작품을 얼마나 더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런 작품을 거쳐 가면 더 단단해지겠죠."

카메라 앞에 서서 수십 수백 번 부딪힌 끝에 자신을 내려놓는 법을 알게 됐다. 내려놓는다는 건 배우에게 여유를 가져다주고 호흡을 더욱 매끄럽게 하는 윤활유 같은 거다.

"예전에는 뭔가 계산되고 정확한 연기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어요. 그리고 '몇 테이크 안에 수행해야 돼'라는 강박이 있었는데, 요즘은 여지를 많이 둬요. 내가 만약 어떤 지점까지 도달하지 못하면 '좀 있다가 더 잘하면 되는 거지'라는 생각을 해요. 그런 자세가 오히려 연기하는 데 훨씬 의외의 감정을 가져다주기도 하고요. 또 사람이 1분 안에도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까. 예전에는 그런 생각들을 가둬뒀는데 이번 현장에서는 저 자신을 더 내려놓고 문제를 해결하는 큰 그림만 그렸어요."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의 배우 차승원이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 앞서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이번 작품은 당초 '완전한 민주화를 꿈꿨던 인물'이라는 원작 박범신 작가의 평을 인용한 카피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차승원이 바라본 김정호 선생은 민주화라는 대의를 위해 지도 목판을 제작한 위인이라기보단 자신과 같은 처지의 이웃들을 사랑하는 한 명의 민초다.

"민주화라고 말하는 건 좀 거창하잖아요. 아주 단순한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부분을 공유하려고 했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김정호의 애민 정신'이라고 하니까 무슨 생각이 드냐면, 종교 같은 느낌이에요. 높은 데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 같은 거죠. '난 이만큼 높은 위치에 있고 너희를 보우하겠다' 느낌인데, 이건 아닌 것 같단 말이에요. 평민 출신인 사람이 나와 비슷한 불편을 겪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지도를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의 해석처럼 영화는 김정호의 위업을 강조한 카피와 달리 인간극장 김정호 편을 보듯 소탈하게 흘러갔다. 이에 대해 "카피와 영화평이 썩 다른데 걱정되지 않냐"고 묻자 차승원은 "그거야 마케팅팀한테…"라며 웃었다.

"그다지 무거운 영화가 아니라서요. 카피를 바꿔야 할 것 같아요. 말씀드렸듯 저도 처음부터 김정호 선생님에게 위인으로서 다가가지 않았고요. 업적의 위대함보다는 사람의 삶에 초점을 맞춘 영화에요. 이런 특징이 추석에 보기도 편할 것 같아요. 업적이 더 대단하게 그려졌으면 별로였을 것 같아요."

실로 '고산자'는 꽤 가벼운 영화다. 군데군데 심어진 개그 코드는 물론 예능 프로그램 '삼시세끼'에 출연 중인 차승원의 이미지 활용이 적극적이다. 극 중 차승원은 피나무를 톱질하던 중 "내 적성이 아니야"라며 톱을 던지고, "삼시 세끼 다 해줄 수도 있는데"라며 너스레를 떤다. 이 장면들은 애드리브가 아닌 강우석 감독의 연출이었다고.

"애드리브는 아니었어요. 감독님이 애드리브를 굉장히 싫어하시거든요. 그런데 사실 전 이 부분에서 갸우뚱했어요. 이런 개그 요소 하나하나가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잘 모르겠거든요. 그렇다고 '영화 때문에 이런 대사를 괜히 했나'라는 생각은 없고요. 그것도 저의 일부니까요. 시사회를 본 분들이 그렇듯 스태프분들 의견도 분분했는데,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넣은 거죠. 후반부 내용과의 완충 작용을 위해 이 장면들을 넣게 됐어요."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의 배우 차승원이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 앞서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영화에 활용될 정도로 차승원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예능에서 갈고닦은 '차줌마' 이미지다. 나날이 일취월장하는 요리 실력으로 후배들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는 그는 어느 때보다 대중과도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유해진에게도 말했지만 '삼시세끼'는 우리에게 일상적인 프로그램이에요.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찍어주시거든요. 서로 합의 하에 방송을 찍는 느낌이 아니에요. 그 공간 안에서는 각자가 연예인이 아니라 별개의 인물이라는 착각에 빠져요. 차승원, 유해진, 손호준, 남주혁이 아니라는 생각이죠. 그들만의 세상을 누군가가 찍어주는 건데, 유해진도 이에 대한 애틋함이 있고 기대감이 있으니 만재도 편에 합류하게 된 것 같아요. 힘들 때도 있지만 멤버들이 모였을 때의 소소한 재미가 있거든요. 우리끼리의 재미가 차곡차곡 쌓이다 보니 저도 더 편해지고, 뭔가를 덜하게 되더라고요. 방송이라는 것을 잊게 돼요."

'삼시세끼'에서, 그리고 같은 소속사에서 한솥밥을 먹는 남주혁은 롤모델로 주저 없이 차승원을 꼽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김우빈, 홍종현, 이태환 등 연기자로서 지평을 넓히고 있는 후배 모델들이 모두 그를 바라보며 꿈을 키우고 있다. 하지만 모델 출신 배우 1세대인 차승원은 후배들에게 길잡이 역할은커녕 조언 한마디까지 마다한다. 왜일까.

"후배들에게 뭘 어떻게 해야 한다고 얘기해주고 싶지 않아요.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잘하고 있는데, 제가 굳이… 오히려 조언을 하지 않는 게 그들에게 더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저 역시 선배보다는 동료, 이렇게 대해주는 게 더 좋고요.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 그들의 길이 있고 색깔이 있는데, 자꾸만 제가 걸어왔던 길이나 색깔을 그들에게 주입시켜서 내 색깔로 만들려는 건 굉장히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강요하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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