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 사진= 이규연 기자 fit@hankooki.com
[스포츠한국 장서윤 기자] "돈 없고 '가오'가 없어도 재미있으면 승자예요. 죽는 날까지 재밌게 사는 놈이 왕이란 얘기죠."

어느덧 예순을 바라보는 노감독의 목소리는 여전히 힘에 넘쳐있고 눈빛은 형형하다. 아직도 "하고 싶은 영화"와 "해야할 것"이 많다는 그이기에 영화 '동주'(감독 이준익 (주)루스이소니도스, 18일 개봉)같은 프로젝트도 가능했다. 총 제작비 5억원에 19회차 촬영으로 상업광고 하나 없이 세상에 나온 '동주'는 저예산 영화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만큼 잘 짜여진 완성도와 작품성을 자랑한다.

흑백의 화면 속에 한국영화 사상 처음으로 윤동주라는 인물을 재조명한 점도 박수받을 만하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평생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시인 윤동주와 독립운동가 송몽규의 빛나던 청춘을 오롯이 담아낸 이 작품은 노 개런티로 메가폰을 잡은 이 감독의 열정과 그에 감화된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힘 속에서 탄생했다. ▲ 사극에 일가견이 있는 이준익 감독이 이번에는 일제시대로 눈을 돌렸다.

사실 일제시대는 영화적 소재의 보물 창고다. 지난해 영화 '암살'이 성공한 것도 관객들이 이 시대에 관심을 갖는 촉발제가 됐다. 개인적으로는 20년 전 영화 '아나키스트'를 준비하면서 당시 시대에 대해 다방면으로 공부한 것이 이번에 많이 도움이 됐다. '아나키스트'는 흥행 면에서 실패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번 작품의 주춧돌이 돼 줬다. 일제시대를 영화화하려면 배우들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근과거이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풍부한 자료를 찾을 수 있기에 그만큼 대중의 비판의 잣대가 무섭기도 하다. 일제시대를 그간 부끄러운 역사라는 의식 때문에 외면해왔지만 그 시대를 알 필요가 있다. 윤동주의 시에 나와있듯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 ▲ 우문일지 모르지만 '왜 굳이 윤동주 영화를 만들었나'는 원론적인 질문을 해보고 싶다.

사실은 짜증이 나서 만들었다. 나는 외국 영화 수입을 많이 했는데 막상 외국에 나가 보면 한국의 역사와 전통과 문화를 너무 모른다. 이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준익 감독. 사진= 이규연 기자 fit@hankooki.com
우리는 그들의 언어와 문화 등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는데 왜 그들은 우리를 모르는가? 자존심이 상했다. 실제로 서양인들은 일본과 중국에 대해서는 잘 아는 반면 한국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동주'도 그렇고 내가 시대극에 집중하게 된 이유도 사실 그거다. 외국에 알리려면 최소한 자기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 윤동주 시인에 대해 특별히 영감받은 지점이 있나

몇 년 전 교토 영화제에 초대받았다 문득 윤동주 기념비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에 시비(詩碑)를 찾아갔었다. 일본이 죽인 조선 청년의 시비가 일본에 있는 걸 보니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했다.

더불어 그의 시가 나라와 민족을 뛰어 넘는 어떤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닐까 싶었다. 문제는 교과서에도 실려 있어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윤동주의 시를 '잘 안다'고 하는데 과연 그의 삶과 죽음에 대해 뭘 알고 있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생애를 모르고 윤 시인의 시를 좋아한다는 건 자기 걸 좋아한다는 것 밖에 안된다. 직접 교토에서 정지용 시인의 시 '압천'의 배경인 교토의 압천을 걸으며 윤동주가 이곳을 걷는 장면을 꼭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 흑백으로 담긴 영화가 색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것 같다.일제시대를 배경으로 영화로 찍으려면 북간도, 교토, 도쿄를 오가며 찍거나 세트로 지어야하는데 제작비가 감당이 되지 않았다. 역발상으로 저예산으로 찍자는 생각이 들었다. 독립영화계의 출중한 감독인 신연식 감독에게 아이디어를 얘기했더니 좋다고 하더라. 처음엔 예산 문제로 흑백으로 찍었는데 찍고 보니 인물에 대한 집중이 더 잘 되는 묘미가 있더라.

이준익 감독. 사진= 이규연 기자 fit@hankooki.com
▲ 감독은 연출자인데 제작비에도 신경을 많이 썼나보다.

오랫동안 영화계에 있으면서 마케팅, 제작자 역할을 모두 해 봤다. 영화에 투자되는 돈은 그냥 돈이 아니다. 그 돈에는 사람들의 사연이 꽉 차 있다. 누군가에겐 생활비고 누군가에겐 등록금이기도 하다. 한 영화가 망하면 그 돈에 매달려 있는 사연이 모두 날아가는 거다. 영화 '소원' 이후 내가 결심한 것은 흥행에 성공해 돈을 벌겠다는 게 아니라 돈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와 슬픔을 주지 않아야겠다는 지점이었다. 내가 '동주'라는 영화를 찍고 싶지만 이 영화로 상업적 실패를 하면 일단 윤동주 시인에게 미안하고 손해 본 사람들의 사연에 미안해진다. 그런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취지였다.

▲ 윤동주 역 강하늘과 송몽규 역 박정민 등 두 배우들은 외모도 실존 인물을 닮았다는 평가가 많다.

두 배우들을 본 순간 연출한 맛이 나겠다 싶었다. 두 사람이 나보다 더 윤동주와 송몽규에 대해 고민하고 설명하며 단 1초라도 놓칠까봐 집중하는 순간에는 고맙다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같은 감옥에서 죽은 기구한 운명의 두 사람은 결정적 순간을 하나씩 거쳐오면서 경쟁하고 때로는 외면하면서 서로 성장해간다. 그런 모습이 두 배우의 모습 안에서 투영되면서 영화를 풍부하게 만들어줬다.

▲ 한번도 영화화되지 않았던 윤동주와 송몽규, 두 인물에 대해 이 감독이 어떤 디렉션을 줬는지도 궁금하다. 배우에 대한 감독의 역할은 캐스팅하는 순간 끝난다. 그 다음은 그들을 있는 그대로 믿어주고 연기를 잘 펼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거다. 고맙게도 두 사람은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역할을 만들어갔고 감독으로서 나는 그들을 그저 다독여준 것 뿐이었다.

이준익 감독. 사진= 이규연 기자 fit@hankooki.com
▲ 아무런 보상 없이 이런 프로젝트를 만들어가겠다고 결심하는 열정 자체가 놀랍다. 이준익 감독의 열정은 어디서 나오나?일단 나는 심심한 걸 못 견딘다. 그리고 현장에서 같이 작업하는 스태프와 배우들의 어울림을 무엇보다 사랑한다. 영화 현장은 정말 재미있고 행복한 곳이다. 영화하는 사람들은 아마 그 매력 때문에 배가 고파도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 직업군 중 어떤 직업도 채울 수 없는 부분이다. 함께 뭔가를 향해 가는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각자의 역할을 해 내는 어울림의 재미는 내 기준에서는 최고의 가치다. 억만금을 지니고 있어도 삶이 재미없으면 괜찮은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돈 없고 '가오'가 없어도 재미있으면 승자다. 죽는 날까지 재밌게 사는 놈이 왕이다.

▲ 지난해 '사도'의 대중적 흥행에 이어 저예산 영화에 도전한 건 흥미로운 행보였다. 이 감독의 다음 계획은 뭘까?현재 구상하고 있는 작품이 있다. 하나는 조금 쉬운 소재고 다른 하나는 까다로운 소재인데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다. 아직 확정되기 전까진 말을 꺼내기는 조심스럽다. 나는 은퇴도 한번 해 본 감독이니까. 하하.

이준익 감독. 사진= 이규연 기자 fit@hankoo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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