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식. 사진= 이규연 기자 fit@hankooki.com
[스포츠한국 장서윤 기자] “배우로서 끊임없이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해요. 그건 창작하는 이들이 숙명이기도 하죠.”

과연 누가 이 배우의 무게감을 흉내낼 수 있을까. 한국 영화 흥행 신기록(1760만명)을 쓴 영화 ‘명량(감독 김한민)’ 이후 최민식의 선택은 영화계의 최대 이슈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가 집어든 카드는 16일 개봉하는 영화 ‘대호(감독 박훈정 제작 사나이픽처스)’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 ‘대호’와 조선 최고의 명포수가 조우하면서 벌어지는 운명적인 사건을 그린 이 작품에서 최민식의 상대역은 가상의 호랑이다.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더 이상 총을 들지 않으려는 명포수 천만덕으로 분한 최민식은 6개월여의 촬영기간 내내 호랑이를 그저 상상 속에서 그려내며 연기에 임했다.

그리고 언론시사를 통해 첫 공개된 결과물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먹먹함을 남긴다. 호랑이를 ‘산군님’이라 부르며 자연과 함께 살아온 우리 조상들의 모습을 배경으로 역사적 풍랑 속에서 자신의 원칙에 따라 삶을 영위해 온 천만덕의 모습은 배우 최민식의 모습과 오버랩되며 경외감마저 불러일으킨다. 작품에서 그저 가만히 서 있는 존재감만으로도 백만 가지의 표현을 보여주는 듯한 그가 사람이 아닌 호랑이를 상대역으로 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대호'는 제작비(총 제작비 170억원) 면에서나 최초로 시도하는 호랑이 CG나 여러 면에서 많은 부담을 안고 시작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을 것 같다.배우로서는 사실 막막했다. 상대역을 상상하며 연기하는 것 자체가 힘든 여정일뿐더러 촬영 당시에는 100% 컴퓨터그래픽(CG)으로 구현된 호랑이가 어떻게 나올지 보장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런 이유로 '대호' 시나리오는 몇년간 제작되지 못하고 떠돌았다. 그럼에도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작품의 주제의식에 완전히 끌렸기 때문이다. 인간의 '업(業)'에 대한 메시지나 정서가 마음이 와 닿았다. 기술이 뒷받침돼야 하고 작품의 성공여부는 대중이 평가하겠지만, 소재의 다양성 측면에서도 필요하다고 느꼈다. 비판을 받더라도 반드시 의미있는 작업이니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영화가 성공한다면 모두 CG팀의 공이다.

최민식. 사진= 이규연 기자 fit@hankooki.com
▲ 대역 배우가 존재하긴 했지만 상상에 상당 부분 의존해야 했던 호랑이와의 연기를 어떻게 끌어갔는지 궁금하다. 가상의 상황을 계속해서 상상했다. 몸이 피곤할 때는 호랑이가 고양이처럼 보였다가 다른 때는 더 멋있게 생각되기도 했다. 하하. 어차피 주사위는 던져졌고, 막막함을 토로해봤자 도움되지 않는다. 상대배우를 상상해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즐기는 수밖에 없었다. '김대호'라고 호랑이의 이름도 짓고, '이런 상황에선 이럴 거야'라고 배우들과 얘기하면서 되도록 즐겁게 해보자고 생각했다. 배우 인생에 남을 만한 독특한 경험이었다.

▲ 작품 속 최민식은 사연을 지닌 산골의 명포수 천만덕의 존재를 그대로 입은 듯 하다. 특별한 액션을 하지 않아도 존재감만으로 맡은 역할을 소화해내는 비결이 있을까. 물론 어렵다. 촬영에 들어가자마자 배우는 '바로 그 역할'이 돼야 한다. 그건 감독의 디렉션만으로 해결되는 부분은 아니다. 예를 들어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 나는 수십 년간 산에서 살아온 포수가 돼야 한다. 관객들이 보자마자 '아, 진짜 포수같다'는 느낌을 줘야 하니까. 연기하는 인물의 역사를 배우가 단숨에 입는 것은 그저 배우 스스로 겪어 온 삶의 무게와 살아온 굳은 살을 통해 표현해나가야 하는 부분이다. ▲ 인간과 자연, 그리고 '업'이라는 주제의식 자체가 쉽지 않은 접근이었을 것 같은데. 굳이 구분해 말하자면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정서는 불교적 세계관과 한국적 토테미즘에 가깝다. 다행히 나는 어릴적부터 불교 정서에 익숙한 가운데 자라났고 그래서 접근이 자연스러웠다. 실제로 우리 조상들은 '산군제'라고 호랑이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치렀다. 과연 그것이 미신인지에 대한 잣대를 들이대기 전에 거기에 담긴 마음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할머니가 자식들이 잘 되길 바라며 정한수를 떠놓고 비는 의식에는 인간의 염원이 깃들어 있다. 어떤 종교든 본질은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정서가 좋았다.

▲ '대호'에는 최근의 한국영화와는 구분되는 깊이가 느껴진다. 돈과 명예를 뛰어넘는 것에는 '품위'가 있다. 영화를 찍으면서도 겉멋이 아닌 품위를 유지하자는 생각이었다. 이 작품 또한 엄연히 상업영화의 굴레 속에 있지만 그래도 기술적인 화려함 속에 가벼움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손주를 모아놓고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듯 알맹이를 담고 싶었다.

▲ 그런 가치관이 과연 현 세대에게도 통할까'대호'의 가치가 요즘 세상에 더 필요한 것 같다. 예를 들어 짐승들은 자신의 정해진 영역에서만, 그리고 먹을 만큼만 사냥을 한다. 더 이상 욕심내지 않는다. 자연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런 원칙이 있다. 극중 천만덕은 글 한 줄 배우지 못했을 산골의 일자무식 포수지만 자연의 순리를 들여다 볼 줄 알았다. 원칙을 어겼을 때 자연은 그저 자비를 베풀지만은 않는다. 어찌 보면 이 작품은 새로운 세대와 구 세대의 가치관의 충돌을 담고 있기도 하다.

▲ '명량' 이후 최민식이 어떤 선택을 할지 영화계의 눈이 쏠려 있었다. '대호'가 '명량'의 차기작이라는 데서 오는 부담감은 없었나. 난 단순한 편이다. '부담감이 전혀 없다'라고 말한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런 데서 자유로우려고 노력한다. 어떤 성공이든 실패든 빨리 털어내는 게 중요하다. 내가 좋아하는 걸 다른 누구에게 강요할 수도 없는 거고 각자의 사는 모양새도 다른 거다. 흥행 또한 연기의 영역을 떠나면 관객의 몫이다. 배우로서 그저 그 때의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최민식. 사진= 이규연 기자 fit@hankooki.com
▲ 얘기를 듣다 보니 영화에 대한 배우 최민식의 깊은 진심이 묻어난다. 영화를 앞두고 잘 되게 해 달라고 굿을 했다. 작품을 무사히 잘 마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마음이었다. 연극배우로 시작한 나는 무당과 배우는 본질적으로 비슷한 면이 있다고 느낀다. 배우들이 신들렸다는 말이 아니라, 무대와 관객이 있고 연기, 노래와 춤, 그리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데서 그렇다.

▲ 극중 천만덕이 그렇듯 배우 최민식이 고수하는 자신만의 원칙은 무엇일까.배우 일을 하면 할수록 느끼는 것은 이 일은 '양날의 검'이라는 점이다. 어린 나이에 반짝거리는 재능은 많은 인기와 명예를 가져다주지만 그만큼 다른 것들을 빼앗아가기도 한다. 창작하는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워야 하는데 후배들을 보면 너무 틀 안에 갇혀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모든 걸 조심한다는 건 이미 그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다. '해서는 안된다'에 갇혀 너무 기획적인 테두리에 자신을 가두지 말고 자유롭게 살라는 얘기를 자주 해 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든 작품이든 한번에 빨리 판단하는 것도 위험하다. 내가 접하는 모든 것에 대해 다각적인 접근을 무시한 채 '이건 이런 것'이라고 단정짓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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