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얼과 죽어가는 소녀’(Me and Earl and the Dying Girl) ★★★★(5개 만점)

다정다감하고 슬프고 10대의 성장기이자 암으로 죽어가는 소녀의 드라마. 지난해 개봉된 ‘안녕 헤이즐’을 닮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안녕 헤이즐’과는 달리 주인공들 간에 로맨스는 영글지 못한다. 가슴보다는 마음이 만나는데 그래서 더 현실적이고 정이 간다.

이런 내용의 영화는 처음은 아니지만 매우 독특하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젊은 배우들의 꾸밈없는 연기와 감상적이 될 수도 있는 내용을 절제해 신선하게 다가온다. 한 치의 가식도 없는 진짜 느낌이 화면을 포근히 적시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제시 앤드루스의 소설이 원작으로 작가가 각본을 썼는데 올해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과 관객상을 받았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영화의 촬영감독이 한국인 정정훈이라는 사실. ‘올드보이’등 박찬욱 감독의 단골 촬영감독인 그는 박 감독의 ‘스토커’로 할리우드에 데뷔했는데 와이드앵글로 주인공들의 관계와 심적 상황을 아름답게 포착했다.

제목을 단 챕터와 함께 가끔 애니메이션을 사용해 주인공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된다. 피츠버그의 고등학교 3학년생인 그렉(토머스 맨)은 왕따를 안 당할 정도의 외톨이로 자신의 약점을 매사에 무관심한 태도로 감추고 있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흑인 친구인 얼(R.J. 사일러)을 조수 삼아 온갖 고전영화들의 단편 패러디를 만드는 것. 따라서 그렉은 얼을 친구라기보다 동료 작업인으로 부른다.

어느 날 그렉의 어머니(카니 브리튼)가 아들에게 그렉의 동급생인 레이철(올리비아 쿡)이 불치의 백혈병이 걸렸으니 찾아가 보라고 압력을 넣는다. 그렉은 레이철과 친구는 아니지만 어머니의 압력에 못 견뎌 레이철을 방문한다. 이 때부터 둘은 때로는 얼이 끼어든 만남을 이어가면서 서서히 짙은 관계를 맺게 되는데 시간이 가면서 레이철의 병세는 악화한다.

그렉은 죽어가는 레이철과의 관계를 통해 변신과 성장을 경험하게 되는데 죽어가는 레이철이 미래에 대해 안절부절못하는 그렉에게 오히려 삶에 대해 한 수 가르쳐 주고 있다. 이 영화는 자신의 앞날에 대해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그렉이라는 민감한 소년의 성장기요 우정의 얘기다. 그렉이 레이철의 악화하는 병세를 자기 힘으로 어쩔 도리가 없어 엉뚱한 짓을 하는 모습이 우습고도 가슴 아프다.

고전 영화광인 그렉은 이런 좌절감을 얼과 함께 옛날 영화들을 풍자하면서 달래는데 ‘브레스리스’ ‘돈 룩 나우’ ‘400 블로우즈’ 등 많은 고전영화들이 풍자된다. 둘 다 국외자들인 소년과 소녀의 마음의 만남은 결국 슬픔으로 끝나는데 마지막 장면이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슬픔을 웃음으로 감싸고 있는 순진하고 순수한 작품이다. 알폰소 고메스-레혼 감독. 박흥진 미주한국일보 편집위원 겸 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 회원 hjpark1230@gmail.com

저작권자 © 스포츠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